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모아둔 돈 300만 원, 이번달 알바비 120만 원, 부모님께 특별용돈 200만 원 합이 620만 원. 이 정도면 영화 한 편 못 찍겠어? 이걸로 대박 나면 스포츠카 한대 뽑아야지.
내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영화학과에서 꿈에도 그리던 영화제작 수업 “16mm 필름프로덕션” 수업을 수강하게 된 첫날!
난 마음이 설레서 전날 밤 잠까지 설치고 수업에 갔다.
한국 대학은 첫 수업이 수강정정이 시작되는 기간이기도 해서 어수선하고 정신없지만
미국 대학은 첫날 수업이 매우 중요하다.
첫날 수업에 오지 않으면 교수는 학생이 drop (수강 포기) 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 자리에 다른 학생을 받는다.
수강신청 기간에 수업을 신청하지 못한 학생은 첫날 수업에 와서 출석을 마친 뒤 빈자리가 나면 그 자리에서
수업을 add(추가 수강 신청)한다.
경우에 따라서 교수가 학생이 선수 과목 등을 제대로 이수하여 수강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고
다른 수업으로 보내거나 요건을 채워 온 뒤 수강하라고 권유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단 출석을 부르고 학생들이 다 왔는지 확인한 교수는 그 흔한 미소 한번 짓지 않고
학생들에게 물었다.
“지난 방학 때 등록금 벌기 위해서 알바 한 사람?”
교수는 방학을 알차게 보낸 학생을 칭찬해 주려는 듯 보였고 학생 몇몇이 손을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게” 손을 든 학생들이 일어섰다.
“아버지가 버는 수입이 충분치 않은 이유로 어머니도 일하시는 분 손 들어보게.”
이번에도 몇몇이 손을 들었다.
“학기 중에도 주말이나 저녁 시간에 용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일해야 하는 학생도 일어나게”
교수는 그렇게 학생들을 일으켜 세우더니 전부 나가라고 했다.
이 수업은 16미리 필름 영화 제작 수업이고 충분한 돈이 있어야 수강할 수 있는 수업이라고
돈이 학용품인 수업인데 돈이 충분치 못한 학생은 이 수업을 제대로 따라올 수 없다면서
충분한 준비가 된 것을 입증하지 못하면 이 수업은 다른 학생에게 양보하라고 했다.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느낌이었다.
살벌했다.
그러나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바이올린을 전공하려면 바이올린이 있어야 하고
승마를 전공하려면 말이 있어야 한다.
교수는 물감과 스케치북을 준비해오지 못하는 학생에게 자신은 그림을 그리는 법을 가르칠 자신이 없다고 했다.
대부분의 예술, 체육 전공은 그래서 돈이 없으면 어렵다.
이는 반대로 돈이 있는 사람은 수월하고 유리하게 예체능 전공을 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몇 년 전 모 대기업에서 한 특정인에게 우수한 경기 마를 뇌물로 제공한 대가로
재벌 총수가 감옥에 가는 것을 전 국민이 보지 않았던가.
오케스트라의 하프같이 비싼 악기를 갖고 있으면 사울대 음대에 무조건 합격이라는 옛 소문이 그저 뜬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암튼, 영화를 제작하는 데에 돈은 필수적이다.
그럼 얼마쯤의 돈이 있어야 할까?
영화는 예술이긴 하지만 무척 ‘융통성’이 있는 예술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 시나리오는 못 바꿔’ 아니다, 우리는 바꿔서 찍는다.
심지어 대본을 촬영에 적합하도록 바꾸는 전문 각색 작가를 따로 둘 정도이다.
영화의 제작 예산도 마찬가지이다.
얼마나 들어? 가 아니라 얼마나 있는데?로 질문을 바꾼다.
예산에 맞춰서 대본을 바꾸면 된다.
20분짜리 단편 영화 한 편 만드는데 소요되는 예산 평균은 큰 의미는 없다.
남이 천만 원 들였다고 해도 내 영화는 500만 원으로 풍족하게 찍을 수도 있고
2천만 원을 들여서 겨우겨우 마칠 수도 있다.
어떤 영화를 어떻게 찍느냐가 관건이다.
돈이 많아서 걱정인 프로덕션은 없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가끔 돈을 너무 많이 써서, 혹은 제대로 쓰지 못해서 망한 영화들을 본다.
