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결혼 10년 동안 초과수당이 없는 회사에 다닌다고 말했다. 내가 알던 회사가 당신이 다니는 회사가 아닌 것인가? 당신 혹시 회사 속이고 나랑 결혼한 거니? 백수에 무직자인 것이여? 안 그래도 연애할 때 장인어른이 그 회사 다니는 거 맞는지 확인해 보라고 했건만.
그 회사가 초과수당이 없다고?
이상하다 하면서도 사람 말 잘 믿기로 소문난 필자는 그대로 믿는다.
"안 됐다. 여보. 그렇게 일 시키고 회사가 수당도 안 주다니. 이름만 소문난 당신 회사. 어디 가서 그 회사 다닌다고 말도 못 하겠다. 정말. 나쁜 회사네."
불쌍한 남편 위로하며 편까지 들어준다.
어느 날 청소를 하려고 보는데 은행예금 거래 내역서가 나온다. 은행 업무 돈 모으기 등 집안 재정을 내가 다 처리하고 있으니 이게 대체 무슨 내역서지? 황당할 따름이다. 찬찬히 살펴보니 당신의 이름 차00 세 글자가 적혀 있구나. 그것도 자그마치 5000만 원. 500만 원도 아닌 5000만 원.
그날 퇴근한 남편은 또 추궁을 당한다. 아 천재적 당신. 아무리 부인이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자이기로서니 어찌 그리 큰 거짓말을 자그마치 10년 동안이나 하고 있었단 말인가?
가끔은 월급 외에 단비 같은 돈이 들어오곤 했다. 기억도 안 나지만 무슨 이유를 대며 회사에서 준 돈이라고 했다. 본인이 다른 통장으로 들어온 수당의 일부를 본인 명의 월급 통장에 손수 보내며, 보내는 사람을 회사 이름으로 바꾸어서 입금한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단비 같은 그 돈을 황송하게 받으며 꼬박꼬박 저금한 나이니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10년 동안 거짓말하면서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을지도 모를 당신을 생각해서 내 자비로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노라. 어찌 됐든 5000만 원은 내 것이다. 나에게 거액을 기부한 당신.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1억 만들어서 당신한테 짜잔 하고 선물하려고 그런 거야. 도박을 한 것도 아니고 5000만 원이나 선물했으면 그만 꾸중하고 용서해도 되는 거 아냐?"
하지만 그대의 10년 거짓말을 쉽게 용서하기엔 친구 앞에서 우리 남편 회사는 초근 수당도 안 준다고 떠들어댔던 내 바보 같은 모습이 생각나 용서가 불가능하구나.
속으로 비웃었을 내 친구 모습이 떠오른다.
'어휴. 000. 넌 그걸 믿니?'
4. 아름다운 로마여. 너는 정녕 아름다운 도시인가?
로마여. 꿈에 꾸던 도시. 다른 곳은 몰라도 이탈리아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냥 이유 없이 가고 싶은 도시. 남편과 유럽 여행을 9일 떠나면서 이왕 가는 유럽 프랑스도 다른 곳도 들르자던 남편의 요구를 거부했다. 처음 가는 유럽인데도 불구하고. 난 온전히 이탈리아만 즐기고 싶다고. 나의 고집스러움을 이해해 주는 남편 착하도다.
피사의 사탑을 가기로 한 날. 열차 승차권을 미리 끊어 놓았다. 테르미니역에서 발권기 앞에서 발권을 하려는데 이상하게도 잘 되지 않는다. 예약한 표인데 뭐 이리 어려운 거지. 하기는 요즘 가게마다 있는 한글로 된 키오스크도 버벅거리며 조작해서 옆에 있는 아들이 엄마 왜 그러냐고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남의 나라 글자로 적힌 발권기가 어디 그리 쉬우랴.
남편은 다시 역무원을 찾으러 여기저기 헤맨다.
짐을 내려놓고 우왕좌왕한다.
5분도 안된 시간.
남편의 새로 산 가방은 사라져 버렸다.
가방뿐이랴. 한 달밖에 할부금을 내지 않은 새 노트북, 여행을 온다고 사서 개시도 못한 밀짚모자. 남편이 결혼 후 첫 출장에서 선물해 준 소중한 의미가 담긴 구찌 선글라스. 내 카디건. 다 사라져 버렸다.
아름다운 로마여. 너는 정녕 아름다운 도시인가? 그 짧은 5분 사이 가방이 사라질 동안 가방 주변에 있던 어느 누구도 나에게 언질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대한민국이라면 당연히 그 사람을 붙잡아주거나 소리라도 질러주는 사람이 있었을 터인데. 아니 애초에 훔쳐가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소중한 물건들은 사라져 버렸다.
남편도 글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이라 노트북을 들고 첫 유럽여행의 기행문을 써보고자 들고 왔건만 할부금 11개월을 남겨 두고 사라져 버렸다. 먼지처럼. 글은 한자도 못 썼다.
몇 달 뒤 저 멀리 브라질에서 남편의 계정으로 접속 시도가 있다는 구글 메시지가 온다. 추측일 뿐이지만 그 노트북에 접속한 것일지도. 그러기엔 너무 먼 시간이기도 하지만 구글 메시지는 그날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 깔끔하고 반짝거리는 삼성노트북을 로마 불쌍한 시민에게 헌납했으니. 그분은 아마 우리 노트북과 새 모자, 가방, 선글라스를 팔아 반달치 월급은 챙기지 않았을까? 형편이 어려운 이에게 기꺼이 노트북을 선사한 내 남편이여. 그것도 로마까지 가서 선행을 베푼 그대는 진정한 기부 천사. 착하도다, 우리 남편이여.(사실 이 일엔 나의 실수도 있다. 남편이 우왕좌왕한다고 물건을 내려놨을 때 지키지 않고 잠시 발권기로 가서 여기저기 누르고 살펴본 내 잘못. 그 짧은 시간에 물건이 사라질 줄이야. 지하철 안에서 로마 시내를 걸으며 행여나 소매치기라도 당할까 가방을 꼭 붙들어 매고 다닌 것은 헛수고였고, 한방에 모든 걸 날려버렸으니. 로마는 아름다운 도시이자 씁쓸한 미소를 짓게 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 뒤 우리는 최대한 돈을 아껴가며 이탈리아 여행을 마쳤다. 맛있는 것도 제대로 못 먹고.)
남편은 분명 천재임이 확실하다.
회사가 초근수당을 주지 않는다고 10년을 믿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겨우 예금 내역 거래 종이 쪼가리 하나로 10년의 노력이 한방에 날아갔으니 너무나 허술한 천재.
쓰다 보니 그걸 믿은 나는 요즘 애들 말로 바보탱이.
그 뒤 11달을 노트북 할부금을 내며 아끼고 살아야 했으니 천재 남편 덕분에 내 삶은 아주 살짝 피폐해져 가는구나. 천재 화가 이중섭이 가난하게 살았던 것처럼 천재 남편을 둔 나도 어쩌면 가난하게 살았어야 될 운명이었는지 모른다는 돼도 안 한 생각을 해 본다. 그만큼 가난하진 않았으니 행운일 걸로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남편 이제 그만. 사회에 환원하는 것 그만. 그것도 이국 땅에 환원은 그만. 잘 벌어서 진짜 제대로 사회에 환원하는 훌륭한 시민이 되자꾸나. 나에게 기부한 5000만 원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