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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향기 Mar 21. 2024

뒤돌아 보면 나를 미워하게 되니

아이 학교에 제출할 소견서를 받았는데 감쪽 같이 사라지고 없다. 정신없는 하루하루 속에서 집은 어질러져 있고 정리를 한다고 하는데도 늘 어수선하다. 정리 능력이 아주 없는 사람은 아니니 물건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서 문제다. 아이가 써 준 쪽지 한 장, 제자들이 써 준 편지 한 장도 선뜻 못 버리니 집이 어수선할 수밖에 없다. 그 어수선한 상황에서 소견서를 받은 봉투를 어디에 뒀는지 온 집을 삼일 동안 뒤졌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재발급을 받으러 가야 된다. 병원은 재발급 비용으로 천 원을 요구한다. A4 한 장 종이값과 간호사의 클릭질 한 번 인건비, 프린터기가 돌아가는 전기비, 서류에 찍어주는 인주값 비용 치고는 참 비싸다는 하등 필요 없는 생각을 하며 병원 문을 나선다.

학기 초 환경구성물품을 사러 대형 문구사로 향한다. 누군가를 만나기 싫은 날이다. 학교 동료를 만날까 봐 얼른 이것저것 담고 문구사를 나선다. 좌회전 코스로 들어가야 되지만 위에서 밀려오는 차들 때문에 결국 직진 코스에서 좌회전을 하는 무리수를 던진다. 퇴근 시간이라 차들은 밀리고 정지 신호는 바뀔 줄 모른다. 중앙선 반대 차로에서 오는 차들이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한 대씩 지나갈 때마다 도로가 울렁거리고 차는 휘청거린다. 휘청거리는 차의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문득 생각한다.

'달려오는 차를 향해 내가 핸들을 꺾으면 어떻게 될까?'

살아갈 자신이 없었고 여기서 그만 생을 포기하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옳게 보였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하다못해 생명보험이라도 받아서 아이들이 남은 생을 사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내가 스스로 죽는 것은 어리석어 보였다. 그때부터 세상 모든 것은 내게 나를 살해할 수 있는 도구처럼 보였다. 그 생각은 운전할 때 내 차의 엔진이 고장 나 이 차가 저 강물로 돌진했으면 하고 바라는 것부터 시작했다. 커브길에서 마주 오는 저 트럭이 나를 덮쳤으면 좋겠다. 이 비행기가 떨어졌으면 좋겠다. 미친 척하고 엑셀러레이터를 밟아 내가 운전하는 차를 저 절벽 아래로 날려버릴까. 머릿속을 점령해 오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 식은땀이 솟아났던 날들이 있었다. -공지영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문득 원하지 않는 생각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특히 운전을 할 때다. 짧은 생각이 스치다 이내 사라져서 다행이다. 

'안 되지. 나 혼자 잘못되는 것도 아니고, 핸들을 꺾는다고 다른 곳으로 간다는 보장도 없고, 상대방 운전자가 뭐가 되는 거람.'

아직 이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어서, 공지영 작가처럼 식은땀이 날 정도는 아니어서, 그래도 사라지긴 싫은가 보다 싶어서 다행이다.


아이는 매일 한바탕씩 난리를 피운다. 세상에 처음 듣는 말들을 나한테 다 퍼붓는다. 시간도 가리지 않는다. 아이들과 수업 중에도 문자는 울리고 전화는 울린다.

저런 말들을 대체 누가 만들어냈을까 하는 궁금증과 동시에 엄마로서 갖가지 말을 듣고 있는 내가 한심해지고 비참해진다. 가스라이팅이 별 건가. 예전엔 길면 한 달, 짧으면 2,3주에 한 번 겪는 일이었지만 이젠 거의 한 달째 매일 이어지는 온갖 말들 속에서 나는 아이가 말하는 그런 엄마가 되어 있고 아이가 말하는 그런 천박한 지능이 떨어진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오늘도 약을 두 봉지나 털어 넣었다. 정기적으로 먹는 약은 몸이 적응을 못해서 잠이 너무 쏟아진다. 처방받은 약은 쌓여만 간다.

결국 의사 선생님은 수시로 복용하는 약을 처방해 주셨다. 약을 겁내던 내가 요즘은 수시약을 털어 넣고 있다.



나는 그렇게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나를 사랑한다고 연습했다. 솔직히 나는 사실 이걸 진심으로 원하지도 않고 왜 연습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보다는 그냥 이 세상을 다 때려 부술 정도로 원망하고 미워하는 게 내 적성에 맞는 것처럼 느껴지고, 젊을 때라면 몰라도 이제 와 너를 사랑해 같은 닭살 돋는 말을 하는 것이 과연 미친 짓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는 조금은 다른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했다. 아인슈타인이 한 유명한 말대로 매일 똑같은 일을 행하면서 결과가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미친 짓이니까. 이제는 조금 다른 일을 행하기로 했던 것이다. - 공지영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에서도 이성의 끈을 잡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내가 어찌 보면 대견하다. 반 아이들한테 웃어주고 미소지어주고 있어서 다행이다. 학부모의 요구에도 친절하게 대응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유약하고 소심하지만 어릴 때부턴 웬만한 일은 혼자 헤쳐나가고 견뎌서인지 그럭저럭 견뎌내고 있다. 열정 넘치던 젊은 시절엔 사소한 일로도 분개했지만 이젠 웬만한 일은 무덤덤해졌다. 못 먹어 가며 잠자기도 힘들어하며 그렇게 뱃속에 품었던 아이에게서, 다칠까 봐 항상 눈을 떼지 못했던 아이에게서 받는 악플과 비난보다 더 비참한 게 있을까.

어느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할 순 없지만 지금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결말을 맺을 수는 있다.-카를 바르트

 이때까지 아이를 어떻게든 바로잡아보자 온갖 일을 했지만 틀린 방향이었으니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그동안 아이를 원망하면서도 나를 많이 원망해 왔다. 상담을 가도 항상 있었던 일을 털어야 되고, 문제의 원인을 찾고자 하는 분서적인 성격 탓에 일이 왜 이렇게 되었나 5년 10년 17년 전으로 거슬러 가곤 했으니, 그 끝엔 항상 내가 있었다.

내가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때 조금 더 헤아렸다면, 내가 그런 곳에 아이를 떠밀지 않았더라면...


결론은 과거를 반추하고 나를 반성하던 것이 아이에게 엄마를 원망할 구실을 줘버렸다. 내가 나를 원망하던 말을 아이는 고스란히 나에게 토스하며 나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있다. 

뒤돌아보며 나를 미워하고 생채기 냈던 일은 나에게도 상처였고, 그걸 이용하는 아이에게도 상처이다.

뒤돌아 보면 나를 미워만 할 것이기에 이젠, 과거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책에서 본 위의 말처럼 지금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결말을 맺도록 오늘과 현재만 바라볼 것이다.

과거를 바라보던 행위가 아무런 좋은 결과를 낳지 않았음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이 세상의 좋은 책들에서 지금 여기를 외치는 이유를 이젠 조금 알 것 같다.

눈물이 난다. 

내 친구 약을 만나러 가야 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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