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만에 글을 쓴다.
신학기가 시작되고 새로운 아이들, 보호자들에게 적응하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일상이 온통 잿빛이라 글 쓸 엄두는 내지 못했다.
글은 유채색이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강박이 있다. 그렇다고 유채색 글을 쓸 능력도 유채색 글의 소재도 별로 없다. 무채색 글을 쓸지라도 유채색 결론이 나야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브런치에 글을 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채색 글은 일기장에나 쓰지, 글을 읽고 얻을 게 없다면 그게 글인가? 글을 읽고 사유할 게 없다면 그게 글인가?라는 생각이 많다. 나만의 생각이니 다른 사람 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생각에 의해 행동하고 지배되는 삶이니 쉽사리 글 쓸 엄두는 내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컴퓨터 앞에 앉았다.
브런치 작가 김소연님의 사랑받을 자격이라는 책을 어제 잠깐 읽었다. 무채색 일상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걸 보면서 약간은 용기를 얻었다고나 할까?
다른 측면은 답답해서 터질 것 같은 일상을 조금은 익명성이 담보된 글쓰기 플랫폼에 주절거리며 털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신학기가 시작되었고 우리집엔 성인이 두 명뿐인데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집에서 나오지 않는 성인 아닌 사람이 한 명 있다.
방학 기간 동안 여행도 갔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마음이 좀 편안했던 건지 그나마 밝은 모습을 보이던 미성년이었다. 개학 3주를 앞두고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신학기 교육과정 만들기 주간 때문에 바빠진 엄마의 틈을 노린 건지, 엄마라는 사람이 마음을 푹 놓아버려서인지 불가피한 충돌이 일어났고 그 후 4주간을 지옥 같은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런 상황 앞에서 부모는 죄인이다.
대 보호자, 대 학생 서비스를 잘해야 되는 일을 하고 있다.
신학기 첫 주에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밤마다 전화를 해대고 문자를 넣고 수업 중에도 전화를 넣는 부모에게 시달렸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부재중 전화에 응답을 하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목소리톤을 바꿔 통화하고 있다. 솔 이하의 저음이 평상톤인 내가 솔 이상의 톤을 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공감해 주고 약간은 미안해 하는 늬앙스로 대화를 나눠야 한다. 조금은 연기자가 된다.
이렇게 대 보호자 서비스는 그동안의 단련으로 그럭저럭 잘해가고 있다.
미성년 앞에서 보호자를 대하는 서비스 정신을 발휘할 수 없는가 하는 생각을 문득 문득 한다. 연기라도 좀 하면 안되나?
그랬다면 미성년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하는 쓸데없는 후회를 하고 있다.
후회, 후회, 지난 10년은 후회 뿐이다.
이제 더 이상 후회하지 않기로 늘 마음 먹고 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 후회한다고 지금 일상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동안 후회는 정말 많이 했다. 이렇게 했더라면, 난 왜 이렇게 하지 못했을까? 이렇게 했으면 이렇게 됐을 거야.
결국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후회하면서 내리는 결론대로 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이제 지나간 일은 분석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그냥 앞만 보고 갈 뿐이다. 우리는 지나간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지만 지나간 일들에서 나는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저 눈물 흘리고 후회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도 너무나도 대역죄인이 되어간다.
그럴 바엔 생각하지 않는 게 더 나은 선택이다.
그냥 앞만 보고 하루 하루 사는 게 더 나은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