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엔딩

해피엔드 – 네오 소라

by 김지민




영화는 현실을 투영하는 창인 것일까, 아니면 현실을 개진하기 위한 기구일까. 순수한 예술주의자들은 영화라는 예술 자체에 어떠한 부수적인 가치를 덧붙이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예술이 예기치 못하게 야기한 효과들은 예술가들이 고려할 범주를 벗어났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어쨌든 예술이 투영해내는 현실은 우리에게 어떠한 반성을 유도하기도 하고 미적 체험을 유도하기도 한다. 현실의 반성과 미적 체험. 이는 예술을 논할 때 뒤따라오는 효과들 중 몇 가지일 것이다. 예술이 노골적으로 현실의 반성을 표방한다면 이 또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연결일 것이며 미적 체험을 표방하는 경우 역시 그럴 것이다. 혹은 두 요소가 연계적으로, 동시적으로 일어나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예술을 보았을 때 우리의 감각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이 감각의 작용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예술로 인한 우리의 반성과 체험의 작동을 보여줄 것이다. 예술 그 자체에는 감각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내재되어 있지만, 그 감각이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자체의 원인은 우리의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감각이다. 즉 우리는 어떤 사물(object)에 내재한 성질과 우리의 내재된 정념이 반응할 때, 현실에 대한 반성과 미적 체험 등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탓인지 예술은 선전기구같이 예기치 못한 오명을 쓰기도 하며 다른 의도가 있는 이들에게 그들의 의도대로 투영되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예술에 관한 논의는 이 글의 주된 주제는 아니므로 이쯤으로 하자.

어쨌든 사물(object)에 내재한 성질이 아닌, 우리가 사물을 보고 난 정념에서 이 같은 효과들이 나타난다는 근대적 사고를 반영한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우리는 영화가 남기고 간 또 다른 실재(the real)에 대해서 각축장을 벌인다. 영화 <해피엔드>는 그러한 각축장을 의도했든 안 했든 결과적으로 실재에 대한 각축장의 논의를 발생시켰다. 영화는 지진이 일어나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현실과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정치 현상의 축소된 형태를 일본에 투영한 현실을 보여주며 근미래의 우리가 어떤 결말을 맞이해야 하는가를 노골적으로 던지고 있다. 여타 근미래를 다룬 청춘물의 서사가 청춘의 낭만이라는 형식으로 뜨뜻미지근하게 포장되는 것과는 다르게 이 영화는 이데올로기의 작동과 청춘물의 낭만, 근미래라는 옅은 배경으로 적절히 배합되었다. 이 근미래가 옅게 느껴지는 이유는 일단 영화 자체에서 먼 미래처럼 최첨단의 기술을 다루지 않고, 지금 시대에도 있을법한 기술과 배경을 다루기 때문이다. 이 설정의 효과는 우리가 목도하게 될 현실에 강력한 경고가 되기도 한다.


여담으로, 류이치 사카모토의 아들이 만든 영화이기 때문인지 영화의 음악은 <전장의 크리스마스>와 비슷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듯하다. 이 점을 비교해보는 것도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소소한 재미가 될 것이다.





청춘물

근미래의 도쿄. 고등학생인 유타와 코우는 친구들과 함께 클럽에 가서 음악을 듣기도 하고 음악 동아리를 만들어 자유롭게 학교생활을 이어간다. 청춘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이 그러하듯이 이 영화에서도 학창시절의 낭만을 친구들과 영원히 이어가고 싶은 인물이 있다. 그 인물은 유타다. 유타는 어릴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철없고, 하고 싶은 것은 멋대로 하며 교장 선생의 차를 세로로 세워보자는 짓궂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 사건은 후에 영화의 중반부를 가로지르는 AI 감시와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유발하기도 하는데, 철없는 유타의 행동으로 시작한 이 사건은 막바지에 유타의 책임 있는 행동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인물의 성장 서사1) 형태를 띠고 있다. 유타와 같이 음악적 재능이 있는 코우는 유타와 다니면서 자유로운 일들을 일삼지만, 그는 재외한국인이다. 영화에서는 유타와 코우 일행을 다문화 학생으로 조직해놓았는데 이는 현재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고 있는 일본과 한국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다문화 가정 학생에 대해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영화의 경찰과 자위대,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코우를 외국인으로 인식한다. 코우가 영화 내내 마주하는 경찰은 언제나 코우의 신원을 확인하자마자 별도의 신분증을 요구한다. 법적으로 소지할 이유도 없는 신분증을 보여주는 것에 코우는 불만을 표하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한다. 이러한 코우를 외국에서 온 이방인이 아닌 ‘친구’라는 보편적 존재로 인지하는 사람은 일본인인 유타뿐이었다. 여기서 청춘물의 낭만(친구)이란 외국인 차별, 다문화 가정에 대한 거부같이 복잡한 이해관계들을 넘어서게 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낭만 하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러지 않는다. 영화는 그 이해관계, 외국인 차별 문제에 대한 정치적 문제가 얽히는 각축장에 청춘의 시기를 던져놓고 가만히 지켜보는 역할을 택한다.




