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복제인간 기술 언제 됨?(급함)

미키17 - 봉준호

by 김지민


미키_17


<미키17>은 분명 아쉬운 영화다. 여러 윤리적 주제를 다루지만 그 깊이가 그만큼 깊지 못하고, 평이한 전개로 안전하게 마무리하는 영화다. 하지만 그 주제들을 거론함에 있어서 <미키17>은 분명한 의의를 갖는다. 복제의 문제, 개척의 문제, 계급의 문제, 인간성의 문제 등 갖가지 주제들은 현대에 있어서 주요하게 다뤄야 할 담론이다. 하지만 이것이 윤리적 관점에서는 흥미로운 분야일지 몰라도 영화적으로, 예술적인 관점으로 이런 주제들을 통해 이 영화가 풍부한 성취를 이루었는지는 다소 모호한 지점들이 있다. 미적 즐거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영화가 전작인 <기생충>만큼 훌륭한 힘을 가졌는지는 애매하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담론의 지점들을 휴머니즘적인 관점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미 담론이 과잉 상태이고 충분히 해결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무수히 많은 소재를 전부 채용하는 것도 과유불급이었지 않았을까. 그 주제들이 분명 중요한 주제들이고 날카로운 화두라고 하더라도 영화라는 것은 단순히 주제들을 나열한 집합은 아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영화가 고상한 담론을 위한 선전 도구로 활용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다. 앞서 필자는 <미키17>이 윤리적 주제들을 거론하는데 분명한 의의를 가진다고 했지만 <미키17>이 주제를 통해 담론을 다루었다고 해서 반드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본 칼럼은 영화를 그런 담론을 선전하는 계몽의 도구로 바라보진 않는다. 다만 의의를 가진다는 말의 의미는 미(美)와 선(善)의 문제 때문이다. 미와 선이 개별적 분야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사회적 담론 문제를 배제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지만, 미와 선은 인간 본질에 관한 탐구라는 점에서 무관하지 않다. 영화는 윤리적 장을 여는 효과뿐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예술이기 때문에 예술적인 면모를 보일 필요도 있다. 하지만 예술은 본질적으로 인간을 다루기 때문에 결국 선에 관한 부분도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영화는 미적인 영감으로 사회의 구조를 그려내며 그곳에서 윤리를 내보인다.


아쉬운 영화이긴 하지만 영화의 미적 성취 여부를 떠나서 이 영화가 윤리적 분야에 뛰어듦으로써 담론의 장을 열었으므로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함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봉준호 감독의 명성 탓도 있을 것이고 그 명성이 있는 감독이 이런 주제들을 계속해서 다뤘다는 것(옥자 같이)은 그 영향력이 우리에게 숙고할 필요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칼럼은 영화적 관점이라기보다는 이 영화의 주제들에 관한 점검을 바탕으로 이 영화가 이룰 수 있는 성취에 대해 예견해보고자 한다.


여담으로, 이 칼럼을 쓰고 있는 시점을 기준으로 <미키17>의 흥행 전망은 그리 좋지 못하다(실제로 별로 좋지 못했다). 사람들이 극장에 잘 가지 않고 영화라는 예술이 극장에서 소외되고 있는 현 상황을 봉준호가 극복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과도한 기대가 아니었을까? 이 상황에 대한 기사들은 우리가 영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 재고하게 만든다. 대중적으로 팔려야 하는 상품이지만, 동시에 예술성을 담보해야만 하는 복잡한 맥락에 영화라는 예술이 있다. 영화는 극장으로부터 내쫓길 운명일까? 감독들은 그 운명으로부터 저항해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은 걸까? 여러 문제들이 이 영화를 시작으로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하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다루지 않고 최대한 영화 속 윤리적 딜레마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본 칼럼의 목표다.



