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야, 형이 요 몇년 이리저리 한 숨 돌릴 여유가 없었던 거 같아서 내가 오라고 했어.
형은 네 걱정하던데 내가 너한테 얘길한다고 했어. 이번에 어디 바람 좀 쐬고 오면, 거기서 생각도 정리하고,
시나리오 아이디어도 얻어오고 그러지 않겠나 싶어서. 함 보내주라.'
나와 10년을 사귄 Y에게, 필리핀에서 어학연수를 막 마친 대학후배 C가 보낸 카톡의 내용은 이러했고,
C의 꿍꿍이는 다음과 같다.
-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비행기편이 일주일쯤 여유가 있다.
- 관광지에 가보고 싶다. 보라카이로 가자!
- 보라카이를 혼자 가면 심심할 것 같다.
- 지금 당장 오라면 올 수 있는 프리랜서는 '햄' 뿐이다.
(햄은 형님의 변형인 행님의 줄임말로, 동의어로는 '희야' 가 있다.
공교롭게도 C의 이름 마지막 자가 '희'라서, '희야'는 그를 올려부르는 느낌이 든다..는 걸 왜 쓰고 있지..?)
- '햄'이 오려면 빨리 비행기표를 예약해야 되는데,
장소는 궁극의 휴양지, 신혼부부들의 천국 보라카이, 일정은 듣기만 해도 설레는 12/24~12/28.
- Y의 허락이 필요하다.
Y는 그 카톡을 내게 보여주며 이렇게 대답했다.
'시나리오는 무슨. 노트북 놓고 가.'
C는 나의 비행기값과 숙박비를 댄다고 했고, Y는 내게 카톡으로 현금 50만원을 송금해줬다. 카톡 만세.
2019년 연말에 일어난 일이다.
Y의 남동생의 크룩스 슬리퍼를 빌려 신고, Y의 50만원 중 환전한 200달러를 지갑에 넣은 나와 함께,
최대 풍속 200KM 에 육박하는 태풍 판폰이 필리핀에 상륙했다.
C는 현재 한국 나이로 서른 아홉이다.
서른 여덟의 나이에 필리핀에서 석 달동안 영어공부를 한 그는, 그 직전까지 라오스 영사관에서 근무했다.
그 전에는 라오스에서 중고차를 팔았고,
그 전에는 라오스에서 코이카 태권도 단원으로 봉사했으며,
그 전에는 서울의 내 자취방, 혹은 때론 내 자취방 윗집 등에서 지내며 이런저런 일을 했다.
그 전에는 포항의 언덕 위에 있는 한 대학교에서 나와 같은 학부에 다녔고, 군 전역 후 같은 영화동아리를 했다.
그 전에는 51사단의 공병부대 운전병이었고,
그가 입대하기 몇 달 전, 나는 51사단 신병훈련소 조교로 있다가 전역을 했다.
만약 내가 서너달 늦게 군대에 갔다면 C가 내게 훈련을 받았을지도 모르고,
그랬다면 전역 후에 C가 나를 다시 같은 과 선배로 만났을 때, 날 반가워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행이 아닐 수 없다. C는 곰 같다.
아닌게 아니라, C는 라오스에 처음 태권도를 가르치러 가서, 자신을 '미남' 이라 부르라고 현지의 아이들에게 소개했는데, 아이들은 웃으며 그를 그렇게 불렀다. 라오스 말로 '미남'이란 발음은 '물곰' 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난 그 말에 동의한다. 라오스 전 국민이 그 별명을 본명 삼으라고 했을게다.
그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월드 오브 워 크래프트'의 만렙 캐릭터를 서넛 보유하게 되었을 때, 난 그를 서울로 불렀다. 난 그 때 다시 늦깎이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 시절의 나는 온갖 단편영화 현장에 그를 부르곤 했다.
영화과 학생들은 물론이고 외부에서 온 스텝들마저 모두 그의 풍채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수줍음과, 역시나 풍채에 어울리는 힘과(보통 두명이, 힘들 땐 세 명이 들고 옮기는 소형발전기를 로케 옥상까지 혼자 들고 올라 와, 땀을 내며 헉헉대는 자신을 부끄러워 한 일화가 아직 이문동 어디선가 떠돈다.), 역시나 쉬이 적응하기 힘든 그의 발가락 양말과, 놀랍지만 납득은 가는 젠틀한 트럭 운전 솜씨에 반했다.
그는 드라마 현장의 발전차를 몰기도 하고, 상업영화 제작부를 하기도 하고, 나와 디아블로3를 하기도 하고,
때때로 글도 쓰고, 골목에 눈이 쌓이면 눈삽을 구해와서 자기 집 뿐만 아니라 큰 길에 접어들기 전까지 모든 골목의 눈을 치웠다. (나에게도 꼭 삽을 쥐어줬다.) 그러면서 내게 이런저런 시나리오 아이디어를 얘기하기도 하고, 날 보채기도 하고, 나에 대해 기대하기도 하고, 우리(대학 시절 같이 영화 동아리를 했고 충무로에 발붙이려 애쓰는 몇몇과 다른 나라로 떠난 몇몇)의 몇 년 후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기도 했다.
