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 씬은 학교 강의실에서 찍으면 되겠네. 강의실 씬을 강의실에서 찍으니 더 이상 무슨 미술 작업이 필요하겠어. 이러니까 로케이션이 좋은 거지, 미술 비용 굳었네. 그다음씬은 교정이니 이것도 역시 장소 섭외 비용 없이 그냥 학교 잔디밭에서 찍으면 끝!
영화학과에서 20여 년간 “졸업작품 제작”이라는 과목을 지도하면서 다양한 일을 겪는데
그중에 학생들에게 장소를 제공한 이들이 제기하는 불평이나 허락 없이 촬영을 감행한(몰카나 도둑 촬영)
민원은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다.
한 번은 한밤중에 전화가 걸려와 받아보니 해양경찰대인데
우리 학생들이 일몰 시간 이후 출입금지인 바닷가에서 조명을 켜고 영화작업을 한다고
제지해 달라는 민원전화였고,
출근길에 받아 본 서류 봉투는 내게 피해보상금을 기한 내에 지불하지 않으면 고소하겠다는
내용증명이었는데,
우리 학생이 촬영 장소로 빌린 펜션 사장이 보낸 것으로 학생들이 촬영하면서 펜션 내부 시설을 망가뜨리고 조치 없이 그냥 가버렸다는 것이다.
해당 팀의 프로듀서 학생을 불러다가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니
망가진 내부시설이란 세탁기와 소파로 학생들이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이고
체크인 후 확인해 보니 이미 망가져 있어서 혹시나 하고 망가진 상태를 촬영을 해두었다고 해서
더 큰 문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촬영 장소를 섭외하는 일은 제작부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팀 전체가 감당해야 하는 일중에 난이도가
꽤 높은 일이고 원만하게 되지 않았을 경우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질 수 있는 중요한 작업이다.
그런데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와 같은 업종의 장소를 구했다고 마음을 턱 놓는 프로덕션이 있는데
그렇게 쉽게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학교 앞 분식점이 필요한 로케이션이라고 할 때
프로듀서가 속한 제작팀은 학교 앞 식당들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용케 한 집에서 승낙을 해줬다.
한 번에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제작팀은 안도하고 다음 로케이션 섭외로 넘어가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안도하기엔 이르다.
분식집이 필요해서 분식집을 섭외했으니 촬영을 진행하면 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사람의 눈과 카메라가 얼마나 다른 것인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한번 카메라의 시선으로 섭외가 완료된 분식집을 들어가 찬찬히 둘러보자.
분식집에 식사하러 온 손님에게는 눈이 띠지 않을지 모르지만
분식집의 벽 선반엔 분식집과 어울리지 않는 공구들이 여기저기 놓여있고
사장님이 조기축구회 회장님인지 한쪽 벽에는 축구회에서 받아 온 프로피와 감사패가 진열되어 있다.
분식집 벽은 한쪽이 빛바랜 분홍색으로 분식집에서 촬영해야 하는 주인공의 상심한 감정 씬과
영 어울리지 않는다.
영업을 하기 전에는 일본 라멘집이었던 분식집은 이전 인테리어를 그대로 재활용하고 있어서
분식집 여기저기에는 일본풍 고양이 인형과 일본어로 쓰인 포스터가 아직 남아있다.
시나리오와 감독이 필요로 하는 공간은 분명히 분식집이 맞지만
섭외한 분식집에서 촬영을 했다가는 영화가 전달하려는 분위기를 만들기 어렵다.
섭외해야 하는 분식집은 그냥 분식집이 아니라 영화에서 필요로 하는 분식집의 그림을 갖고 있는
곳이어야 한다.
로케이선을 섭외하는 제작진은 그래서 장소의 특성만 살릴 공간이 아니라
시나리오에서 그 씬의 역할과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강의실이 필요하다고 그냥 강의실을 구하면 일을 다 한 것이 아니라 그 강의실이 얼마나
사니리오에서 요구하는 강의실과 들어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영화는 실제의 공간보다 더 많이 강조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대학 강의실도 공과대학의 대형 강의실과 인문 대학의 소형 강의실은 그 분위기가 완연히 다를 것이다.
시나리오에서 요구한 내용이 대학이라는 아카데믹한 공간을 많이 강조했다면
일반 강의실보다 좀 더 학구적인 소품들, 예를 들어 전자식 교탁과 강의에 필요한 교육시설들이 눈에 띄어야 할 것이고 중대형 사이즈의 계단식 강의실이 더 어울릴 수 있다.
시나리오에서 요구한 강의실의 외형을 가진 장소를 확보한 이후에도
미술팀은 장소를 방문해서 추가로 배치할 소품이나 촬영을 위해 이동하거나 재배치하는 것이 좋은
장소 내 시설들을 점검하고 장소 제공자에게 허락을 얻어야 한다.
촬영팀 역시 로케이션을 방문해서 촬영을 진행할 때 사용할 충분한 전기와 배선 작업이 가능한지
촬영을 위해 설치할 트랙이나 카메라 이동장치가 움직일 공간이 충분한지 확인해야 한다.
이런 일련의 작업이 모두 점검되고 장소 소유주의허락을 얻어야 비로소 섭외가 완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떠할까?
서울 시내나 영화학과가 있는 대학의 학교 앞 식당이나 카페에서 실제로 촬영을 위한 장소협조를
승낙받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웬만해서는 촬영협조라는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도 않고 거두절미다.
