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실천재 차♡♡(1)

낯선 이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는 당신. 기부천사.

by 나무 향기
천재(天才) : 선천적으로 타고난, 남보다 훨씬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


우리 남편은 천재다.

평범하디 평범한 사람인 내가 못해낼 일, 하지 않을 일들을 너무나도 잘 많이 하고 있으니 천재다.

내 머리로는 상상하지도 못할 일들을 자꾸 해내는 걸 보면 남편은 창의성과 융통성이 매우 뛰어난 천재다.


천재의 사전적 정의를 보시라. 재주와 재능이 뛰어난 사람. 우리가 알고 있는 재주와 재능이 긍정적인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은 알겠으나 사전에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해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호주에 그 많은 세금을 한 달 만에 내고 오는 우리 남편은 재주가 뛰어난 것이 분명하다. 그게 어디 아무나 할 일인가? 재주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벌금의 액수는 1년 치 자동차세를 능가하며 1년 치 재산세도 능가하는 돈이지 않는가. 물론 차와 집값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내 기준에서.


남편은 벌금천재였다. 자신의 무신경함을 이제는 정도껏 반성하는 듯 보이지만 아마 살면서 벌금 고지서가 나를 반갑게 맞이할 일은 분명히 또 있을 것이다.

오늘은 분실천재 남편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한 번 입은 셔츠 어디로 간 거니?

출장을 앞둔 남편. 아무래도 출장은 비즈니스이니 옷을 그럭저럭 신경 써 갖춰 입어야 된다. 셔츠를 좋아하는 남편이지만 쇼핑앱에서 고르고 골라 예쁜 남방을 하나 샀다.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남편의 의복을 걱정하는 나는 정말 좋은 아내이다. 남편은 복이 많다. 복이 많은 자기를 만난 내가 복이 많은 여자라고 늘 항변하지만.

선명하지 않고 점잖고 우아한 분위기의 검은색, 남색, 붉은색 줄무늬가 교차하는 남방. 점잖음과 약간의 발랄함을 적절히 섞어놓은 남방이다. 젊어 보이겠는 걸. 소매 끝단을 곱게 접어 단추까지 달아놓은 마지막 세심함이 돋보이는 남방. 이 브랜드의 사이즈가 남편에게 맞을 것인가 무척 고심을 하며 며칠 장바구니에 둔 남방을 즐거운 마음으로 결제한다. 남편이 예쁘게 입어주길 바라며.

마음에 들어 하는 남편. 사이즈도 잘 맞다. 기쁘다. 나의 선택이 맞았음에.

미국 출장을 가셨다. 돌아온 날 빨래를 해 주려고 가방을 살피는데 남방이 없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다그치는 나는 형사가 된다. 얼버무리다가 실토하는 남편.

호텔에 두고 오셨단다. 한국 공항에 도착해서 그 사실을 깨닫고 미국 법인에 있는 한국 직원에게 전화를 했더니 다행히 호텔에 남방은 있었다. 그분에게 택배로 붙여줄 수 없냐고 물었지만 그분이 일하는 곳과 호텔은 거리가 멀다. 미국이지 않은가. 별 수 없이 남방은 포기한다. (대만 출장 가서도 청바지를 두고 와서 법인 직원분이 택배로 부쳐준 적도 있다.)

점잖음과 발랄함이 함께 공존하는 그 남방. 남편의 덩치가 작은 것은 아니고 한 번 입은 깨끗한 옷이니 호텔 직원이건 누가 됐건 간에 횡재한 셈이다. 멀리 미국 땅의 낯선 이에게 남방을 선물한 그대는 진정한 기부 천사.


2. 레고를 싸게 산 거 맞니?

