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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한 바퀴는 경주가 아니다.

Plain thinking. Simple living.

by cpt

티카


티티카카라는 브랜드의 미니벨로 자전거를 샀다. 접이식은 아니고, 일반 자전거보다는 크기가 조금 작다. '티카'라고 부른다. 집에 물건이 줄면서, 집 안의 빈 벽 한 켠에 '티카'를 세워두면 사이즈가 딱인 공간이 생겼다.


처음엔, 서울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든 티카를 타고 다니리라 마음 먹었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그렇게 한다. 하지만, 목공소로 가는 길은 내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했다. 목공소의, 다이버이자 백패킹 베테랑이자 로드 바이크 마니아이기도 한 누님이, 헬멧을 추천해주었다. 하지만, 레미콘 트럭이 맹렬하게 지나는 좁은 도로를 어찌저찌 극복하고 나면 나타나는 오르막은 아무리 다녀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냥, 셔틀버스를 타기로 했다.


며칠을 타고 다니던 자전거 없이 목공 수업을 듣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묻기 시작했다. 내겐 너무 힘든 코스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우리집에서 차로 이십분 쯤 걸리는 곳에 사는 젊은 동생이, 자기 차로 매번 나를 태워주겠다고 했다. 티카는 자존심 상한 티를 내지 않고 잘 지낸다.




산책자


티카는, 그렇지만, 다른 곳으론 잘 다닌다. 대표적인 경우가, 조깅을 하러 호수공원까지 가는 길이다. 걸어가면 30분 쯤 걸리는데, 그렇게 걸어가서 조깅을 하고, 다시 집으로 걸어올 때면 다리가 후들거려, 오가는 길엔 자전거를 탄다. 가끔, 조깅을 하고 나서, 자전거로도 호수를 한 바퀴 돌곤 하는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 혼자 계속 웃었다.


"호수 한 바퀴 도는 건, 그냥 각자의 출발지에서 자기 속도로 도는 거잖아. 호수로 진입하는 시기도 사람마다 다 달라. 꼭 한 바퀴 다 돌 필요도 없고. 산책은 경주가 아니지! 그런데 왜, 나를 추월해서 지나쳐 가는 사람이 날 앞서 가는 거라 생각했을까?”


경주가 아니라 산책일 때, 가장 큰 재미 중의 하나는 한눈팔기다. 산책 자체가 일종의 한눈팔기일 수도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관둬보려고 집을 나설 때도 있고, 연결될 듯 말듯 아른거리는 무엇인가의 실마리를 잡아보려 무작정 한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에라 모르겠다 일단 앉아서 좀 쉬자.' 싶어 멈춰 선 곳에서 뭔가 문득 떠오르기도 하고, 눈을 감고 기대 앉아 있는 내 뒤로 조잘대며 지나치는 아이들의 대화 속에서 머릴 번쩍하게 만드는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다가도,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두고 주변을 둘러보다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불과 어제만 해도, 나는 식당 아주머니와 서빙하는 알바생이 하는 말을 재빨리 메모해두었다.


산책하듯 지내다 보니 그럴 수 있게 된 거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경주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길은 펼쳐져 있다.

아니, 경주가 아닌 산책을 하는 사람의 길은 더 넓다. 트랙의 경계선을 밟아 실격이 되는 일도 없다.


산책하다 만나는 자갈은, 햇빛은, 노을은, 단풍은, 바람은, 생각은, 사람은, 시간은 모두 공짜다.

나는, 오래 산책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티카가, 자기 프레임에 적힌 글귀로 내게 훈수를 둔다. 백퍼 옳은 말이다.


"Plain thinking. Simple living.”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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