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연기만 잘해주면 관객은 배우만 따라가게 돼있지. 로케이션이 좀 빈약해도 설정이 재벌집 별장이라고 하면 관객은 믿어주게 돼 있거든. 멋지고 잘생긴 배우가 연기를 하는데 누가 배경이나 소품에 신경을 쓰겠어? 이건 다큐멘터리가 아니야.
저예산이 당연한 듯 여겨지는 단편영화 작업에서 감독과 스태프가 당연한 듯 포기해야 할 부분들은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연출자는 아예 비용이 발생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를 찾게 되고
설사 이야기에 미술 비용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고 하더라도 그걸 곧이곧대로 다 실행하는 일은 드물다.
영화는 쇼다.
쇼는 보여주는 것, 근사한 걸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관객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데에는 돈이 들어가기 마련이고 그걸 어떻게 예술적으로 막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은 이의 고민이다.
화가도 아니고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은 아마추어 관객이지만 어설픈 배경이나 의상, 영화의 메시지와 어울리지 않는 색상을 구별해 낼 중 안다. 부적절한 미술은 영화의 집중을 방해하고 작품의 개연성을 떨어뜨린다.
프로덕션 디자인의 역할은 로케이션이나 세트를 설계하고 영화가 요구하는 색감과 분위기를 만들어서
영화의 미적 가치를 높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단편영화에서는
연기를 하는 인물들의 배경을 그럴듯하게 만들고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으면서 치장하는 일을 맡는다.
로케이션을 정할 때에 함께 참여해서 적절한 공간인지의 가부를 판단하는 의견을 주는데
그러려면 우선 시나리오에 대한 해석이 우선이다.
시나리오를 꼼꼼히 읽고 영화의 주요 공간들이 스토리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또 공간과 공간의 유기적인 관계도 생각해 본다.
이런 구상은 혼자 해도 좋지만 작가나 감독과 상의를 통해서 결정하는 것이 일을 두 번 하지 않게 된다.
또 한 영화 전체의 색감과 인물별 색채, 또는 이야기 전개에 따른 색감이나 밝기의 변화 등도 고려하면 좋다.
대부분의 단편영화감독들은 별 갈등이나 고민 없이 자신의 영화를 컬러로 찍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천연색’인 컬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현실의 재현 혹은 현실 같은 드라마를 만들어 내기를 원하는 감독들에게 컬러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흑백영화보다 편리할 것이고 관객들도 자신이 볼 영화가 컬러인 것을 당연시한다.
이처럼 당연한 컬러여서 ‘그냥’ 색깔이 나오는 영화를 만들어 버리곤 하는데 사실 색은 생각보다 매우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특정 색깔에 집중하여 만든 영화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역작 풀 메탈 재킷(1987)의 전반부 주요 공간인 내무반 바닥은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는 병사들의 소속부대인 미 해병대의 상징적 색깔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개성과 인격을 갖추고 있었던
미국의 자유분방한 청년들이 붉게 물든 광기의 방에서 서서히 살인병기로 변해가는 영화의 이야기와 잘 어울린다.
일견 핏빛같이 보이는 빨간색 바닥의 공간과 살의마저 느껴지는 교관의 언어폭력과 물리적 폭력은
소름이 돋는 결합으로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관객에게 전쟁의 공포와 전쟁으로 미친 이들의 모습을 섬뜩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프로덕션 디자인 구상이 정리되었다면 주어진 예산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여 최대한의 효과를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구한다.
로케이션에서는 공간의 소유주에게 페인트칠이나 도배를 하는 것이 가능한지 알아보고
기존에 있던 시설물이나 가구의 재배치 가능 여부도 확인한다.
특히 창문의 경우 커튼이나 블라인드의 설치로 공간의 분위기가 드라마틱하게 바뀔 수 있으니
허락을 구할 수 있으면 좋다. 대개는 구입하거나 빌려 온 커튼을 설치한 후 촬영을 마친 뒤 원상복구 시키지만
허락을 구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촬영이 끝난 뒤 설치된 소품을 기부하는 것도 고려해 볼만하다.
스태프나 배우들이 갖고 있는 액자나 소품들을 미리 확인하여 촬영장 소품으로 사용하는 것과
배위 배경에 등장하는 책도 캐릭터를 표현하는 중요한 소품으로 활용될 수 있다.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은 색인표 때문에 의도가 반감될 수 있으니 주의한다.
야외 세트의 경우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의도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므로
로케이션 스카우트 단계에서 최대한 시나리오에서 요구하고 이야기 전개에 필요한 그림의 장소를 찾는데에 집중해야 한다.
장소를 찾았다면 촬영 허락을 받는 일이 관건인데 처음부터 비용을 아낄 생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임대료를 지불하는 것을 감안하는 편이 일의 진행에 도움이 될 것이다.
배우의 의상과 헤어, 메이컵은 배우와 사전에 상의를 해 볼 일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 배우에게 기존의 머리를 커트할 것을 요구하는 일은 드물지만
스타일을 바꾸는 것이라도 배우가 감당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영화 작업에서 헤어와 메이컵 경험이 있는 스태프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촬영 시간이 길어지거나 테이크가 여러 번 갈 경우 메이컵과 헤어 담당자는 흐트러지거나 변형된 메이컵을 계속 보완해 주어야 한다.
액션이나 배우끼리 접촉이 있는 씬은 특히 의상과 헤어, 메이컵 모두 신경을 써야 하는데 다음 씬과의 컨티뉴이티를 고려하여 사진을 찍어두거나 여벌의 같은 의상을 확보하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