눈사람 부수기


한동안 눈사람에 관한 갑론을박들이 오가던 때가 있었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눈사람을 누군가가 부수는 일에 대해 논박이 일어난 것이다. 고작 눈사람 하나에 큰 논란이 생기는 것에 의아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눈사람을 부수는 행위에 대해 분노하던 사람도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무엇인가? 눈사람에게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눈사람을 부순 사람을 비난했던 것일까? 아니면 예민한 감수성의 발현이 사소한 일에 대해 많은 이들을 그저 불편하게만 만든 것일까? 이 일은 사실상 우리가 대상을 바라보는 일과 행위에 대한 도덕적 감수성에 관한 일이었다. 눈사람에겐 생명이 없다. 하지만 눈사람을 이유 없이 부수는 행위는 우리의 감정을 불편하게 만든다. 대상에게 어떤 가치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 대상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가치판단은 달라진다. 어떤 철학자는 쾌고 감수 능력의 여부만이 도덕적 가치를 결정짓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로봇 강아지를 걷어차는 일에도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로봇 강아지에는 생명조차 없는데도 말이다. 따라서 이런 결론이 추측된다. 도덕성과 가치는 생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덧붙이자면 인간이 아닌 존재에도 도덕성과 가치는 발견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어찌 보면 우리는 행위 속에서 도덕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주인공인 미키의 경우는 눈사람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미키는 계속해서 복제되는 익스펜더블이라는 직업으로 식민지 행성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그의 정신은 벽돌처럼 생긴 장치에 저장되며 육체는 사라져도 계속해서 동일한 신체로 프린트될 수 있다. 그는 죽음을 초월한 존재지만 실험체로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우리가 실존적으로 여기는 죽음과는 다르게 다뤄진다. 영화 속에서 그는 사회노동자로서,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하며 목숨까지 제한이 없기 때문에 도구적인 존재다. 죽음을 초월한 존재이지만 사실상 생명이 없는 존재로 취급된다는 아이러니다. 때문에 과학자들 입장에서도 미키는 어떤 죄책감 없이 실험하기 용이하다. 또한 대의적인 측면에서 미키의 죽음은 많은 이들의 도움이 될 수 있기에 미키의 죽음의 당위는 더욱 견고해진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는 미키가 실험당하고 고문당하는 것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이 영화가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안해서 보더라도 미키의 고난은 비인간적이다. 그 세계 속에서 그는 불멸의 존재이며, 그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고 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우리를 건들고 있다. 눈사람을 부순다고 해도 그 눈사람을 다시 만들면 될 일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에게 미묘한 감상을 주는 것은 다른 일이다. 미키가 죽는다고 해도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 속에서 느끼는 감정과도 유사하다. 사람의 행위 속,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은밀하게 숨어있는 부조리한 것들이 예민한 감각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미키 또한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그의 사용됨이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자들이 존재한다. 그런 맥락에서 나샤의 존재는 미키라는 존재에 대한 따스한 연민의 관점이다. 봉준호는 아마 이 점에서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드는 딜레마들을 극복할 실마리는 사랑이라고 믿는 듯하다. 다만 그 표현의 구현에 있어서 조금 아쉬운 점들이 보이는 것은 안타까운 부분이다.



미키가 눈사람처럼 다시 만들 수 있는 존재라고 해도 미키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눈사람과 미키의 상황을 다른 상황이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상에서 미키는 눈사람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그에게 불멸이란 생명이 없는 대상으로서 인식될 뿐이고, 대의를 위한 실험체에 더 가까운 인식 상에 놓인다. 나샤만이 거의 유일하게 미키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며, 그 대우의 길은 사랑으로 놓여 있다. 봉준호가 처음으로 로맨스에 도전했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이 영화가 멜로를 표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눈사람을 소중히 대한다면 눈사람에는 가치가 부여된다. 눈사람이 조금 의아한 비유라면 우리가 애착을 갖는 물건들에 대해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왜 우리는 그저 사물에 불과한 것들에 애착을 갖고 소중히 대하는 걸까? 가족과 같이 찍은 사진이나, 생전에 고인이 썼던 물품들에 대해 우리는 애착을 갖고 가치를 부여한다. 한 철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가치는 구성되는 것이다. 그 구성은 모든 것이 가치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환대와 숭고의 의미에서 발현되는 가치를 우리 모두가 구성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키 또한 인간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주변에서 자신을 인간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기에 그의 가치는 존중받을 수 있었다. 그 존중의 발현을 연속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복제 기술에서의 정체성 문제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애인이 2명이면 기쁨이 2배인가?


