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파트 구하기, 살림살이 구입, 휴대폰 개통, 환전
서울과 비슷한 인구를 가진 쿤밍은 대도시답게 주상복합 아파트가 무척 많았다.
쿤밍의 메인 도로인 북경로(베이징루) 양쪽에는 40층쯤의 주상복합 단지가 끝없이 이어지고 한 단지의 세대수도 어마어마했다.
우리는 쿤밍의 북쪽 외곽의 '우화구' 지역에 거처를 구하기로 했는데 이 지역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었고 버스와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과 시장, 마트, 백화점 등 편의 시설도 풍부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다닐 학교에 다니기 편리했다.
문제는 어느 집을 구할 것인가인데 '한국 사람이 살던 빈 집'을 많이 알고 있던 사범님이 큰 도움이 되었다.
빈 아파트야 여기저기 많았는데 굳이 '한국 사람이 살던 집'을 찾는 이유는 간단했다.
중국 사람들이 살던 집은, 음... 청결하지 않았다.
특히 튀긴 음식을 일상으로 먹는 중국인 가정 주방의 찌든 기름때와 냄새는 상상을 초월한다.
중국 사람에게는 당연한 정도의 더러움인데 한국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고개를 절레절레하게 된다.
다시 한번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청결을 중요시하는지 알게 되었다.
집주인들도 한국인들이 집을 깨끗하게 사용하고 관리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한국인 세입자는 인기가 좋았다.
그다음엔 방의 개수인데 우리는 처음엔 3개짜리 집들을 보다가 집들이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로 치면 40평대 쯤인데 구조는 희한하게 불편한 방식이었고 살림살이가 별로 없는 우리에게 불필요하게 컸다.
그래서 결국 방 두 개, 화장실 한 개의 24평쯤 되는 크기의 아파트로 계약을 했다.
아파트를 작은 걸 구하는 바람에 예상했던 지출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아이들과 아내도 만족해했는데 무엇보다도 주상복합 아파트라 엘리베이터만 타고 내려가면 거의 모든 종류의 식당과 상점으로 연결되는 구조였다.
27층의 높은 층수와 동향이라는 점이 매일 밤마다 멋진 야경을 보여주었고, 또 아침이면 설악산 대청봉 에서나 볼 수 있는 해발 2,000미터 에서의 황홀한 일출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보여주었다.
집을 구하는 일은 사범님이 큰 역할을 해 주셨고 계약할 때는 이선생이 와서 계약 내용을 꼼꼼히 챙겨주고 아파트 임대 계약에 포함된 집안의 가구와 가전제품들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해 주었다.
집은 공교롭게 우리가 머무르던 민박집 바로 옆 동이었는데 그래서 민박집 이사장이 이사하는 걸 도와주고, 하루 시간을 내어 나와 아내가 신체검사를 받고 중국 이민국에 거류비자 접수를 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다음날도 이사장은 시간이 된다면서 나를 자신의 스쿠터 뒷좌석에 태우고 가전제품과 집기류를 싸게 파는 도매시장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서 세탁기와 전자레인지를 구입해서 배달을 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식기와 자질구레한 살림살이 일체를 구입했다.
숟가락 젓가락은 가져왔지만 당장 밥을 할 솥도 없었고 밥을 퍼서 담을 주걱이나 밥그릇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이사장과 우리 네 가족은 집에서 가까운 이동통신사에 찾아가 휴대폰을 개통했다.
휴대폰 개통에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려서 거의 반나절은 대기하면서 마침내 우리는 각자의 휴대전화 번호를 갖게 되었다.
웬만한 일들이 빠르고 편리하게 마무리되어서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민박집 이사장에게는 현금으로 사례를 했고, 통역 이선생과 사범님에게는 식사를 대접했다.
당연히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우리 가족을 도와준 분 들 이어서 이런 사례는 정말 약소한 것이었는 데도 이 분들은 계속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싫은 기색 없이 달려와 주었다.
아내는 그동안 민박집 아주머니를 통해 한국 쌀과, 중국인들은 젓가락으로 떠지지가 않는 찰기 없는 안량미를 먹기 때문에 우리는 연변에서 재배한 조선쌀을 구입해서 먹었다, 집안에서 필요한 소모품을 구입했다.
중국에서 물건을 사고팔 때는 100% 현금 거래였는데 직접 돈을 주고받는 일은 별로 없고 <위챗> 앱을 통해서 판매자의 QR코드를 스캔해서 미리 위챗으로 이체해 놓은 금액에서 빠져나가게 하는 식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중국에서 처음 경험한 거래 방식이었는데 무척 편리하고 정확했다.
거리의 노숙자나 행상들도 각자의 QR코드를 갖고 다닐 정도라 각종 재화나 서비스의 거래가 용이했다.
어쨌든 우리는 처음 1, 2주 동안 어마어마한 지출을 해야 했는데 한국에서 워낙 급하게 오느라 환전을 많이 해오지 못해서 돈이 금방 바닥날 지경이었다.
쿤밍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다 합쳐봐야 기백명 정도였는데 단체 카톡방을 만들어서 서로 필요한 정보를 주고받았다. 우리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이 카톡방에 초대받게 되었고 들어가서 환전을 알아봤다.
누군가가 중국 위안화를 한국돈에 팔겠다는 글을 올리면 댓글을 달아 서로 조건이 맞으면 환전을 하는 것인데 소액 거래 위주였다.
워낙 급해서 이런 방식으로 환전을 해보려고 했는데 얼굴도 모르는 상대는 먼저 내가 원하는 액수를 자신의 한국 계좌에 입금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만나서 직접 환전했으면 좋겠다고 요청했지만 내가 입금하면 내 위챗 계좌로 위안화를 입금시켜 주겠다는 것이다.
다른 한국분들에게 이렇게 거래해도 별 문제가 없냐고 했더니 급하면 그렇게 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한다.
어찌해야 좋을지 망설이고 있는데 이 즈음 다행히 쓰촨 성의 자매대학으로 파견 나와있는 대학원 후배와 연결이 되어 그의 도움으로 급전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로는 한국의 정식 환전사이트를 통해 사이버 환전을 하는 방식으로 위안화를 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