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없이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어?
(전)회사 사무실에 놀러 갔다. 아직도 (전)이 붙는 게 어색한 두 달 전 퇴사한 바로 그 회사에 갔단 말이다. 전혀 계획에 없었던 일이었다. 그저 3년 전 퇴사한 동료와 브런치를 먹기로 한 장소가 그 근처였을 뿐이었다. 회사는 싫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익숙한 장소라 편하다. 오랜만에 채광 좋은 근사한 카페에서, 같은 회사 퇴사자 둘이서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며 잠봉뵈르와 파스타를 먹어치웠고 각자의 집으로 쿨하게 발길을 틀었다.
돌아가는 길, 지하철역에 가까워지자 회사가 있는 빌딩이 시야에 들어왔고 내 발걸음도 자연스레 멈추었다. 시간은 오후 두 시 반, 한창 오후 업무에 집중해 있을 시간이자 몰려오는 졸음을 이겨내야 하는 어중간한 시간. 저 건물 안에서 지루한 얼굴로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을 동료들이 생각났다. 커피랑 간식이라도 사서 전해주고 갈까? 백수 주제에 세상 오지랖인 건 알겠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도 뭐하더라. 8년을 다닌 회사를 모른 척하고 지나가기에는 떠오르는 얼굴들이 너무 많은 탓이었다.
어쩐지 두근대는 마음으로 디자인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에 몇 명이나 있는지, 커피는 다들 마셨는지, 업무는 바쁜지 확인할 겸 걸었는데 얼른 사무실로 올라 오라는 거다. 아, 아니... 난 그냥 건물 입구에서 간식만 전해주고... 가려던 생각이었는데....?
"대표님 오늘 휴가 셔서 안 계시고 일도 없어서 한가해요. 간식 먹으면서 놀고 있으니까 얼른 올라오세요!"
대표님이 웬일로 휴가를? 대표님으로 말하자면, 일 년 중 휴가를 쓰는 날이 총 5일도 안 되는 사무실 지박령 같은 분이다. 그런 분이 휴가를 써서 자리를 비우셨다니? 그래. 이건 쉽게 오는 날이 아니다!
그렇게 동료들이 좋아하던 조각케이크 몇 개를 사들고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오늘 입고 나온 옷은 좀 괜찮나? 화장은 잘 먹었는지 모르겠네. 다들 나를 반겨줄까? 혼자 뻘쭘하면 어떡하지? 등등 소개팅 나갈 때도 하지 않았던 긴장과 걱정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걱정과 달리 어색하지 않았다. 하긴, 이곳에서 보낸 8년이 서먹해지기에는 두 달은 좀 부족하지. 원형 테이블에 모여 앉은 사람들 틈에 알아서 섞여 들었다. 동료들은 간식거리를 집어 먹으며 소소한 질문들을 해왔다. 여행은 다녀왔냐. 회사 관두니까 뭐가 제일 좋냐 등등 그에 대한 답변으로 심드렁한 나의 일상을 말하면 동료들 입에서는 연신 부럽다는 말이 쏟아졌다. 그래. 직장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처럼 달콤한 말이 없지. 나 역시 사무실 안에서 바라보는 밖은 동경 그 자체였던 것 같다.
백수를 향한 질문 폭탄이 한바탕 지나가고서야 나도 회사가 어떤지 둘러볼 수 있었다. 변한 게 없었다. 내 자리에 내가 없는 것 빼고는. 당연하게도 다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회사를 관둔다고 했을 때 동료 중 누군가가 '이제 팀장님 없으면 회사는 어떡해요? 망할 것 같은데...'라고 우는 소리를 했었다. 그때 나는 나 없이도 잘 굴러갈 거라고 답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만큼 내 역할이 중요했다는 거니까. 내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주는 것 같아서 으쓱하기도 했다. 물론 나 하나 없다고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회사면 애초에 망했을 테니 그럴 일은 없을 거라 단언했지만 그래도 나의 빈자리가 조금은 느껴지길 바랐다.
그런데 오랜만에 찾아간 사무실에, 나의 빈자리 따위는 없었다.
내 자리는 그동안 눈독 들이던 다른 이가 바로 옮겨 왔고,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던 일들은 몇몇이 나눠했을지라도 결국 처리했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처음엔 조금 삐그덕 거릴 수 있겠지만 그럭저럭 넘어가고 그다음엔 더 자연스럽게... 그 후에는 아무렇지 않아 질 것이다. 오히려 더 나아질 수도? (그건 좀 슬플 것 같지만) 그렇게 회사는 나 없이도 아주 잘 굴러가고 있었다.
서운하게시리.
퇴사하면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막내에게 잘하고 있느냐 물었다. 나에게 늘 팀장님이 그만두면 본인도 그만둘 거라 말하던 친구였다. 나 없이는 안된다고... 아주 천년의 사랑인냥 굴더니.
것봐. 나 없이도 아주 잘 지내고 있지?
막내는 멋쩍게 웃으며 최근엔 일이 없어 본인이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때,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나아가, 내가 퇴사하고 나서 회사에 일이 많았다면 어땠을까 싶더라. 물론 비수기라 퇴사를 빨리 할 수 있었던 것도 있지만. 바쁜 시기에 나 없이 손발도 좀 안 맞아 보고, 프로젝트도 꼬여보고 말이야. 그래 봐야 내가 떠난 자리가 좀 크게 느껴지지 않았겠어? 라는... 엄청나게 구질구질한 감정이 밀려와 나 조차도 당황스러웠다. (이 감정을 타이핑하는 지금도 창피하다)
급하게 가방을 챙겨 가봐야겠다며 사무실을 나섰다.
단지 사람들이 보고 싶어 찾아갔던 회사였지만, 나 없이 잘 굴러가는 회사를 두 눈으로 목격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나 없으면 회사가 큰일 날 거라 생각했던 것도 절대! 아니었고 예상했던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솔직한 내 감정은... 그래, 서운했던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 꼭 나오는 성격 이상한 전 여친 있지 않는가.
남자주인공을 뻥 차 놓고는 나중에 찾아와 "나없이 네가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어?" 따위의 대사를 날리는 전 여친이 된 기분. 왜 저래? 싶으면서도 아무튼 별로였다는 뜻이다.
나없이도 잘 굴러가는 전 회사는
나를 팔자에도 없는 미련쩌는 전 여친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