<미키17>에서 꽤나 기대할 수 있었던 부분들 중 하나는 복제인간의 정체성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미키17의 죽음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실수로 미키18을 복제한 상황은 윤리적 딜레마에 관련한 부분이 아니더라도 서사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이다. 미키17과 미키18의 성격은 다르게 묘사된다. 그 전에 있었던 미키들도 다 다른 성격이었다는 설정은 봉준호가 이 딜레마에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테세우스의 배 논증과 유사한 상황인 것이다. 배의 부품들을 모두 새로 바꾼다면 그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 것인가? ‘배’라는 기능은 동일하게 수행할 수 있지만, 그 배를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망설여진다. 그 이유는 역사성과 연속성에 있을 것이다. 그 배를 구성하고 있었던 부품들의 역사, 그리고 연속성이 지금의 배를 존재하게 만든다. 미키 또한 사실 모두가 단절된 미키들인 것이다. 몸과 기억은 완전히 같다고 하지만 그 연속성에 있어서는 단절된 부분이 있다. 이는 역사성의 단절이다. 미키1의 역사는 죽음으로 인해 이미 끝났다. 미키1의 기억을 이어서 미키2가 탄생했다고 할지라도 미키2를 여전히 미키1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미키1의 죽음은 미키의 죽음이 아니라 미키1의 죽음인 것이다. 그가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대사만 생각하더라도 그의 죽음은 연속되지 않고 단절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때문에 미키17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것에 거부감을 가진 이유는 미키17과 미키18은 다른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 세계관에서 복제 기술이 금지된 이유는 멀티플 문제 때문이었다. 복제인간 기술을 악용해서 살인을 저질렀던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동일한 상황에 두 개의 개체가 발생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된 설정이다. 이 문제 상황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상황이다. 만약 원래 개체는 아무런 짓을 하지 않고 복제된 개체1만이 살인을 저질렀다면 둘의 형량은 동일해야 할까 아니면 개체1만이 처벌받아야 할까? 그 두 개체는 동일한 정체성을 갖고 있기에 동일한 책임을 지는 것일까? 각각의 개체는 독립된 개체로 봐야 하는 것일까? 영화에서는 이를 진중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미키가 멀티플인 상황이 되자 나샤는 남자친구가 2명이 생겼다며 좋아했고, 멀티플의 존재를 발설하지 않는 대신 카이는 미키 하나를 달라고 하는 가벼운 상황만이 연출될 뿐이다. 미키17과 미키18을 구분하는 이 연출에서 봉준호의 견해를 조금은 엿볼 수는 있지만, 그 상황을 평이한 전개로 넘긴다는 점을 본다면, 이 영화가 한편으로 선택과 집중을 다른 곳에서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멀티플 상황은 우리가 한 개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인이 그 개인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미키17과 미키18은 복제품들이 아니라 각각의 인격으로 인식된다. 미키17이 복제 인간이기 때문에 크리퍼들이 잡아먹지 않았다는 의심은 그 인격을 구성하는 내부적인 요인이 인격을 결정한다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지만, 사실상 그들은 내부적인 구성요건들로 인식되지 않았다. 가벼운 상황처럼 묘사됐지만 나샤는 두 미키를 동시에 대우했고 카이 또한(다른 의도일지도 모르겠지만) 두 미키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도 미키를 인격체로 인식한다. 도덕성을 갖출 자격은 인격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성을 대우받아야 할 이유는 인간의 이성이나, 기억, 원작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외부에 있는, 그 외부를 구성하는 사람들과 존재들에 의해 도덕성은 구성된다. 미키가 복제된 신체라고 해도 미키는 여전히 미키라는 인격을 갖는다. 그리고 그 인격이 동시에 두 개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인격은 다르게 대우받는다. 따라서 나샤는 2배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각각의 다른 미키지만 여전히 그녀의 남자친구인 미키이기 때문에 기쁨은 2배가 된다. 이 미묘한 중첩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복제인간의 딜레마에 대해 혹자는 영화가 너무 가볍게 지나갔다고 하지만 이 부분마저도 유쾌하게 다룰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다.



