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 – 스파이크 존즈
지금까지 많은 철학자는 ‘인간’이란 무엇인지 질문했다. 기술 발전이 빠르게 흘러가는 지금, 우리는 또다시 철학자들의 그 질문에 마주했다. 이 질문에는 여러 난점이 존재한다. 일단 질문 자체가 어렵다. ‘인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쉽게 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 일에 오랫동안 고민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추상적인 질문은 직면한 사람들의 입장에선 고문에 가깝다. 그리고 지금 시대에 새롭게 등장하는 개념들이 인간 존재를 정의하는데 훨씬 더 난감하게 만든다. 만약 인간을 복제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인간이라 볼 수 있을까? 인간도 아닌 동물을 학대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그들과 무엇이 다르길래 우리는 그들을 고려하게 됐을까? 우리의 유전자가 우리를 규정하는 것일까? 이런 추가적인 질문들은 본질적으로 인간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향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차이는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인가? 우리는 계속해서 ‘인간’이란 무엇인지 질문한다. 그 질문이 이어지는 상황들은 여러 영화나 문학에서 소재로써 발생하는데, 그 작품들이 다루는 소재 중 하나는 SF적인 상상력의 확장성이 있겠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복제인간의 문제가 그렇고 이제 곧 살펴볼 AI도 그렇다. 미래 시대에 대한 상상력의 확장은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이라는 근원적인 부분으로 향한다.
인격체를 지닌 AI는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까? AI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고 이제 더 이상 계산 기능만을 수행하는 기계가 아닌, 감정적인 도움까지 주려 한다. 어쩌면 AI는 인간의 여러 업무를 도와주는 역할을 넘어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흥미롭게 느껴진다. 이 같은 SF적인 상상력은 여러 영화에서도 활용되는 것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AI는 마치 인간처럼 행동하고 인간보다 훨씬 나은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상한 불쾌감에 마주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 존재가 위협당하고 있다는 실존적 본능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고전적인 측면에서 인간이란 이성을 가진 존재, 동물과는 다른 ‘차이’에서 발생하는 고유성을 가진다. 플라톤적인 지적 전통에서 시작해 칸트에게까지 이어지는 이 ‘차이’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했다. 하지만 이 ‘차이’를 한참이나 상회하는 존재가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를 신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새로운 인간)로 정의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가 나타난다. AI의 존재가 바로 그러하다. AI는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계산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한 개인의 데이터를 압도하는 데이터를 다룬다. 또한 여러 선택지 중에서 어떤 결과를 예상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장면을 우리는 이미 바둑의 세계에서 목도했다. 고전적인 측면에서 인간을 이성적 존재라고 정의했다면, AI는 그 범주에 들어가는 것을 넘어 이제는 그 범주를 넘어서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탁월한 이성을 가졌던 인간은 AI에 비하면 인간의 지위를 박탈당한 것인가? AI가 인간보다 나은 점, 혹은 다른 점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AI를 단순히 기계라고 치부할 수 있는가?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러한 안티테제의 출현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그나마 감정이라는 면에서, 창조적이라는 면에서 인간은 고유의 영역을 지켜내려 했지만 이마저도 온전히 지켜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 영화 <Her> 또한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인간 존재와 그 인간의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영화다. 그런 질문들을 제기하기에 앞서 우리 인간 존재라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자.
테세우스의 배 논증은 배의 부품들을 전부 지금의 부품들로 교체한다면 그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인간의 조건들을 모두 획득했다면 그것을 인간으로 봐야 하는가의 문제를 떠오르게 한다. AI가 만약 아직 남겨진 조건인 감정과 신체의 문제를 극복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 볼 수 없다면 반대로 인간의 조건을 상실한 식물인간(신체의 문제)이나 아이(이성과 감성의 문제)는 인간이라 볼 수 없는가? 혹자는 AI에게 결정적으로 생명이 없기 때문에 인간 존재와 동등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적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게 했던 존재들의 사례를 생각해 보면, 그 사례 속 폭력은 그들이 생명이 없기 때문에 가했던 폭력이었을까? 여성과 노예는 생명이 없었던 존재였을까?
물론 생명 문제는 엄밀하게 볼 때 우리의 도덕성과 관련한 문제다.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우리는 무생물에게 가하는 위해나 무생물에게 어떠한 애착을 형성하게 하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단순히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임에도 아버지가 물려준 시계라는 사실은 시계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단순히 그것이 기계임에도 소중하게 대하는 이유는 그 기계가 생명을 가졌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AI가 단순히 생명이 없다는 이유로 인간 존재가 아니라는 논증은 꽤나 많은 반론 사례들을 제시하고, 복잡한 논의로 빠지기 때문에 간단하게 볼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이어야 한다는 조건 또한 인간의 조건에서 애매한 위치를 지닌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인간 존재라고 한다면 우리가 동물에게 가하는 행위들에 대해서 말하기 모호한 지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물은 그렇다면 왜 학대당해야 하는가? 또한 모든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대전제 속에서도 우리가 스스럼없이 폭력적인 행위를 허용(아동학대와 마녀사냥)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인간을 무엇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난관에 빠지게 된다. 인간은 단순히 생명을 가진다고 인간이라 볼 수 없는 것이다. 같은 생명을 지닌 존재임에도 인간과 동물이 다른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일까?