대개의 경우 없는 돈으로, 적은 돈으로 그것보다 많은 효과를 보려고
창의력과 상상력을 동원하고 갖가지 지혜를 짜 모은다.
영화에서 예산, 돈 문제는 그렇게 해결해야 한다.
만원 주고 만 원짜리 물건을 사 오는 것을 예산 집행이라고 하지 않는다.
만원으로 이만 원쯤의 효과를 얻을 수 있어야 잘 짜인 예산이고
만원으로 십만 원쯤의 결과물을 만들었다면 훌륭하다.
예산은 영화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갖고 있는 돈이 500만 원쯤이라면
그 돈을 프리프로덕션, 프로덕션, 포스트 프로덕션에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내가 하려는 얘기를 완성하려면 어느 정도 액수를 한씬에 사용할지
촬영은 며칠이나 할 수 있을지 가늠한다.
단편영화는 제작의 시작부터 끝이 한눈에 보이는 짧은 프로덕션이므로
예산 편성이 그다지 복잡하지는 않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부분, 즉 장비 임대, 미술 비용, 스태프들의 이동과 숙식 비용 등을 바탕으로 가예산을 짠다.
촬영 전에 소소한 비용이 들어가는 로케이션 스카우트 비용, 테스트 촬영 비용, 회의비도 빼먹지 말아야 하고
촬영을 마치고 나서 편집과 믹싱, 배급에 사용할 여윳돈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만일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영화학과에 다니지 않고 있다면
지자체에서 운영 중인 영화영상 교실이라도 등록하는 것을 권장한다.
각 대학의 영화학과나 지역 영상교실 수강생은 촬영과 편집 등 장비와 실습실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이는 내가 대학원에 진학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한데
35미리 필름 영화 작업을 하려던 나는 장비 임대료와 한 학기 대학원 등록금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에다가 녹음실, 세트장, 편집실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고 당시에는 꽤 비쌌던 프로툴즈 같은 프로그램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서 대학원에 등록을 했다.
덤으로 따라온 것은 같이 학교를 다니던 동기들로 이들은 기꺼이 내 작업의 스탭이 돼주었다.
등록금은 목돈이었지만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장비와 실습실 임대료, 스탭 인건비 등을 비롯한 예산의 대부분을 아낄 수 있었다.
가끔 유복한 집안 출신의 단편 영화감독이 넉넉한 예산을 들여서 찍어 온 영화를 본다.
장편 상업영화 현장에서나 쓸 법한 고사양 카메라와 팬시한 조명세트로
화질이 월등하고 배우들도 아마추어가 아니라 인지도가 있거나 현장 경험이 많은 배우들이 출연한다.
로케이션과 미술 작업에서도 돈을 들인 냄새가 솔솔 풍긴다.
감사하고 부러운 작업 환경이다.
하지만 나 같으면 그런 돈을 아껴서 사용하고 추가로 영화 한 편을 더 찍는 것을 택하겠다.
단편영화를 감상하는 관객들은 장편 상업영화에서나 볼법한 ‘때깔’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요즘은 웬만한 장비로도 그럭저럭 괜찮은 그림이 나온다.
휴대폰 카메라로 영화를 찍는 세상인데 장비에 목숨 걸지 않아도 20년 전 고 예산 작업과 비교해 뒤지지 않는다.
예산을 현명하게 사용하려면 액수가 정해진 장비 임대나 장소 임대보다는
스태프들의 사기를 올리거나 배우의 연기력을 올릴 수 있는 곳에 집중하는 것이 가성비를 올리는 길이다.
적절한 간식과 휴식 공간을 마련해서 스태프들에게 쾌적한 작업 현장을 제공하고
이동이나 식사에 배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담긴 준비를 한다면
스탭과 배우들은 작업하는 내내 자신의 영화라는 주인의식과 혼신의 힘을 다 바쳐서 작업에 임할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다 찍었으면 배급을 통해 세상에 공개하는 절차가 남는다.
이제 그렇게 힘들게 찍은 영화를 ‘파는’ 일이 남은 것이다.
단편영화 작업에서 드문 일이긴 하지만 영화 제작에 들어간 제작비를 건지는 단편영화가 아주 없지는 않다.
이 얘기는 <배급 단계>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