정치적 시위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후미에게 빠진 코우는 후미를 따라 얼떨결에 정치적 시위를 나가면서 유타와 멀어진다. 정치 시위에 참여하던 코우는 문득 아무 생각 없이 음악만을 하며, 스피커를 학교에서 훔치고 아지트를 만드는 유타의 행동이 못마땅해진다. 미래에 대한 생각도 없이 현재만을 살려고 하는 유타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대책이 없고 철이 없다. 반면에 코우는 자신의 존재적 지위와 이방인이라는 신분에 대해 저항하고, 정치적 입장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후미에게 푹 빠져버렸다. 그에게 있어서 유타가 하는 행동은 철없고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물론 어릴 때부터 일관적인 모습 탓에 유타를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코우는 시위를 하는 이유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라는 후미의 말에 감화된 지 오래다. 그는 유타에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살지 말라는 식으로 유타를 비난한다. 하지만 유타는 그런 코우에게 대꾸한다.

그래 나도 묻자. 길에서 소리 지른다고 세상이 변해?





유타의 말과 코우의 말은 정치 체제에 살고 있는 각각의 개인들의 모습을 표상하고 있다. 몇몇 개인이 바꾸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사회는 꿈쩍도 하지 않고 우리를 내모는 것 같다. 그런 와중에 소리를 지른다고 세상은 바뀔 수 있는 것일까? 바뀌지 않는 것이 사실이더라도 바뀔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는 필시 답 없는 질문처럼 느껴진다. ‘어차피 죽어버릴 것이라면 좀 더 즐기며 죽어도 되지 않을까’라는 유타의 태도는 무거운 사회 현상에 지쳐버린 개인들에겐 시원한 말처럼 들린다. 어차피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즐겁게 사는 게 더 이로운 것이 아닌가. 반면에 (코우가 좋아하는) 후미는 격렬하게 저항한다. 학교의 감시카메라 시스템에 대해서 누구도 한 마디 못하는 상황은 불합리하다. 일본 사회에서 외국인, 다문화 가정 학생을 차별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한 인간에게 존엄해야 할 가치가 파괴된 사회는 옳지 않은 사회다. 따라서 그 불합리함에 우리 모두는 저항해야 한다. 왜 학교 학생들은 학교가 AI가 CCTV(판옵티콘을 은유하는 듯한 시스템 명칭을 쓴 것을 보면 더욱 노골적이다)로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가? 그들은 왜 기성세대들의 농간에 대해 비판하지 않고 정치인을 비판하지 않는가? 우리는 이미 이데올로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지진의 은유


이데올로기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에 따르면 이데올로기(Ideology)는 사회 집단에 있어서 사상, 행동, 생활 방법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관념이나 신조의 체계. 역사적ㆍ사회적 입장을 반영한 사상과 의식의 체계이다. 어떠한 집단적 사고, 집단 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을 의미하는 이 말은 라캉의 정신분석학과도 연관되며,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도 익숙한 용어이다. 필자의 소견이긴 하지만 오늘날 이 이데올로기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란 하나의 선전, 혹은 선동으로 더 강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이데올로기나 헤게모니 같이 어떤 정치적 상황 속에서 활용되는 이 언어들은 선전기구로서 더 얼굴을 자주 비치는 상황이다. ‘이념’으로도 번역되는 이 단어를 굳이 이데올로기로 표기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의 선전이나 이데올로기라는 말의 혼돈 속에서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선전이란 좁은 의미의 것이며, 이데올로기는 보다 넓은 의미로서 해석되어야 할 용어라는 점이다.


