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 넥스트 도어(The Room Next Door) - 페드로 알모도바르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대략적인 윤곽을 잡아본다면, 프로이트(S. Freud)가 말한 세 가지의 유형으로 죽음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의 무의식은 원시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지 못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죽이고 싶은 소망을 품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분열된 감정 – 즉 상반된 두 가지 감정 –을 품는다.”(지그문트 프로이트,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고찰』, 열린책들, 2020.)
삶은 죽음과 결부된 것이고 삶과 죽음은 결국에 동의어다. 하지만 우리의 무의식(프로이트의 용어로)은, 혹은 우리의 인식하에서 죽음은 거의 은폐된 채로 우리 삶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껄끄러운 주제를 기피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종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서는 자신의 종말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죽은 자를 욕하는 것은 무언가 우리에게 죄악감을 주기도 하고, 우리가 박정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결국, 죽음은 모든 것을 면죄하며 모두를 숙연하게 한다.
<룸 넥스트 도어>에서 잉그리드(줄리안 무어)가 마사(틸다 스윈튼)의 죽음에 대해 마주할 때면 견디지 못하는 모습은 죽음을 대하는 유형 중 하나를 보여준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은 비참한 사건이기 때문에 언제나 조심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죽음과 관련한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잉그리드처럼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잉그리드는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가 쓴 책의 서문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임을 밝혔다. 여기서 우리는 그녀가 두려워하는 죽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다. 죽음이 소멸이라면 그녀는 마사의 소멸을 두려워하는가? 그녀와 마사는 오랜 시간 동안 보지 못했다가 우연한 계기로 재회했다. 그 우연한 계기란 마사가 암에 걸렸기 때문이며, 그들은 마사의 투병이라는 연결점으로 재회했다. 만약 그녀가 마사의 투병 소식을 듣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마사의 죽음에 무거움을 느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마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몰랐더라면, 마사의 죽음은 잉그리드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죽음에 대해 우리가 염두해야 할 부분이란 죽음은 공동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하이데거(M. Hiedegger)가 『존재와 시간』에서 표현한 ‘공동존재’와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유족들은 장례식에서 고인 곁에 머물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추억을 되새기며, 죽은 사람과 함께 있다. 하이데거의 나름대로 감동스러운 표현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죽은 사람과 유족이 함께 있음(공동존재)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고인 자신은 더 이상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동존재는 언제나 같은 세계에서의 상호존재를 뜻한다. 고인은 우리의 ‘세계’를 남겨두고 떠난 것이다. 결국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이 세계에 존재해야만이’ 계속해서 그와 함께 존재할 수 있다.”
『존재와 시간』
장례가 없었다면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지금보다 덜했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 문화적으로 우리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죽음을 기렸으며, 타인의 죽음은 언제나 우리의 결말을 일깨우는 중요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며, 우리가 죽음을 수반한 존재라는 자각을 더욱 생경하게 일깨운다. 사람들은 일종의 소멸에 대한 공포를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미래에 대한 상상도 없이 지금, 현재, 여기서 끝난다는 감각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생의 기간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잉그리드가 마사의 투병과 태도에 대해 느낀 것은 마사라는 친한 친구의 소멸과도 더불어 자신의 삶에 대한 숙고, 자신도 죽음을 수반한 존재라는 자각이다.
마사는 종군 기자로 활동하던 시절, 전쟁 상황에서도 수도사들이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가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태도의 윤곽을 어느 정도 잡은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행복했던 기억, 자신이 즐겨하던 독서와 글쓰기에서 멀어지고 고통스럽고도 처참한 상태에서 마지막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는 ‘투병하는 삶’이라는 전쟁에서 수도사들처럼 사랑을 나누는 방식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대신 그녀는 다른 선택을 해야만 했다. 암에 걸리고 혹시라도 가능할 수도 있는 치료 속에서 고통받던 마사는 이제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 한다. 자신은 이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사실 치료를 받기 이전부터 그녀는 퇴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추한 모습으로 생을 떠날 수는 없다고 다짐한다. 그녀는 되도록 우아하게, 품위를 지킨 채 이 생과 작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가 잉그리드와 자신의 마지막 한 달을 보낼 집을 구하고 저녁을 먹을 때, 그녀는 고통 속에서는 올바른 생각을 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자신의 판단력이 붕괴되기 전에 그녀는 스스로 이 삶 속에서 퇴장하려 한다. 잉그리드는 고통 속에서 조울증에 걸린 그녀를 보고 왜 안락사라는 선택은 스스로 올바른 판단이라고 믿는지 묻는다. 하지만 마사는 그 질문에는 대답을 회피한다. 그녀는 고통으로부터 그저 벗어나기 위해서 안락사를 택한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고통으로부터의 도피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선택을 한 것이다. 도피는 연약함의 상징과도 비슷하게 읽힌다. 하지만 그녀는 연약하지 않다. 그녀의 의지는 온전히 강한 것이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도피적인 선택인 것일까. 삶을 선택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허망한 채로 가는 것은 숭고한 의미의 선택인 것일까. 마사는 도피를 택한 것일까? 하이데거를 다시 끌어오자면, 그는 죽음에 임하는 불안을 나약한 심정으로 보지 않는다. 존재의 소멸이라는 불안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불안이다. 그러한 죽음의 순간에 혹여나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연명하다가 죽어야 하는 것일까?
