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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향기 Jul 04. 2023

옷은 어머님이 아니라 내가 입는 거라고.

파란색 투피스(속상함+당당함)

  결혼식은 누구에게나 큰 의미이다. 다르게 살아온 사람과 새로운 인생을 발맞추어 나가야 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날이니 소중하고 뜻깊은 날이다. 그 의미와 더불어 예식날은 신랑 신부에게 긴장의 날이다. 막상 해보니 이렇게 짧게 끝날 예식을 위해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생일대의 결정과 약속을 하는 날이니 짧은 시간이 그토록 긴 의미를 가지는 날도 인생에서 드물 것이다.

  결혼식날 처음 입어보는 웨딩드레스는 공주과 여자들에겐 일생일대의 이벤트이고 평생 잊히지 않을 추억이다. 폐백식 때 입은 한복, 식후드레스까지 모두 처음 입어보는 옷들이라 설렘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옷은 내가 입는 것이지 남이 입혀주는 것이 아니다. 결혼식 당일 옷과 관련해 썩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평탄치 못하게 시작된 결혼 결정과 준비 과정. 멀리 떨어져 있는 남편과 짧은 시간에 결혼 준비를 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고 무엇보다도 시어머니의 간섭이 너무 힘들었다.

  시댁은 그냥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의 집안이었다. 한 때 잘 살았다고 하지만 그건 내가 알던 시절도 아니었고 최소한 나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시절일 뿐이다. 하지만 그 시절을 못 잊는 시어머니에겐 다른 의미다. 어울리는 부류가 다 고향유지들이다. 시아버지 동기분들 다수가 고향 시장을 역임했고 사업을 할 때 어울리던 사람들도 다 지역 유지들이니 그 관계를 끊을 수 없다. 이빨 빠진 상태에서 그런 부유하고 지위를 갖춘 사람들과 만남을 유지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랴. 없어도 있는 척은 기본이요. 살던 가닥이란 게 있으니 재정유지는 힘든 일이다.

  시어머니의 삶이니 내가 알 바는 아니었지만 결혼식에 올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해야 되는 시어머니에겐 이것저것 신경 쓰이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시어머니의 삶이 내 삶에 끼어드는 순간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결혼식장 고르는 일부터, 웨딩드레스까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남편과 기껏 고른 웨딩드레스를 보고는 저런 걸 입고 어떻게 결혼을 하냐며 본인이 아는 웨딩샵으로 데리고 갔다. 결국 내가 원하던 샵과는 계약취소. 폐물도 마찬가지다. 폐물이랄 것도 없는 간소한 귀금속 몇 개 맞추는 일이었다. 나오라는 말에 거부를 했더니 남편과 싸움이 일어났다. 그 당시 비슷한 시기에 결혼했던 후배 동기 모두 남편과 함께 가서 마음에 드는 귀금속을 예물로 고르는데 시어머니랑 그런 절차를 거쳐야 된다는 게 싫었던 것뿐인데 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결혼 준비 과정의 갈등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식당에 인사를 드릴 때 입는 옷 때문에 또 한바탕 다툼이 일어났다. 시어머니는 한복을 고집했고 나는 결혼예복으로 산 파란색 투피스를 고집했다. 한복이 입기 싫었고 예복을 입고 싶었다. 식이 끝나면 밥을 먹고 공항으로 가야 되는 이유도 있었고 당시에 날씬했던 나는 한복보단 예복을 입고 싶었던 것이다.

 누구의 결혼식인지 모를 일이었다. 시어머니 손님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꼭두각시가 된 느낌이었다.

 첫사랑의 실패가 떠올랐다. 영문과에서 교대로 진로를 변경하게 한 아버지도 떠올랐다. 언제까지 내 의견은 없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인가? 왜 이렇게 인생이 내 주도가 아닌 어른들 주도로 끌려가기만 하는 것인가? 남편에게 끝까지 못하겠다고 투피스를 입겠다고 고집했다. 한복 사건으로 중간에서 남편이 받은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했다는 걸 결혼 후에 알았다.


  결혼은 남, 여 두 사람이 하는 것이지 결혼하는 사람들의 부모가 하는 것이 아니건만 간섭과 강요가 난무한다. 자식이 성인으로서 가정을 꾸리고 진정한 독립을 이루길 바란다면서 결혼 준비 과정에서의 강요와 간섭을 한다면 자식을 끝까지 붙들고 놓아주지 않겠다는 몸부림일 뿐이다. 자식의 결혼이 아닌 내 체면을 과시하는 날이 결혼식이라는 생각에서도 벗어나야 된다. 결혼해서 정말 잘 살기를 바란다면 묵묵히 진행 과정을 지켜봐 주고 응원해 주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결정이란 걸 스스로 할 수 있는 어른들이니 말이다.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의 생각을 꺾기란 너무 힘든 일이다. 연배가 많은 사람의 의견이니 무조건 들으라는 강요도 꺾기 힘들다.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과는 대화도 힘들다. 대화의 맥이 끊겨버린다. 살면서 더 나이가 들 때 과연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인가?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 지금 자식들에게는 어떤 어른인가? 한 번 더 생각해 볼 문제이다.


 결혼 예복 파란 투피스. 그 이후 체중 증가로 2,3번밖에 못 입고 옷장에 얌전히 걸려 있다. 사철 옷장 정리를 할 때마다 떠오르는 일화. 결코 평탄치 못했던 결혼 준비. 시어머니가 손에서 우리를 놓아주었더라면 더 행복하게 시작할 수 있었을 결혼 준비와 이후 결혼 생활. 이젠 좀 평온하고 싶다.


   폐백이 끝나고 파란색 투피스를 입었다.

  '예쁘다. 00아. 그냥 네 생각대로 잘했어. 당당하게 살아.'

  지금의 나가 그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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