유타와 코우의 대화에서도 우리는 이데올로기, 혹은 이데올로기적 주체의 대화를 읽어낼 수 있다. 사뭇 유타만이 그 이데올로기 바깥에서 사유하는 듯한 자유로운 주체처럼 여겨질 여지가 다분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현실을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며, 코우의 반대항이 유타라면 그 대립 구도는 유타만이 독립적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타는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주체에 붙잡혀 있는 상태다. 반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라는 말장난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일찍이 지젝이 말했듯이 이데올로기가 허용하는 것 중 그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도 포함한다는 사실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유 또한 우리가 이데올로기를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암시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적 주체란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이 비유에 관해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루이 알튀세르의 말을 빌려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상상했던 이론적 장면이 거리에서 발생한다고 가정해 보면, 그 부름받은 사람은 돌아볼 것이다. 이러한 180도 신체적 방향 전환을 통해서 그는 [이데올로기적] <주체>가 된다. 왜냐고요? 왜냐면, 그는 그 부름이 ‘진정으로’ 자기를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또한 부름받은 사람은 <진정으로 자기>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

-『레닌과 철학』. 이 해석은 박찬부 교수의 해석임을 일러둔다.


박찬부 교수는 이를 풀어서 지나가는 행인이 경찰관의 ‘여보시오, 거기 가는 분!’(Hey, you there!)이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180도 돌려 그 경찰관을 바라보는 순간, 이 예비적 주체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봉합되어’ 이념적 주체로 화려하게 탄생한다 풀이한다.2) 이는 라캉의 자아이론 중 거울단계를 한 개인의 주체 탄생에서 사회적 주체 탄생으로 확장한 것과 같다. 라캉과 알튀세르가 동시대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러한 확장과 연결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라캉은 어린아이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마주할 때 느끼는 환희가 자아 탄생의 축사이며 거울이라는 환상을 통해 보는 가상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결코 온전히 볼 수 없다. 사진으로 보는 것 또한 렌즈를 통한 가공이며 거울 또한 빛의 반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부족한 시각을 어떻게 보완한단 말인가? 답은 가상이다. 거울 속의 이미지를 ‘나’라고 부르는 순간 자아는 탄생한다. 나는 나의 손이나 발처럼 직접적으로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모습들이 한정되어 있지만 거울을 들여다보면 멋지게 통일되어 있는 통일체를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통일체는 결국 가상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주체는 여기서 거울을 집단적 거울로 확장한 것이다. 사회가 나를 부르자 뒤를 돌아보면 ‘나’의 사회적 자아, 이데올로기적 주체가 탄생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이것은 결국 욕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라캉의 실재, 주이상스에 대해 설명하기에는 과하다. 일단 이 욕망의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진정한 면을 보지 못하는, 앞서 말한 가상의 문제와 연결됨을 상기하고 넘어가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하며,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된다. 라캉의 유명한 명제인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은 이러한 맥락이다. 이 개념이 집단적인, 사회적인 차원으로 확장된다면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명백해진다. 이데올로기는 집단 무의식인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원하는 것은 가상이다. 실상은 아무도 모른다. 이데올로기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데올로기 자체의 전복을 위한 또 다른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이로써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가늠해본다면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집단 시위의 행동과 유타의 말(소리 지른다고 세상이 변해?)은 사실상 노골적으로 이데올로기의 존속을 위한 구성이란 사실이 드러난다.

따라서 영화 속 인물인 후미의 적극적인 시위 행동을 두고 사람들이 일본의 비판문화를 칭찬한다면 이는 크나큰 오해이다. 후미의 모습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행위임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후미는 교무실 투쟁에서 교장과 협상한 후 공허함을 느낀다.결국엔 권력자의 교장의 말을 받아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정적으론 교장의 권위를 빌리는 수밖에 없다. 후미는 이 순간 자신의 투쟁이 자신이 비판했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깨달은 듯 하다. 소리만 지른다고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세상을 강화한다. 저항단체의 구성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코우는 구성원 중 한 명에게 유타와 비슷한 질문을 한다. 시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질문에 그는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뀌기 때문이라 대꾸한다. 마냥 당연한 듯이 답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경험한 바 있다. ‘과연 바뀔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과연 무엇이 바뀌는가?’라는 질문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우리는 이 저항이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경찰은 폭도들을 제압하고, 폭도라 불리는 시민들은 그 권위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더욱 거세게 저항한다. 이 현상은 체제를 흔드는, 말하자면 지진이 아닌 것이다. 지진은 영화 속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자연현상이면서도 사회적 분열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 지진이 일어나는 이유, 사회적 분열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연현상의 원인은 자연에게 있다. 이는 공고한 사실이다.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서는 우리가 기도를 해서 지진이 일어나길 바랐기 때문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믿는 이는 없다. 하지만 사회 분열, 일본의 정치적 분열은 어째서 일어나는 것일까? 원래 일본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방인들이 그 원인인 것일까? 이방인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총리의 지지율은 떨어지는 것일까? 외국인이 들어왔기 때문에 범죄가 올라간 것일까? 우연의 일치로 외국인의 수가 늘어나면 외국인 범죄가 늘어날 수도 있다. 마치 지진이 일어나길 기도했는데 우연히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증상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선 좀 더 분별력 있는 자세로 돌아봐야 함은 자명하다. 라캉의 말처럼 아내가 외도를 했든 안 했든 의처증에 걸린 남편은 여전히 병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남편이 환자라는 사실이다. 코우의 경우도 그렇다. 코우는 정말로 일본 사회의 분열과 정치적 차별을 없애기 위해선 속칭, 권력자와 정치인, 기득권을 몰아내야 함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믿어야 하는 것일까? 문제의 원인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러니까 지진은, 지진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시선(카메라와 인간)