아들은 레고조립을 좋아한다. 브런치 작가 페르세우스 님처럼 아들에게 레고를 스스로 창작하는 길을 열어주지 못한 못난 엄마는 완조립해야 될 레고를 대체 몇 개나 사준 건지 모른다. 내 눈에는 징그러워만 보이고 그게 그거 같은 괴기한 드래건들이 대체 몇 개인지. 이 방 저 방 다 차지하고 있다. 어쩔 것이뇨. 창의성과 정성이 없는 엄마가 돈으로 해결한 결과물들이니. 누굴 원망하리오. 다 팔면 부자 될 것이다. 행여나 해서 요즘은 레고 박스도 쟁여두고 있으니 지저분해져 가는 집은 내 한숨이요, 지출되는 비용 또한 한숨이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니 뜸해져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

다시 진짜 이야기로 돌아간다. 레고를 미국에서 사면 좀 더 싸게 살 수 있단다. 직원들한테 듣고 와서 신나게 이야기한다. 고로 아들은 사고 싶은 레고를 이미 이야기해 둔 터. 미국 마트에서 전화 온 남편에게 가격을 확인해 봤다. 오호 어떤 레고는 더 비싸기도 한데 다행히 아들이 원하는 것은 훨씬 싸다. 횡재한 느낌. 그래 여보 꼭 사 와. 안전하게.


스마트폰 사용 관련 7일짜리 캠프를 방학 때 신청했었고 남편이 출장 돌아오는 날은 그 캠프가 끝난 한 달 후 구성원들이 다시 모임을 하는 날이었다. 피자와 치즈를 손수 만들며 즐거운 오전을 보내고 있었다. 입국 시간을 따지면 그 모임이 끝날 시간쯤에 분명히 참석할 수 있다고 했는데 갑자기 못 온다고 한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3시간이 지나서야 남편이 집으로 왔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지만 늘 그렇듯 뭔가 켕기는 듯 얼버무린다.


아들이 레고를 빼낸 순간 함께 흘러내리는 이마트 영수증. 미국에 이마트가 진출했구나. 대단한 대한민국. K 파워는 정말 위대하도다.

우리 남편의 허술함은 그 누구에게도 비견 못하니 천재다 천재. 형사로 돌변한 나, 추궁 시작이다.

땀을 삐질 삐질 흘리는 남편. 미국에서 렌터카를 반납하면서 짐이 많았던 남편은 동행한 회사 사람에게 레고만 잠시 맡겼다고 한다. 왜 하필 레고냐고요. 그리고 공항 가는 길을 잘 몰라 렌터카 직원에게 질문도 하고 렌터카 직원이 차가 흠난 곳이 없는지 살펴보는 동안 매의 눈으로 함께 살펴봤다고 한다. 혹시나 돈을 물어내거나 하면 안 되니까. 그래서 짐을 내려놓았던 것이고 하필 레고를 그에게 맡겼다. 그 사이 동행자도 짐을 내리며 레고를 바닥에 놓았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레고를 바닥에 그냥 두고 나와버린 동행자. 자기 짐이 아니었으니 신경 안 쓴 것이다. 맡겨둔 사람의 부탁은 온데간데없이. 허술한 우리 남편은 그분이 당연히 잘 들고 있을 줄 알았고 한국에 입국하고서야 없어진 걸 알게 된 두 분. 같이 간 그분도 우리 남편만큼이나 무신경하고 허술한 분이구나. 그 부인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있겠군.

그렇게 해서 싸게 살 줄 알았던 레고는 두 배의 값을 지불하고 사게 되었으니. 지금도 서재 책장에 놓인 그 레고를 보면 두 배나 비싼 값을 지불한 기억이 떠올라 가슴을 친다. 내 돈 주고 사서 미국에 헌납하고 온 레고. 생생한 새것을 누군가의 자식이 선물 받았으리라. 기뻐할 그 미국 아이에게 기쁨을 선물한 그대는 진정한 기부 천사.


강대국 미국에 자발적으로 기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당신. 나의 남편 000.

그대의 선행에 박수를 보내나니.

또한 글감을 기꺼이 제공해 준 그대의 아름다운 마음에도 깊은 박수를 보낸다.

오늘도 아내를 위해 아침상을 차려준 그대에게도 사랑의 마음을 담아 보낸다.

남편의 기부 행위를 자판으로 열심히 두드려대며 한을 풀게 해 준 당신.

당신은 정말 착한 남편이도다.


-등근육이 아파서...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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