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나와 내 가족을 위한 수속을 담당하던 운남대 대외처 여직원은 나를 만나자도 하더니 쿤밍 시내 중심가에 있는 중국 외교부로 데려갔다.
데려가면서 어디를 가는지 말을 해주지 않아 나는 좀 답답했는데 알고 보니 거류비자를 받기 위해, 혹은 교환교수 승인을 받기 위한 외교부 관리와의 인터뷰 자리였다.
내가 대답을 잘못하거나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판단되면 거류비자가 거부될 수도 있었다.
여자 공무원은 상냥하고 깍듯하게 영어로 몇 가지 질문을 했고 나에게 중국어를 할 줄 아냐고 물었는데 내가 못한다고 대답하려하자, 옆에 있던 운남대 대외처 여직원은 나를 위해 운남대에서 <전담> 통역원을 배치했다고 거들었다.
면접이 끝나고 카페에 가서 내 강의 일정에 대해 회의를 하기로 했다.
당연히 가을 학기 시간표는 이미 짜인 상태라 나는 특강이나 세미나를 몇 번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학부 수업 한두 개를 맡아 주었으면 하는 분위기였다.
내가 잠깐 당황스러워하자 꼭 그럴 필요는 없고 내가 원하는 만큼만 해도 좋다고 해서 매주 한 번씩 두 시간짜리 수업을 하나 하기로 했다.
여직원과 얘기가 대충 마무리가 된 후 한번 더 영화과 교수들과 만나 어떤 과목이나 주제를 원하는지 얘기했고 나는 수강 학생들의 학년과 전공 레벨, 수강생 숫자 등을 물었는데 작은 규모의 수업이 될 거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 쓰촨 성에 파견되어 중국 대학에서 교수로 있는 대학원 후배와 통화를 했다. 내가 석사 학위 작품을 찍을 때 프로듀서로 일해 준 후배인데 중국 물정이 훤했다.
그에게 그간 학교와 진행된 사정을 얘기하니 후배는 꼭 수업을 해보라고 권했다.
한국과는 확연히 다른 수업 분위기이니 특강 몇번 하고 마는 교환교수말고 다른 일반 교수들처럼 정규 수업을 해야 중국 교수들도 학생들도 좋아한다는 것이다.
나는 교환교수가 수업을 한다는 말은 처음이어서 저으기 놀란 상태였는데 후배의 말을 듣고 마음을 비웠다.
'그래, 교수가 수업하는 게 뭐가 이상하냐, 공산당인데 까라면 까야지'
며칠 후 나는 통역 이선생을 집 근처로 불러서 '18주'(!) 동안의 강의 계획과 수업 내용을 설명하고 그가 통역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전문 용어와 한국 영화 산업계 동향이나 그가 어려워하는 전공 영역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살면서 통역을 두고 수업을 해보기는 처음이라 나도 이런저런 강의 구상과 계획을 해 보았는데 두 시간 수업에 이선생이 내가 한 한국어를 통역하는 시간과 학생들의 중국어 질문을 다시 통역을 통해 듣고 대답하는 시간 등을 생각해 보니 수업 내용을 많이 줄이고 주제도 단순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짠, 수업 당일이 왔다.
비가 오는 쿤밍의 시원한 여름날이었는데 친절한 운남대는 우리 집 앞으로 기사와 자동차를 보내주었다.
이 선생이 먼저 기사를 만나 함께 타고 와서 같이 갔다. 내가 기사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선생이 배려를 해 준것이다.
비 내리는 출근 시간대의 시내 도로는 몹시 막혔고 서울에서 분당쯤 거리의 쿤밍 외곽 '쳉공'까지는 그날따라 한 시간도 더 넘게 걸렸다.
이제는 여러 번 온 적이 있는 운남대 영화과 건물에 들어서니 복도에서 만나는 낯선 중국 학생들이 이미 나를 알고 있는 듯 미소 짓고 고개를 숙이기도 하며 인사를 해왔다.
예전 어렸을 때 미국에서 온 원어민 선생에게 영어 회화를 배운 적이 있었는데 어린 내가 푸른 눈의 백인 선생을 만났을 때의 상황을 거꾸로 받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강의실로 들어섰는데,
헐...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거기다가 뒤쪽에는 한눈에 봐도 대학원생이나 강사들로 보이는 나이 든 학생들이 진을 치고 앉아 있었다.
한국에서 전공 학생들 수업만 했던 나는 20명이 넘는 수업을 하지 않았었다.
아직 수업 시작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학생들은 계속해서 들어왔고 첫 수업인지라 학장이 나를 소개하고 마이크를 건네주었다.
수업을 하면서 나는 그제야 왜 후배가 나에게 수업 분위기가 한국과 다르다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
학생들의 전공 수준은 높다고 할 수 없었지만 수업 내내 교수에게 집중하고 무척 예의 발랐다.
나는 그냥 내 생각이라고 전제하고 의견을 말하는데도 내가 하는 말은 무슨 '선언'이라도 되는 양 받아 적고 고개를 끄덕였다.
쉬는 시간에는 교정으로 나가서 커피를 마셨는데 쑥스러워하면서도 내 주변으로 학생들이 몰려와 궁금한 것들을 물어왔다. 대부분 한국 영화 관련 질문이었지만 가끔은 <방탄소년단>이나 나도 이름을 알지 못하는 아이돌 가수들의 근황이 어떤지 묻는 것이어서 웃었다.
첫 수업을 즐겁게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하루가 다 지나갔다.
시간이 많지 않고 통역을 거치느라 준비해 간 강의는 반 정도만 할 수 있었는데 의외로 후반부에는 질문이 계속 이어져서 질의응답처럼 되었다.
오고 가는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