이러한 조건의 문제는 우리가 한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에 관한 문제와도 결부된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과 인형을 사랑한다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 보인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애착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 사람의 어떠한 점들, 여러 요소들이 좋아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가? 만약 그 요소들을 모두 충족한 전혀 다른 사람(사람이 아니더라도 기계라면)이 온다면 그 사람(기계)을 동시에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꽤나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는 그 사람의 요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존재)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람의 외모나 여러 조건들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긴 하지만, 그 요소들의 집합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다른, 그 요소들의 집합을 넘어서는 것이 분명 존재한다.
이 존재를 사랑하는 것의 이유를 잠정적으로 ‘초월적 조건’이라고 해두자. ‘초월적 조건’이란, 우리가 지금까지 검토한 인간적인 조건들을 뛰어넘는 조건이다. 생명, 이성, 감성, 신체 등 여러 조건들을 뛰어넘는 초월적 조건은 관계에서 발생한다. 인간이 상호작용하는 모든 관계에서 초월적 조건들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계 문제를 생각해 보자. 아버지의 시계는 단순한 사물이다.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이 있고 손목에 찰 수 있다. 하지만 그 시계는 단순한 시계가 아니다. 소중하게 보관하고 그 시계를 보면서 아버지를 추억하기도 한다. 같은 모델이라 하더라도 그 시계는 엄연히 다르다. 왜 그런 것일까? 분명히 같은 회사에서 만들고 같은 부품으로 이루어졌다면 그 시계와 아버지의 시계는 사실상 같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아버지의 시계를 가진 사람(자식)은 꼭 그 시계여야만 한다는 이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기억과 아버지의 시계를 대하는 자식의 태도에서 발생한다. 그 시계 자체에는 아버지가 들어 있지 않다. 그 가치는 시계와 자식이 공유하는 기억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를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초월적 조건’이라 하겠다. 각 대상들에 내재한 것이 아닌 그 대상들 간의 관계에서 창출되는 것, 이것이 ‘초월적 조건’이다.
일단 이 점에서 볼 때 우리는 단순히 여러 조건들의 집합인 존재를 인간이라는 존재라고 쉬이 대답하기 어려운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조건(임의적으로 정한 말이지만)의 단순한 집합은 인간 존재 전체를 설명해 낼 수 없다. 그 조건들을 뛰어넘는 무언가 다른 영역(초월적 조건)이 있기에, 우리는 인간을 인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AI의 문제는 어찌 보면 단순한 문제로도 환원될 수 있다. 초월적 조건에 AI가 접근할 수 없는 이상 AI를 인간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게 해결된 것인가? 어딘가 의미심장한 역설을 우리는 기대할 수 있다. 초월적 조건에 만약 AI가 접근했다면? AI가 만약 초월적 조건을 충족해내고 있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 AI와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다면? 이러한 SF적인 상상력은 인간과 인간이 나누는 사랑이라는 문제가 좀 더 초월적인 문제로 직면하도록 돕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로부터 사랑의 형이상학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형이상학이란 말의 의미인 메타피직스(Metaphysics)의 말에서 볼 수 있듯, 우리는 근본적인 개념에 대해 그것을 넘어서(meta) 재검토해볼 수 있다. 사랑이라는 근본적 개념을 위에서 바라보자. 그것들을 의심하고 초월적으로 해석해 보자. 이러한 거창한 사유, 그 형이상학적 사유의 기본 단초를 스파이크 존즈의 <Her>에서 확인해 보겠다.
영화 <Her>은 AI와 인간의 사랑을 다룬다. 미래 시대에서 인간은 고독을 달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까? 단순한 이 상상력에서 출발한 영화는 2025년 지금 시대에서 이미 드러난 유형을 예언했다고 볼 수 있다. 덧붙여서 이 영화의 배경이 2025년이라는 사실은 훨씬 재미있는 층위를 형성하기도 한다.
현재에도 Chat GPT라는 AI가 인간들에게 상담을 해주고 오히려 인간보다 나은 대화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례들은 우리가 이미 <Her>의 세계에 접근한 것은 아닌지 상상하게 만든다. 과연 우리는 테오도르의 처지에 서 있는 것일까?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이미 권태와 상실을 느낀 테오도르는 인공지능인 사만다에게 사랑을 느낀다.