아무튼간에, C는 '햄'이 빨리 뭔가 되길 바랬고, 그럴 수 있다고 믿었고, 응원했고, 때로 맞먹고 놀렸고, 가끔 시장에서 감자를 스무개 쯤 사와서 매시 포테이토를 해서 먹기를 권하고, 내가 먹다 남기면 삐졌다.
난 때때로 C와 있는 것을 매우 즐거워했고, 때때로 C의 말이 갑갑하거나 지루하기도 했다.
라오스로 떠난 C가 한국에 잠시 들를 때면 항상 내가 사는 곳에 머무르곤 했다.
내 집엔 한국에서만 필요한 그의 겨울 옷과 베개, 그가 놓고 간 드럼세탁기 등이 있었다.
난 그 후로 두세번 이사를 했고 몇 개의 단편영화를 만들고, 몇 군데서 상영을 한 뒤 학교를 졸업했고,
두 세개의 엎어진 프로젝트, 한 두 개의 웹툰 기획, 수십 개의 알바, 몇 개의 뮤직비디오, 다시 보기 민망한 셀 수 없는 바이럴 광고, 이런저런 여러 누군가들과의 작당, 성과, 실패, 허리 디스크로 인한 두 번의 구급차 시승, 여러 번의 위궤양, 위염, 조직검사, 식도염, 지방간, 그리고 최근의 2년을 채우고 있는 심리상담, 무엇보다 Y와의 꿈같은 시간, Y와 떨어져 지낸 악몽같은 시간, 다시 Y와 함께 하는 깨끗한 아침공기 같은 시간 등을 지나쳐왔다.
그렇게 포항에 있던 C를 이문동 자취방에 부른 때로부터 11년이 흘렀다. 그 동안 라오스의 약 2000명 남짓 되는 한국인들이 모두가 이름을 아는 영사관 직원이 된 C는 지치지 않고 말했다. '햄, 함 와요.'
C가 코이카 단원이었을 시절에는, 단독 주택에 혼자 살았다. 주방에는 종종 도난당한다며 오토바이를 주차해놓았다. 그 말인즉, 주방이 내 집보다 넓을지도 모른단 말이다. 그가 사치스러워서가 아니라, 주거비로 나오는 돈은 다른 용도로 쓸 수 없기에 굳이 아끼지 않은 결과라고 했다. 그는 검소하다. 그가 우리집에 놓고 간 겨울옷이 담긴 상자에, 라오스에 있는 그의 모든 옷이 들어가고도 남을만큼.
그가 살고 있지 않았다면,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알지 못했을 동남아의 한 나라, 라오스에 사는 C. 나는 그의 근황을 들을 때마다, 마치 내 자랑을 하듯, C가 우리 중 제일 재미있고 보람차게 산다고, 그의 소식을 다른 지인에게 신나게 전하곤 했다.
오랜만의 연락에 내가 그의 안부를 물으면, 그는 언제나 내 근황을 더 자세히 묻고, 살림살이는 괜찮은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나서, 조심스레 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자긴 잘 모르지만, 그래도 아마 내가 하는 작업은 잘 될거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다 마지못한 척 뜨문뜨문 이어지는 내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내게 필요한 건 없는지 물었다. 내가 계절이 바뀔 때 즈음 한 번씩 카톡으로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하면,이유를 묻지 않고, 검소한 그의 생활이 남겨준 그의 월급의 여유분을 계좌로 쏴주곤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렇게 덧붙였다.
'너무 신경쓸 게 많고 여유가 없으면 시나리오가 나오나. 함 와요.'
그리고 항상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죽고 못사는 고슬고슬한 볶음밥이 몇푼 안되는 돈에 산처럼 쌓여 서빙되는 동네라고, 그늘에 잘 매달아 둔 해먹도 있으니 와서 실컷 누워있느라고. 풀리지 않는 시나리오를 꾸역꾸역 담아놓은 노트북만 들쳐매고 오라고. 밥도 주고 방도 주고 가이드도 해줄테니 비행기만 타라고 했다. 우기에 오면 시원한 맛이 있고, 건기에 오면 습하지 않아 그늘이 시원하니 오라고 했다.
'햄, 진짜 걍 함 와요. 여기서 몇 달 쉬면서 시나리오나 써요.'
내가 아는 한, C는 지치는 법이 없다.
인스타나 페북으로 서로의 근황을 염탐하고 서로의 상태를 넘겨짚으며 시간은 잘 흘렀다. 2014년에서 2015년으로 접어들 때였다. 나는 좋지 않은 일들을 겪고 있었다. C는 내 걱정이 되어 연락을 해 왔다. 나는, 여태 반복했던, '생각해보겠다'거나 '한 번 가긴 가야할텐데..'라는 말 대신 다른 대답을 했다.