마사 또한 불안을 느꼈지만, 그녀는 온전히 자신의 선택을 이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른 이들은 마사의 선택을 종교적 의미나 윤리적 의미에서 옳지 않은 선택이라 했지만, 그녀의 퇴장은 우아했다. 그녀는 스스로 삶을 저버리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다.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그 누구보다 삶에 충실한 자세였던 것이다. 그녀는 고통스럽고도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연명할 바에야 가장 우아할 때 떠날 선택을 했다.
안락사에 관한 논쟁은 여전히 뜨겁다. 종교적 의미에서도 그렇고 윤리적 의미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이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고통 속에서 당사자들은 누가 구원해줄 수 있을까? 마사는 자살을 한 것일까? 그녀만큼 삶에 충실했던 인물이 있었던가? 그녀는 역설적으로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는 오히려 삶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이 글은 안락사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성을 주장하진 않는다. 하지만 각 개인, 주체의 어떤 삶에 대해서 우리가 논해야 할 때, 어떤 사상적 논변만으로는 다뤄질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자각할 필요도 있다.
그녀는 마지막 한 달이라는 유예기간 동안 깨끗한 집에서 밥을 먹고, 아픈 몸을 이끌고 산책이나 서점에 들르기도 한다. 테라스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햇볕을 쬐기도 하며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다. 영화의 사이사이마다 제임스 조이스의 문장이 그녀의 자각을 다시금 일깨운다. “눈이 내린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삶에 대한 초연함. 그것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나간 이들도(역설적이지만), 이 세상에 남겨져 있는 이들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마사의 죽음은 잉그리드에게 태도 변화를 일으켰다. 여태껏 마사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잉그리드는 두려움을 느꼈다. 혹자는 여기서의 두려움은 앞서 말한 자신의 죽음을 연상하는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문화 속에서 타고난 죽음에 대한 숙연함에 가깝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도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영화 시작 부분에서 우리는 이미 확인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죽음은 가려져 있지만, 죽음 앞에 선 사람을 볼 때 우리는 다시 죽음을 직면하게 된다.
잉글리드는 마사와 함께 지낸 시간 동안 죽음을 더 이상 두렵기만 한 것으로 느끼지 않는다. 자신의 전 남자친구와 식사를 하는 중에 그녀의 전 애인은 사람들이 더 이상 환경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며, 삶에 의미에 대해 푸념한다. 그러자 그녀는 마사의 태도를 떠올리며 그에게 말한다. “비극 속에서도 살아가는 방법이 있는 거야.” 우리가 죽음에 대해 숙연한 존재라고 했지만, 동시에 우리는 죽음을 꽤나 자유롭게 활용하기도 하는 것 같다. 종말의 의미를 삶에 대한 허무적인 태도를 긍정하기 위한 것으로 사용하는 회의론자들을 우리는 종종 마주한다. 세상이 이미 망해버렸으니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다는 그들의 냉소는 어떤 의미에선 안타까운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초연하던 마사와 같이, 잉그리드의 말처럼 비극 속에서도 살아가는 방법은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결국 태도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것일까. 다시 『존재와 시간』에 따르면 현존재인 인간이 죽는 순간은 경험할 수 없는 전체성의 관점에서 완전체가 된다는 의미이며, 죽음은 자신의 실현과 스스로의 경험 가능성을 배제한 상태라고 본다. 당연히 죽은 후에 우리는 어떠한 것도 실현할 수 없고 어떠한 가능성 위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자는 가능하지 않는 존재다. 또한, 세계-내-존재를 잃는다는 의미의 죽음은 당사자 주변에 있는 현존재들 또한 그 종결에 접근할 기회이기도 하다. 그 종결에 대한 접근이란, 한 존재자가 현존재(본질적 포괄적 존재)라는 존재양식으로부터 현존재가 아닌 무언가로 급변하는 존재현상의 경험이다. 영화에서 마사는 노란 정장(영화 내내 마사는 화려한 색감의 옷을 입는다. 이는 마사의 태도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을 입고 화장을 한 뒤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누워 자신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는 객관적 사물로서, 혹은 병리해부학적 대상으로서 죽음을 상징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잉그리드에게 그녀는 그러한 의미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영안실의 시체를 그런 객관적 사물로만 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마사의 죽음 이후로 마사의 딸 미셸과 잉그리드는 만나게 되고 어머니를 추억한다. 살아 있는 자들의 만남은 사라진 존재에 대한 애도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의미의 전환이기도 한다. 우리는 더욱 삶을 긍정하게 되며, 죽은 자들이 남겨 놓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