영화에서 시선은 두 형식으로 나타난다. 친구들이 멀리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는 시선, 감시카메라가 학생들을 바라보는 시선. 이 두 시선은 공통적으로 현상을 왜곡하는 특징이 있다. 친구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선 학생들 특유의 유머러스함과 과장된 상황 묘사가 있다. 관객은 친구들의 해설(멀리서 지켜보기 때문에 대화의 목소리는 그 상황들을 바라보는 친구들이 역할극을 하며 우스꽝스럽게 묘사된다)을 참고하며 상황을 파악할 수 있지만 항상 정확하게 파악되진 않는다. 이때의 왜곡은 우스꽝스러고 희극적인 상황, 일종의 유머로서 승화된다.


카메라는 다른 의미의 왜곡이다. 카메라는 학생들이 벌점을 받을 행동을 했는지를 판단한다. 하지만 이 시선도 그리 정확하진 않다. 유타가 창고 열쇠를 훔칠 때 카메라는 유타의 행동을 벌점 행위로 인식하지 못했고, 야구부장이 담배를 피우진 않았지만 담배를 핀 행위로 인식하며 벌점을 매기는 우스운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의 ‘시선’은 알튀세르적인 이데올로기 감시 장치로 여겨지곤 하는데, 이러한 비틈과 유머 사이에서 이데올로기가 개체를 바라보는 시선과 개체가 개체를 바라보는 시선을 묘사하는 방식은 참으로 탁월하다. 특히나 학생들이 감시카메라와 눈을 마주치고 화면에 학생들의 신상정보들이 뜨는 장면은 개체를 감시하는 이데올로기와 주체가 충돌하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영화에서는 어른들이 학생을 감시하는 시선의 구도, 친구가 친구를 바라보는 구도, 사회가 시위대를 바라보는 구도로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영화는 이 구도 속에서 나름의 투쟁과 갈등들을 조망하며 결국에는 청춘이란 무엇이고 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유타와 코우는 영화의 초반부터 보여준 다리에서 서로 다른 옷을 입고 자신들의 길로 간다. 철없이 놀며 자유롭게 지내고 싶던 유타는 결국 친구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 기득권에 저항하는 후미를 좋아하는 코우는 자신의 처지를 개선해보고자 시위에 나갔지만, 결국 유타의 희생 덕분에 장학금을 받아 대학에 진학한다. 친구라는 청춘의 단어 아래서 그들은 만사가 결국 낭만의 희생이라는 씁쓸한 결말로 마무리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그들은 서로가 이제 너무나도 달라져 있음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에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농담에 웃고 지내던 사이였지만 시간이 지나 달라지는 것은 필연적인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과정을 어쩔 수 없이 목격하는 시간의 흐름이 아닌, 서로의 이해(영화에선 코우가 후미가 있는 교장실로 가기 전 유타와 대화를 했을 장면이 지나간다. 구체적인 내용은 보여주지 않았지만.)로 승화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청춘의 지나감’이라는 동일한 형식 안에서 적절한 비율로 각각의 이야기를 배합한다. 낭만의 희생이라는 거대한 봉합책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말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낭만을 포장하며 결국 낭만으로 마무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드는 후미의 기분처럼 끝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두 젊은 남자의 우정과 다시는 돌아오질 않을 학창시절의 청춘에 감화된 나머지 오히려 진한 여운이 남는 것 같기도 하다. 모든 걸 낭만으로 극복하지 않지만, 결국엔 바뀌지 않은 현실에서 끝나지만, 아쉬운 결말은 아니다. 영화의 제목인 <해피엔드>는 이 결말을 의미하고 있었나 보다.






1) 이때의 성장이 의미하는 것은 성장물에서 나타나는 인물이 의젓해지거나 어른스러워진다는 표면적인 의미보다는 청춘은 영원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순간을 의미하기도 했다.

2) 박찬부, 『프로이트 융 라캉 Eros, Thanatos 제 Ⅰ권』, 도서출판 책과 세계, 2007, 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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