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에서 회사 이름부터 말하는 당신
퇴직 몇개월 후, 어떤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할 때였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일을 하고 있고, 작년말까지 ○○금융그룹에서 23년간 일했던 Jason이라고 합니다."
그 자리는 스타트업 집단 1:1 멘토링을 하는 자리였고, 다들 ○○회사에서 무슨 일 하고 있다는 소개를 수없이 들어야 했다. 전에는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았었는데 참 낯설었다.
잠깐, 나는 지금 무엇을 소개한 거지?
'○○금융그룹 출신'을 소개한 건가, 아니면 'Jason'을 소개한 건가?
그날 집에 돌아와서 거울을 보며 다시 연습해봤다.
"안녕하세요. 저는 Jason입니다. 벤처투자와 스타트업 컨설팅을 하고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 문장이 입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뭔가 허전하고, 가볍고, 신뢰가 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23년간 회사 이름으로 나를 소개해왔다. 회사 이름이 곧 나의 신뢰였고, 나의 가치였으며, 나의 정체성이었다.
명함 없는 나는 상상되지 않았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한국 남성의 평균 퇴직 연령은 만 49.3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50대 초반에 회사를 떠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한 가지 질문 앞에 멈춘다.
이 질문이 왜 이렇게 무서운지 아는가?
우리는 지난 20~30년간 회사 안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이다.
"저는 ○○금융 팀장입니다."
"저는 ○○전자 부장입니다."
"저는 ○○건설 차장입니다."
우리의 자기소개는 언제나 회사 이름부터 시작했다.
아이 학교 학부모 모임에서도, 동창회에서도, 심지어 가족 모임에서도
우리는 "○○회사 다니는 OOO"로 소개되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회사 이름은 나의 일부가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회사 이름이 '나'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퇴직하는 순간, 그 이름이 사라진다.
명함이 사라진다.
그리고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카드 팀장 Jason"에서 "Jason"으로
퇴직 직후, 나는 심각한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누군가 "뭐 하시는 분이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머뭇거렸다.
"저는... 음... 지금은... 스타트업 펀드 몇개를 운영하고 있고, 중견기업 컨설턴트... 같은 걸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고 나면 스스로가 초라해 보였다.
상대방의 반응도 미묘했다. "아, 그러시구나..." 하며 대화를 얼른 다른 쪽으로 돌렸다.
회사 다닐 때는 달랐다.
"○○금융그룹 팀장입니다."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상대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관심을 보였다. 명함을 교환했고,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라는 말도 자주 들었다.
하지만 퇴직 후에는 아무도 내 명함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명함이 없었다.
어떤 명함을 만들어야 할지도 몰랐다.
"Jason, 투자자? 컨설턴트"?
너무 가벼웠다. 한국에 투자자랑 컨설턴트가 몇 명인데.
"Jason, 전 ○○금융그룹 팀장"?
이건 더 우스웠다. 퇴직했으면 퇴직한 거지, 왜 아직도 전 직장을 들먹이나.
결국 나는 3개월 동안 명함 없이 지냈다.
그리고 그 3개월 동안, 나는 깨달았다.
명함 없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퇴직을 앞둔 40~50대에게 가장 무서운 질문이 있다.
"회사를 떠나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이렇게 답한다.
"저는... 음...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뭘 잘하는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시키는 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23년간 금융회사에서 일했지만, 정작 나 자신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나는 무엇을 잘하는가? 나는 어떤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회사는 내게 역할을 줬다. 팀장, 과장, 차장, 부장... 그 역할을 수행하면 됐다.
나 자신을 발견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발견할 시간이 없었다.
매일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주말에도 메신저가 울렸다.
회사에서 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랐다.
그렇게 20년 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퇴직하는 순간, 나는 텅 비어 있었다.
이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다
"나는 스스로 가치(돈)을 창출할 수 있을까?"
"난 언제까지 생산적인(필요한) 사람일 수 있을까?"
"나는 사회에 기여할 수 있을까?(보람)"
이 세 가지 질문은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이 질문들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나머지 질문에도 답할 수 없다.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돈을 벌 수 있겠는가?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생산적일 수 있겠는가?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겠는가?
50대의 가장 큰 두려움은 경제적 불안이 아니다.
정체성의 위기다.
"명함 없는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얼어붙는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2024년,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중·고령자 노동시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50대 조기퇴직자의 76.3%가 "재취업 시 정체성 혼란을 경험"
퇴직 후 6개월 이내에 우울증 증상을 보이는 비율: 43.7%
주된 원인: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정체성 상실
당신만 그런 게 아니다.
대부분의 40~50대가 같은 두려움을 겪는다.
회사 이름으로 살아온 20~30년.
이제 그 이름을 내려놓아야 할 때.
우리는 두렵다.
명함 없는 나를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해답은 있습니다
나는 3개월 동안 이 두려움과 싸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해답은 밖에 있지 않았다. 내 안에 있었다.
나는 연결하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계속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왔다.
회사에서도, 스타트업 생태계에서도, 그리고 퇴직 후에도.
이것이 내 정체성이었다.
회사 이름은 사라졌지만, 내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 안에도 분명 정체성이 있습니다.
회사 이름이 아닌, 진짜 당신의 정체성.
다만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만약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회사 밖에서 나를 소개하는 연습을 할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Jason입니다. 저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을 합니다."
회사 이름 없이, 직급 없이, 명함 없이.
오직 나 자신으로.
그렇게 10년을 준비했다면, 퇴직 후 3개월의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오늘부터 시작하세요.
회사 밖에서 당신을 소개해보세요.
회사 이름을 빼고, 직급을 빼고, 오직 당신 자신만으로.
"안녕하세요. 저는 OOO입니다. 저는 ___을 좋아하고, ___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이 빈칸을 채울 수 있을 때,
당신은 비로소 명함 없이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다음 장 예고:
"나는 스스로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까?"
정체성을 찾았다면, 이제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갈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