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괴물이 아닌가?

괴물(The Monster) - 고레에다 히로카즈

by 김지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지는 어떤 잔혹한 일들이 모두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끝나간다면 그것만큼 비참한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대다수가 알지 못하는, 혹은 포착되지 못한 잔혹한 일이 은폐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일이 아예 없는 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인가? 그러니까, 은폐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은밀한 조언은 그 조언의 맥락과 배경과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어떤 무지의 안위를 마련해주는 듯하다. 무지의 안위 속에서 사는 우리 같은 괴물들에게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은 우리의 무지로 향한 추락과 현기증에 대해서, 겁많은 우리라는 종의 비겁함에 대해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떠한 위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크게 세 가지 차원의 시각에서 사건 당사자들의 사연을 들려준다. 그 사연들은 제삼자들은 시간을 들여 찾아보기 어려운, 혹은 관심도 없을 사연들이겠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들이다. 우리는 이런 사소한 정도의 사연들을 표면상의 이유로 문제 삼으며 그들을 재단하고 부분과 전체를 구분하지 않으려고 한다. 겉으로만 보기에 이상한 것이라면 그 사건은 이상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각 개인들의 부분들은 그 전체를 온전히 해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노력하려는 시도를 보이기는 한다. 그럼에도 그 많은 부분들을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데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 아까워서 요점만 짚으며 시간과 비용을 단축하고 부분들을 전체로 환원하려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온다. 표면만 보고 재단하는 것과 요점들을 넘겨 짚으려다 생긴 왜곡들 모두 당사자들에게 큰 상처를 준다. 후자의 왜곡을 오해라고 부르기로 하자.


오해는 전체를 몰이해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편견이며 현상을 구성하고 편집하는 강력한 동기다. 때문에 오해는 폭력적인 형태로 누군가에게 가해지며 그 일들은 오해의 몰이해적인 습성 때문에 오해를 한 이들에게 면책 특권을 부여해버린다. 때로는 오해를 유발했다는 이유로 당사자에게 적반하장으로 덤벼드는 황당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영화는 이러한 오해의 발생들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그 양상들을 적나라하게 전시한다.





미나토의 어머니인 사오리가 학교에서 당하는 부당한 처사들은 학부모 입장에선 어처구니없는 것들이다. 아들이 담임 선생에게 맞은 흔적이 있는데도 학교 측은 미지근한 사과만 할 뿐이다. 더군다나 학교는 명확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교사의 폭행 때문인지 아들인 미나토는 점점 알 수 없는 말들만 한다. 갑자기 머리를 자르기도 하고 갑자기 집을 나가기도 한다. 사오리는 그러한 와중에도 학교로부터 아들을 계속해서 지키려 한다.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담임 교사가 아들이 누군가를 괴롭히는 학교 폭력 가해자라는 말을 들어도 그녀는 끝까지 아들을 믿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 한다.





호리 미치토시는 책임감이 투철한 담임 교사다. 여자친구와 같이 장을 보고 나오는 장면을 목격한 아이들에 의해 업소녀를 만난다는 어처구니없는 소문이 퍼진 줄도 모르는 채 성실하게 일한다. 초등학교 교사로서 그는 반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알 수 없는 미나토의 행동과 아이들의 순수한 악의로 인한 누명과 덧씌워져 결국엔 그는 목숨을 버릴 생각까지 한다. 여자친구에겐 버림받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느낄 무렵 요리가 제출한 글에서 무언가를 깨닫는다. 깨달은 그는 태풍이 오는 와중에도 미나토의 집으로 뛰어간다. 그는 미나토의 집 앞에서 소리친다. 자신이 오해했다고.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미나토는 학교에서 괴롭힘을 받는 요리의 유일한 친구다. 요리는 아이들에게 외계인 취급을 받지만, 미나토의 눈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요리는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는다. 요리의 아버지는 요리를 두고 돼지의 뇌를 가졌기 때문에 요리를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말을 하며 요리를 억압한다. 미나토는 요리에게 그의 아버지가 너무 가혹하다고 말하지만, 요리는 그리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미나토조차도 학교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요리가 말을 거는 것에 대해 거부한다. 요리가 자신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자 그는 집에 가서 요리가 손댄 부분의 머리를 자른다. 그는 요리가 다른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은밀한 부분 안에서는 요리의 존재가 괴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요리와 미나토가 단둘이 있던 때에 미나토는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이상함을 느낀다. 요리가 평범한 아이라고 생각해도 그는 요리를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요리에게 느낀 특별한 감정에 놀란 그는 요리를 밀어내고 달아난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묻는다. 자신은 왜 태어났느냐고. 그리고 미나토는 스스로 깨닫는다. 자신 또한 괴물이라고. 이렇게 영화의 마지막인 미나토의 시점이 시작되는 부분에서 그동안 미나토가 했던 행동들의 이유가 밝혀지면서 영화는 서서히 마무리된다.





사오리와 호리 선생의 경우는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벌어질 법한 오해의 당사자들이다. 사오리는 호리 선생을 오해하고 호리 선생도 사오리를 오해한다. 호리 선생은 미나토를 오해하고 교장을 오해한다. 그리고 제일 큰 오해를 받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오해란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가 흔히들 하는 형태의 오해들이다. 몇 가지 정보들을 머릿속에서 조합해 가장 보고 싶은 부분을 가장 보고 싶은 형태로 구성한다.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이미지들로(가장 잔인한 형태로) 그들을 추악하게 만들고 싶어 하지만, 그 이미지 제작의 숨어 있는 메시지는 우리의 추악함을 가리려는 태도이다. 또한 우리는 그 태도를 애초부터 잘 몰랐다는 식으로 스스로에게 면책 특권을 부여하려고 한다. 죄악감에서 도망가려는 이러한 태도는 무지의 안위 속에서 살아가려는 게으른 태도다.


이 영화는 다소 오해받을 수 있는 존재인 요리에 대해서, 혹은 미나토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의 시간과 해명의 시간을 우아하게 드러낸다. 다짜고짜 그들의 존재를 이해하라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문명인이 아니라는 식의 과격한 방법이 우리 같은 괴물들에게 통할 리가 없다.


오해의 의미는 누군가의 부주의한 판단으로 인한 잘못으로 여겨진다. 애석하게도 오해의 당사자들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을 설득해야만 하는 순간에 놓인다. 언제나 논리적이고 온화해야 한다는 덕목은 피해자에게 있다는 역설은 그 외부 인물인 우리들을 한층 더 추악하게 만든다. 요리와 미나토는 약자다. 명백하게 약자로 묘사되지만, 영화는 그들을 동정하게 두지 않는다. 오히려 요리와 미나토는 우아하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관객이 그들에게 느끼는 것은 그들에 대한 동정심이 아닌, 자기반성이라는 순수한 형태로 남는다. 태풍이 끝나고 진흙투성이인 요리와 미나토가 햇살 아래 초원 위를 내달리는 모습은 우리 모두가 이미 그들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우리가 그들에게 얼마나 가혹한 사람이었는지를 겸허히 받아들이게 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해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들의 태도는 기이하게도 우리에게 어떤 죄책감을 가중시켜 우리를 내몰리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외의 위로를 전달한다. 그 위로 속에서도 몇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들은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 있다. 괴물은 그 누구도 아닌 나였다.






keyword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