지구로 불시착한 인류와 계급


이제 마지막으로 봉준호가 나름 일관되게 묘사한 코드인 노동과 계급, 인간 소외에 관한 부분을 다뤄야겠다. 영화에서 결정적으로 다루는 문제는 계급 사회의 소외 문제일 것이다. 전작에서도 마찬가지로 계급 우화를 훌륭히 묘사했던 봉준호는 이번에도 계급에 관한 문제를 꺼냈다. 또한 자연 파괴에 관한 문제까지 이 영화에 담았는데 이 문제는 가장 최신의 담론이자 가장 난해한 담론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너무나도 많은 코드들이 한 영화에 담겨 있다. 영화를 보다 보면 문득 봉준호가 이 문제들을 소개하기 급급해서 영화가 다소 아쉽게 느껴지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미키는 처음에 빚을 진 문제로 인해 익스펜더블이라는 위험한 직책을 지원했다. 그의 선택이지만 사실상 그가 온전히 자유롭게 선택하지 않은 위험한 직업에 대한 은유는 우리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노동 소외에 관한 문제를 떠오르게 한다. 우리는 정말로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일까? 혹자는 자신이 정말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태라 지적하기도 한다. 우리가 하는 선택들이 모두 자유로운 선택이었다는 생각은 망상에 가까운 행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어떤 사회적인 맥락 속에 떠밀리듯이 선택하고 그 선택에 관한 책임을 진다. 노동에 관한 부조리는 이 순서를 그대로 따르면서 각 개인들을 소외시킨다. 각각 맞는 부분을 담당하며 사회 속 부품으로 전락한다는 운명은 미키의 운명과 다르지 않다. 미키 또한 인류를 위한다는 고상하지만 희미한 책임감을 갖고 임무를 수행하지만, 외부에서 바라보는 인식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한 인간의 실존을 지키며 사는 일은 무거운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다. 우리의 실존과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선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들이 더욱 주요하게 작동한다. 영화는 그 실존의 문제를 미키18의 죽음으로 폭발시킨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저항하고 실존을 지킨다는 것은 죽음을 불사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크리퍼라는 외계 생물이 사는 행성에 불시착한 인류는 어떤 식민주의와 환경론자에 관한 은유를 내포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또한 지구로 불시착한 존재라는 점을 되짚어본다면 의미심장한 은유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가 언급한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이란, 주체 설정을 재점검해야 하는 맥락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서양 철학자들의 일관된 견해 속에는 인간이라는 주체와 자연이라는 객체를 분리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현재 환경주의자들의 운동들에서 자연은 단순한 객체로 여겨지진 않는다. 우리가 같이 살아가야 하는 이 땅을 보존하자는 관점에서 환경은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 다만 여기서 미묘한 간극이 일어난다. 환경주의자들 또한 환경을 객체로 본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직 극복하지 못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라투르는 이런 점에서 우리가 대상objects들의 세계에서 벗어났음을 상기시킨다. 과학이 다루고 있는 대상들에 관한 연구는 우리가 그 사물들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줬지만, 기후와 바이러스에 관한 문제에서 그 믿음은 깨져버렸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통용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각한 것이다. <미키17>에서도 행성을 조사하고 그 기후를 분석하며 인간이 그 행성에서 살 수 있도록 인간의 몸과 행성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크리퍼(원주민)와의 연대, 우리가 지금까지 민주적이라 믿어왔던 여러 선택을 재고하는 식으로 시사점을 던진다. 난해한 문제인만큼 봉준호는 평이한 전개와 안전한 결말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 방식에 있어서 호불호가 갈리더라도 그는 해내야만 했고 결국에는 해냈다. 때문에 이 영화가 극장가를 살릴 것이란 메시아로 보는 것은 크나큰 착각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봉준호는 예술로 풀자는 시도를 하지 않았을까? 지구에 불시착한 우리라는 종들에게 조금이라도 미묘한 생각을 던져주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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