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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은 Jan 02. 2021

#9 빼앗긴 주도성

빼앗긴 아이들

  요즘은 친절한 부모님이 많습니다. 최대한 상냥한 어투로 이야기하고, 설명도 자세히 해주죠. 아이에게 늘 미리 안내하고 아이가 모르는 게 있으면 적극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애씁니다. 주변에서는 ‘상냥하다’라고 보기도 하고, ‘대단하다’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아이를 양육하면서 친절함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하지만 아이는 어떻게 느낄까요? 오히려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헷갈리는 거죠. 자신에게 향하는 엄마의 태도는 부드럽지만 내용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아이들은 어렴풋 느낍니다. 뭔지 모르지만 찝찝한 마음이 드는 거죠.


  예를 들어 볼까요? 

  아이가 하는 일 족족 엄마가 따라붙으며 “그건 그게 아니라~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이의 일을 모두 부정하고 자신의 방법이 옳다는 걸 부드러운 어조로 밀어붙인다는 생각 안 드시나요? 친절과 부드러움을 가장한 간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부모님들은 아이가 완전하지 않고 잘 못하는 게 많아서 ‘도와줘야 하는 존재’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 수정해주고, 가르쳐줘야 하고, 고쳐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런 생각을 품고 아이를 대했다면 엄마의 친절함과 상냥함은 무능한 아이로 만드는 숨은 칼날과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게 유혹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아이가 자신의 뜻대로 하길 기대하며 유도하는 부모를 말합니다. 아이에게 선택권을 주는 척하지만 사실 자신이 원하는 정답이 이미 정해져 있고 그 정답을 아이가 선택하도록 이리저리 유도하는 것이죠. 이런 부모들은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지만, 이건 어때? 이걸 하면~”하며 부모가 암암리에 결정해 놓은 선택에 대한 장점을 늘어놓습니다. 결국 아이는 부모의 은근한 압력과 유혹에 못 이겨 자신의 선택을 포기하고 부모의 뜻대로 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대놓고 압박을 하거나 기회를 뺏는 것보다 더 교묘한 술수에 가깝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부모가 얻는 게 과연 뭘까요? ‘아이가 내 말을 잘 들었다’하는 안도감 정도일 겁니다. 실제로는 아이의 주도성이 이런 부모의 덫에 걸려서 빼앗기고 있는데도 말이죠. 부모는 자신이 덫을 놓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냉정하게 이 과정을 살펴봐야 합니다. 


진짜로 아이에게 좋은 일일까요?


  스스로 대화를 잘하고 상호적인 편이라 여기는 부모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일방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호작용을 하는 부모는 듣는 것을 더 잘해야 하는데, 스스로 상호작용을 잘한다 여기는 부모들의 대화 패턴을 보면 대게 설명식이 거나 일방적으로 정보를 주는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상호작용을 잘하는 것이라 착각한다는 걸 나타내죠. 훌륭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거에 유능함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렇듯 잘못된 정보를 알아서 잘못 대처하고 있었던 게 상당히 많았습니다. 부드럽고 상냥한 어투가 '진짜 친절함'이 아니란 사실처럼 말이죠.


  물론 더 심각하게 주도성을 망가트리는 부모님도 계십니다. 유혹하는 부모 못지않게 주도성을 훼손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아이에게 지나치게 선택권과 주도성을 허용해서 아이가 방종해지고 무모해지고 위험해지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앞서도 제가 언급했지만 최소한의 안전장치와 보호영역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최소한의 보호가 없는 건 무모한 도전을 부추기는 꼴이 됩니다. 부표가 없는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 깊은 곳까지 가서 위험을 당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이렇게 위험에 노출되어 보호받지 않은 아이는 큰 위험을 겪게 될 확률이 높고, 이후 아무런 도전도 하지 못할 정도로 움츠러들게 될 겁니다. 아니면 한계가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아예 아무런 시도조차 못하고 겁먹게 될 수도 있는 거고요. 산을 한 번도 오르지 못한 사람에게 에베레스트를 보여주며 마음껏 오를 수 있다고 한다면 오히려 겁을 집어먹게 되어 산은 쳐다도 보지 않게 될 거란 말입니다.


  이렇게 아이의 주도성을 빼앗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더 최악의 경우를 살펴볼까요? 

  아예 주도성의 싹 조차 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경우입니다. 그건 바로 아이가 주도성을 발휘할 생각조차 하지 않도록 환경을 만드는 부모를 말합니다. 이런 부모는 부족함 없이 미리미리 알아서 아이에게 대령합니다. 아이가 고민하거나 스스로 해결해보거나 위험에 노출될 여지를 남겨두지 않게 말이죠. 항상 부모가 먼저 대안을 마련해두고 아이보다 앞서서 해결을 해놓고 아이는 손에 흙 한번 물 한 방울 묻힐 필요조차 없게 만듭니다. 유토피아가 따로 없죠.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다는 걸. 유토피아는 허상입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허상을 주는 것이죠. 아이는 현실이 아니라 허구인 세상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짜 삶이 행복할까요? 마치 환상에 빠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것, 그래서 현실에서 아이가 삶을 주도적으로 살게 하는 것. 이게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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