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선생 월급이 그다지 많은 것도 아니지만 맞벌이를 하니 명품 하나쯤 못 살 형편은 아니다. 그렇게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그냥 적당한 가방이나 옷을 사서 적당히 편하게 입고 편하게 드는 게 좋다. 적당한 가격의 가방은 마구 던져도 대고 잃어버릴까 흠집 생길까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적당한 가격의 옷도 행여 올이 걸릴까, 더러워지진 않을까 걱정 안 해도 되며 드라이를 맡기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좋다. 자라기를 그냥 적당히 자라서인가 보다라고 쓸데없이 자조적 연민도 해 본다.
그런 내가 명품이란 걸 처음으로 사봤다. 분홍색 구찌 가방.
고향에 교사들 모임이 있어서 기차를 탄다. 옆 자리에 앉은 아가씨는 기차 밖에 서서 애틋한 눈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연인에게 연신 손을 흔들어댄다. 좋을 때구나.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연인들의 시선이 괜히 나한테도 오는 것만 같은 멋쩍음에 내 시선은 이리저리 방황한다. 시선이 아가씨의 가방에 꽂힌다. 구찌. 어라 저 분홍색. 쨍한 분홍도 아니고 먹물 살짝 한 방울 떨어뜨려 섞어놓은 듯한 저 오묘한 분홍빛. 아 가지고 싶다. 아가씨가 가방을 연다. 수납력도 꽤 좋겠다. 키도 커서 작은 가방은 안 어울리고 보부상 같이 사는데 이것저것 넣기에 적당한 가방이구나.
그 가방을 본 날부터 명품가방을 여기저기 쇼핑앱에서 뒤지고 있다. 홈쇼핑에서 명품을 팔 때는 가격 비교까지 해 가며 열심히 시청했다. 나도 하나쯤은 있어야 되지 않나 객기를 부려 본다. 그래 내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이렇게 살아야 되나. 하지만 엄두는 안 난다. 가방 하나를 이 가격에 산다고? 박봉의 대한민국 교사가 한 달 치 월급을 다 털어야 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난 아끼고 사는 사람이니까 구경만 하고 말자.
아들이 애를 먹인다. 이젠 되도록 되새기고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 한 때는 일기장에 다 기록하고 다이어리에 메모하며 곱씹고 곱씹었다. 금쪽이의 모든 경우가 우리 아들이라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들이 하는 행동이나 말은 견디기 힘들면서도 곱씹게 된다.
'네가 나한테 이랬지? 나중에 철들면 너는 다 까먹었을 테니 내가 다 말해줄 테다'라는 기세로 기록하고 곱씹는다. 애랑 싸움질하려는 못땐 엄마다. 이젠 되도록 지우려 한다. 그게 맞을 것이다. 아무튼 애 먹이는 아들을 핑계로 삼는다. 그래 사보자. 까짓 거 앞으로 15년은 더 벌텐데 한 달 안 벌었다 치지 뭐. 그래도 망설인다.
아들이 난리법석을 피우고 한바탕 집이 들썩한다. 최종적으로 결심한다. 뭐 하러 이렇게 살아. 너 위해 살아.
쇼핑앱 장바구니에 얌전히 놓여있던 가방을 클릭한다. 마음은 방황하지만 손가락의 클릭속도를 마음이 따라가지 못한다.
'주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겨우 11글자에 무슨 황송한 대접이라도 받은 양 착각에 빠진다. 나도 이제 명품 드는 여자야. 혼자 어깨도 으쓱대 본다.
그렇게 내 생애 처음으로 명품 가방을 사봤다.
예전에 이탈리아 여행을 갔을 때 동료들은 꼭 명품을 사 오라고 했었다. 아 벌써 5년 전. 남편이 매장에 들르자 해도 거부했다. 그때 한 두 개 건졌으면 좋았을 것을 뒤늦은 아쉬움이 남는다. 가격도 지금보다 싸고 환율도 높지 않았으니. 재테크도 꽝인 나다. 하지만 그땐 명품에 가치를 두지 않았으니 어쩌랴. 생각해 봤자 놓쳐버린 첫사랑에 대한 아쉬움만큼이나 부질없다.
그렇게 마련한 생애 1호 명품 가방.
가방을 매면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그래 내 나이엔 이런 걸 들어야 돼 합리화도 해 본다. 괜시리 누군가 쳐다보는 것 같다. 내가 돈을 버니 이런 것도 살 수 있구나 내 삶이 고맙기도 하다. 그래서 나름 뿌듯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잘 들지 않는다. 괜스레 어디 흠집이라도 날까 봐, 여기에 이 옷은 입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끈이 미끄러운데, 온갖 핑계를 다 댄다. 이상하게 안 편하다. 나랑 자라온 배경이 판이하게 다른 사람을 앞에 두고 대화를 하고 있는 느낌이다. 불편하다.
한동안 고이 모셔둔다. 모셔둘 물건을 왜 산 것일까? 쇼핑앱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구경만 하면 돈도 안 들 것을, 돈은 들여서 구입해 놓고 사용하기 보다는 구경하려고 둔 장식품이 되어 간다.
안 되겠다. 그냥 마구 들어버리자. 생각을 바꿔본다. 정말 마구 들어봤다. 별 거 없다. 별 감흥이 없다. 가방은 그냥 가방일 뿐이다. 손에 들고 다니기 힘든 여러 가지 물건을 넣고 빼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이상도 아니다.
거기다 봐줄 사람도 없다. 출근하면 교실로 바로 들어오고 하루 일과를 거의 교실에서 보내고 퇴근할 때 교실을 닫고 휑하니 나가버리는 일상. 내가 구찌를 들든 플라스틱 봉지를 들든 이마트 쇼핑바구니를 들든 아무도 관심 가질 사람도 없다.
보여줄 사람도 자랑할 것도 아닌데 왜 산 걸까? 단지 자기만족을 위해 산 것인가? 자기 만족을 위해 이렇게 큰 돈을 쓰고 명품을 산다는 것이 쓸쓸하게 느껴진다. 자기만족에 그리 비싼 돈을 들여야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본다. 그리고 사보니 그다지 만족스럽지도 않다. 어쨌든 이건 내 기준.
삼만 원짜리 원피스를 입어도 만족할 수 있고, 에코백을 들어도 만족할 수 있다. 맛있게 만든 음식을 먹는 자식을 봐도 만족할 수 있고 깨끗하게 정돈된 집을 보고 만족할 수도 있다. 어떻게든 자기만족은 찾으려면 널리고 널렸는데 굳이 비싼 돈 들여 자기 만족. 나한테 웃음을 날린다. 그렇게 만족하고 싶었니?
어쨌든 사봤으니 됐다.
브런치 글쓰기를 시작하고 구찌 가방을 마지막으로 쇼핑을 끊었다. 쇼핑앱에서 브런치앱으로 수평이동했을 뿐이라 잘된 건지 뭔지는 모르겠다. 가끔 남편이 말한다. 대한통운 아저씨가 우리집 이사 간 줄 아시겠다고. 우습다.
몇몇 친한 사람만 브런치에 글 쓰는 걸 안다. 그분들의 첫 번째 공통 질문.
"그거 수익 나는 거예요?"
생각해보지 않은 뜻밖의 질문. 수익 없지. 그냥 좋아서 하는 거지라고 대충 얼버무렸다.
지금 다시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수익은 안 나고 앞으로도 안 나겠지만 쇼핑 끊은 걸로도 수익을 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