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딸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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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장례식을 치렀다.
상주는 아빠가 아니라,
딸인 나랑 동생이라고 했다.
지인들에게 부고소식을 알리고,
조문을 받았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나는 계속 뭘 결정했다.
장례식장 크기는 어떤 것으로 할지,
꽃은 얼마짜리로 할지,
음식은 어떤 세팅으로 몇인분을 준비할지,
관은 오동나무로 할지 뭘로 할지,
봉안시설은 납골당으로 할지, 수목장으로 할지,
상조회사는 어디랑 할껀지,
도우미는 몇 명을 부를껀지,
발인은 어디에서 할지,
화장 후에는 어디로 모실건지,
너무 급작스러운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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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신이 반쯤은 나간채로 상조회사에서 안내해주는
납골당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너무 높아 잘 안보이는 맨 꼭대기 층은 500만원,
눈높이는 1,000만원,
가슴높이는 700만원,
허리 높이는 500만원,
가장 바닥은 300만원이라고 했다.
이쪽은 볕이 잘드는 특실이고,
이쪽은 기독교인들만 모여있는 기독실이라고 하면서,
부부합장이면 좀 싸게 해줄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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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중에는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음식이 들고 나는 것을 체크해야했고,
나무젓가락, 수저부터 음식, 술까지 일일이 수량을 확인하고
남거나 모자르지 않게 준비해야 했다.
내 딴에는 멀리서 오신 이모들 차비를 챙겨드린다고
봉투를 건냈다가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었고,
혼자 조문오신 분들이 민망하지 않도록 말동무가 되어드려야 했고,
부의금을 통째로 털어가는 좀도둑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해서,
조문을 받는 중간 중간 부의금을 확인했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은 정치얘기를 하면서 언성이 높아졌고,
기독교인이 발인을 일요일날 하면 어떻게 하냐고 수군거렸고,
조문을 하고 술에 잔뜩 취해서 집에 돌아가던 큰고모부는
지하철을 반대로 타서 이상한 동네에 가있다고 했다.
조문이 끝나고는 무의금함을 열어 누가 왔었고,
부의금은 얼마였는지 확인하고,
봉투와 액수가 맞지 않아서 새벽 4시까지 확인을 하다가,
결국 액수가 맞지 않는 채로 CD기에 입금했다.
정작 상주인 나에게는 정신없고, 소란하고, 요란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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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장로님이신 이모부께 기독교식 장례절차에 대해 코치코치 물었고,
호랑이 같은 아빠는 이모부가 하라는 대로 따랐다.
어버이날이라고 카네이션을 준비해주신 상조회사 덕분에,
엄마는 꽃가마를 탔다.
입관을 하면서, 엄마한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했다.
엄마한테는, 미안하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엄마 미안해. 내가 그동안 엄마를 너무 오랫동안 미워했어. 내가 미안해.
엄마, 이렇게 예쁜 세상에 살아갈 수 있게, 나 태어나게 해줘서 고마워.
엄마랑 좋은 추억 많이 만들고 헤어질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내가 엄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어서 감사했던 시간이었어.
딸 같은 명자를 더 많이 예뻐해주고, 사랑해줄 수 있는 시간이었어.
그렇게 약한 모습으로 나한테 와줘서 정말 고마워.
엄마, 나는 여기서 나한테 주어진 삶을 또 열심히 묵묵하게 잘 살아가볼게.
그러니까 응원해줘야 해.
하나님한테 말좀 잘해서 돈도 많이 벌고, 더 예뻐지고,
멋진 남자친구도 만나고, 세상을 이롭게 하면서 살 수 있게 힘좀 보태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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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를 마치고 상조회사에 상복을 돌려드리면서 아빠가 말했다.
“내 친구들 중에 비실비실한 애들 한 3명 있어. 걔네들 소개시켜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