거기 볶음밥이 맛나고 양도 많아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난 우기든 건기든 모르겠고, 걍 아무도 안 떠날 가장 싼 비수기의 왕복 비행기값 몇십만원 남짓의 현금이 아쉽고, 자릴 비울 동안 가만히 앉아 꼬박꼬박 월세를 삼킬 내 방을 눈뜨고 보기가 너무 쓰리다고 했다.
타지생활을 하다보니 겪는 것 많고 생각도 많아져, '마침 말해주면 햄이 재밌어할, 햄이 쓰는 이야기에 들어가면 좋을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신이 나 얘기하는 것이 내게 그리 도움 되진 않는 것 같다 말했다. '이런저런 일 하는 거 고생이 많다'며 '멀지 않은 장래에 잘 풀릴거라'며, '프리랜서로 일하며 만난 관계나 일에 감정을 너무 쏟지 말고 자기 작업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 이제 응원이 되지 않는 것 같다고도 했다.
와이파이가 빵빵한 숙소에서 내게 걸어온 카카오톡 전화가 신호가 좋지 않을리 없었다.
하지만 서로 상대의 말을 잘 못 알아들었거나 아님 그런 척을 했다.
언제 한 번 오라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통화는 끝이 났다.
나는, 월세를 꼬박꼬박 내며 그렇게 훌쩍 떠나있다 올수는 없다고 말해놓고서, 이사를 했고, 새로 이사 간 집을 물건들로 가득 채웠다. 위장과 척추를 갈아 근근히 해치운 일들의 보상으로는 살 수 없을 많은 물건들을, 내가 사는 투룸에는 과하다 싶을 원목 가구들을 샀다. 나의 상태를 걱정하여, 마침 자신도 일정이 비니 C를 만나러 같이 라오스로 가자던, 또 다른 후배 K가, 억지로라도 나를 데리고 가려고 빌려준 돈으로 그것들을 샀다. 살던 동네를 당장 떠나야겠고, 그러나 집에 틀어박혀 있고 싶다고 K에게 말했다.
C는 라오스에 8년 넘게 살았다.
C와 연락이 끊겼거나 사이가 나빠진 건 전혀 아니었다. 그는 한국에 들어오면 다른 이는 몰라도 부모님과 나는 꼭 만났다. 내 상태는 조금씩 나아졌다. 하지만 난 한 번도 C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가지 못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가지 않은 거라는 걸 인정하게 된 것은,2019년 연말, C가 Y에게 보낸 저 카톡을 본, 불과 1년 전이다.
그 사이, 내 상태가 어땠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앞으로 이어질 것이다.
간단히 떠들어 보면 이렇다.
한 번에 수십권의 책을, 한 번 조립하면 인스타에 올린 뒤 먼지 한 번 털지 않을 레고 모형들을 샀다.
몇시에 자리에 눕든 해뜨기 직전까지 눈이 감기지 않았고, 눈을 억지로 감아도 머리 속에 떠올리는 말들이 어깨를 지나 귓구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 들렸다.
허리가 아파 그런 것이라 생각해 매트리스를 바꾸고, 침대를 버리고 침상을 사고, 침상을 버리고 라텍스를 사고, 라텍스를 버리고 요를 깔고, 쿠션 두개를 무릎에 괴고, 아로마 디퓨져를 켜고, ASMR을 밤새 틀고, 그래도 잠이 안 오면(거의 매일 그랬다.) 편의점에서 눈에 보이는 아무 도시락이나 사와 유튜브를 보며 먹었다. 해가 뉘엿뉘엿 뜨기 시작하면 마지못해 안대를 하고 귀마개를 끼고 가만 누워있었다. 그렇게 하면 삼일에 하루이틀 정도는 내가 코를 고는 게 느껴지며 의식이 고요해졌다.
2년 남짓한 시간동안 22kg이 쪘다. 허리가 아픈게 먼저였는지, 잠이 안온게 먼저였는지, 먹기 시작하며 아팠는지, 아프면서 먹었는지 모르겠다. 술을 마시는 날은 일년 중 한 손에 겨우 꼽는데, 의사는 항상 간 수치에 대해 경고했다.
큰 방의 두 벽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각 칸마다 책이 가득 꽂혀있고, 책 위의 공간에도, 그 앞의 공간에도 겹겹이, 책장 밖 집 곳곳의 모든 평평한 자리마저 다시 또 책이 쌓였다. 모든 책등에는, Y가 날 만나고 사준 첫 생일선물인, 내 이름이 새겨진 책도장을 꾹꾹 눌러 찍었다.
혼잣말로 욕을 하며 웃기 시작했다. 자주 불안해하는 Y를 나무라고 걱정하는 척하며, 사실은 내가 불안에 떨면서, Y에게 하는 말을 빌미로 사실은 내게 해야 할 말을, 장문의 카톡으로 수십 개 씩 밤새 쉬지 않고 보냈다.
2018년, 결국 상담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럴 여유가 없다고 대꾸하는 나를 Y가 떠밀었다.
'그럴 여유가 언제까지 없을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