식당이나 카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상인들이 학생들의 단편영화 작업에 야멸차게 손사래를 친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이유는 그들의 선배들 때문일 확률이 높다.
촉박한 일정에 장소 섭외를 해야 하는 제작팀은 여기저기 장소를 분주히 알아보러 다닌다.
저학년 여학생 한두 명이 찾아간 분식집에서 학생들은 분식집 업주에게 학교 과제를 촬영해야 하니
영업이 한가한 시간에 잠깐만 촬영을 허락해 달라고 읍소한다.
업주는 영화촬영이라니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을 것 같아서, 그리고 어린 학생들이 간절히 부탁을 해오니
허허 웃으며 그러라고 허락을 한다.
학생들은 기분이 좋아서 프로듀서에게 분식집 촬영 허가를 받았다고 보고를 한다.
이렇게 일이 틀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분식집 업주는 영화촬영의 작업 방식을 모른다.
그저 허락을 받는 데에 급급해서 ‘잠깐만’ 촬영하고 영업에 지장을 주지 않겠다는 식의
애매한 조건을 단 승낙은 의미가 없다.
막상 촬영 당일의 모습은 어떤가.
섭외 당시의 여학생은 보이질 않고 시커면 학과잠바를 뒤집어쓴 덩치 큰 학생들이 식당에 와서
배선 작업부터 한다.
같은 일행으로 보이는 학생들은 분식집 앞에서 입구를 막아서고 줄담배를 피워대서
들어오려던 손님을 되돌아 가게한다.
또 다른 학생들은 여기저기 콘센트에 굵은 전깃줄을 꽂더니 무지막지하게 커 보이는 조명기를 켜고 끄고
식탁은 이리저리 자기들 마음대로 옮기더니
한쪽에선 우르르 학생들이 화장실로 몰려가서 다른 손님이 이용하는데 지장을 주면서
화장실을 점령하고 아예 거울 한쪽에는 배우들을 위한 분장 스테이션을 만들어버린다.
업주의 마음에는 불안과 불만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분명히 한 시간도 안 걸리는 작업이라고 했는데
장비를 설치하고 배선과 소품 재배치에만 한 시간을 넘긴다.
이제 곧 저녁 장사를 준비해야 하는데 학생들은 커다란 조명기구와 바닥에 기찻길 같은 걸 깔아 둬서
손님들이 들어왔다가 기겁을 하고 다시 나가버린다.
이런 장소 섭외와 촬영 준비라면 그다음은 안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인내심이 바닥난 업소 주인은 학생들을 내보낼 것이고
그날 촬영 분량을 찍어야만 하는 학생들은 촬영 스케줄이 심각하게 꼬이는 문제를 안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이런 소홀한 장소 섭외 방식이 입소문을 타고 안 좋은 사례로 회자되어
학생들이 영화 촬영을 위한 장소 섭외로 방문했을 경우 자영업자들은
단박에 거절부터 하고 보는 풍조를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로케이션 섭외는 장소 제공자에게 충분히 작업 내용과 소요시간 등을 알려주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
단지 ‘오케이’라는 대답만 듣기 위해서 촬영일의 제작팀 인력규모와 촬영을 위한 장소의 재배치,
그리고 전기나 화장실 등 촬영 장소의 부대시설 이용까지 모두 허락을 받아야 제대로 장소를 섭외한 것이다.
얼렁뚱땅 섭외했다가 장소에서 쫓겨난다면 이후 일정이 도미노처럼 무너져버리는 최악의 사태까지도
벌어지기 때문에 제작팀은 각별하게 관심을 갖고 일을 진행해야 한다.
로케이션 섭외에는 제작팀원만이 아니라 촬영팀, 미술팀이 함께 방문해야 좋다.
해당 씬에서 전달해야 하는 감정과 극 전체에서 요구하는 분위기를 담아내기 위해
로케이션이 갖고 있는 색감이나 질감, 빛의 밝기나 색깔 등을 미술팀은 주의 깊게 판단해야 하고
촬영팀은 필요한 전력의 조달이나 실내조명 상태와 창문의 위치를 파악하고 조명 계획을 염두에 둔다.
해당 씬에서 이동이 있는 경우 충분한 공간이 확보될 수 있는지도 확인한다.
제작팀은 로케이션 섭외에 비용을 들이고 싶지 않겠지만 꼭 필요한 로케이션이고
장소를 제공함으로써 업주가 영업에 손실을 입는다면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경우가 있다.
저예산 영화 거나 학생영화라는 것을 강조해서 비용을 조정하는 시도는 해볼 수 있겠지만
적은 비용이라도 정식으로 장소임대 계약을 맺고 돈을 지불하는 것을 권한다.
그렇게 공식적인 임대 계약을 맺고 비용을 지불하고 나면
업소 주인은 나중에 마음이 바뀌었다고 계약을 거절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추가로 업소가 홍보되는 기회를 강조하고 촬영이 끝난 뒤 업소 사장을 시사회에 초대하는 등의 배려를 잊지 않는다면
이후에 같은 장소를 빌리려는 후배들이 문전박대를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장소 섭외는 중요한 작업이다.
후배에게 시킬 일이 아니라 단편영화 제작 경험이 많고 영화 내용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경험 많은 프로듀서가 직접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