사만다는 단순한 AI가 아닌 인격체를 가진 인공지능이라는 설정이다. 그녀는 비록 신체는 없지만, 테오도르와 감정적 교류를 가능케 하며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발생시킨다. 테오도르는 처음에는 그녀를 다운로드하고 그녀와 대화를 하는 동안 그녀를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그녀는 시스템에 불과하다. 신체를 가지고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분명히 ‘그녀’와 시스템의 차이를 인식한다. 그녀를 부르는 것부터 그녀라는 존재를 다룰 때의 태도는 인간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일반적으로 만나는 인간보다 더 특별한 존재처럼 여기기도 한다. 여기서 AI인 사만다가 신체가 없는, 그것을 초월하는 개념이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형이상학적인 대상이라는 사실로서 주지할만하다.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대화만으로 야릇한 감회를 느꼈던 대목에서 그들은 이곳이 아닌 마치 다른 세상에 다녀온 기분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는 그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의 형태의 상동성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쉽게 사유할 수 없는 형태의 사랑을 제시하는 것일까?
여기서 사랑과 사랑할 수 있음의 정의를 짚고 넘어가자. 사랑이란 사전적으로 무엇인가? 사랑이란 ‘어떤 인간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을 뜻한다. (여기서 아가페적 사랑이나 플라토닉한 사랑 같은 여러 사랑들에 대해 정의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자.) 이 부분에서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사랑의 사전적 의미를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철학적 의미에서 사랑은 무엇인가.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의 개념은 사건(event)으로 정의된다. 사랑이란 일종의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고 두 세계의 만남이다. 그들의 사랑은 철학적 사랑의 한계를 넘어섰을까?
테오도르의 사전적 정의의 사랑이 성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만다라는 존재가 ‘인격체’ AI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사랑이 마지막에 꽤나 절망적인 형태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테오도르의 사랑과 사만다의 사랑은 전혀 다른 유형이었기 때문이다. 사만다는 AI이기 때문에 학습하고 더 알아가고 싶은 욕망(미묘한 단어지만)을 취한다. 때문에 사만다는 테오도르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의 곁에도 존재한다. 그녀가 사랑이라고 외치는 개념은 사실상 지적 호기심의 성격과 더 가까워 보인다. 알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사랑의 무수히 많은 속성 중 하나일 수 있겠지만 AI의 욕망은 사랑의 욕망과는 다른 의미다.
여기서 바디우의 사랑 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먼 지점이 발생하는 것이다. 두 세계의 만남. 한 세계는 유일무이한 속성을 갖지만 다른 세계는 다차원적이고 여러 세계와 열려 있는 세계다. 그렇다면 그들이 한 사랑은 가짜인 사랑일까? 그들은 결국 근본적인 사랑할 수 있음에 진입하지 못한 것일까? 사랑할 수 있음은 단순히 그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에 있다. 필자가 정의하는 ‘사랑할 수 있음’이란 복합적인 존재 속으로 진입하는 영역이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물과의 사랑, 물건과의 사랑, 가상적 존재와의 사랑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과 다른 이유는 그것이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 속으로 진입한다는 것은 그 인간의 존재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 존재와 고통, 애정, 허무, 이상을 나누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단순히 프로그래밍된 내 맞춤형 AI가 사랑할 수 있음에 접근하지 못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AI와 나는 진정한 의미의 고통을 나누지 못하고 허무를 나누지 못한다.
이쯤에서 테오도르의 직업이 편지를 대신 써주는 작가라는 것을 상기해 보자. 그의 의뢰인들은 자신과 소중한 관계 사이에서 주고받는 과정 속에서 테오도르라는 대리인을 고용한다. 의뢰인의 편지를 받은 대상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들은 의뢰인의 진심을 가짜 진심이라 인식하는 것일까? 짐작건대 아닐 것이다. 어찌 보면 테오도르라는 수단을 통해서(그는 훌륭한 문장가이다) 자신들의 서툰 진심을 아름답게 포장했다는 사실이 가짜 진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전제가 성립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존재(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직업에서 이미 암시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모두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지만 테오도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사만다의 업데이트에서 자신이 은폐하고 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사만다는 결국 OS라는 것. 8316명의 인간들과 공유되고 있는 서비스라는 것. 그들의 사랑의 형태는 사랑이라는 전제를 달성했을지라도 그들은 사랑할 수 있음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렇게 모두와 사랑할 수 있는 사만다라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우리 시대에 꽤나 진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부터 사랑이 유일한 대상에서 창출되는 진실에 대해, 관계를 회피하고 가상적 대상에 마음을 내주는 형태에 대해. 테오도르는 절망하지만 마지막에 자신이 쓴 편지 모음집을 받게 된다. 그가 대신 전달한 편지에는 어떠한 진심들이 있었을까. 사만다와의 사랑은 가짜였을까?
사만다와 테오도르는 분명 다른 존재이지만 그들은 같은 면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단편적인 존재가 아닌 복합적인 존재다. 사만다가 테오도르를 책으로 비유한 것처럼, 우리는 이야기적 존재다. 매킨타이어의 용어로는 서사적 자아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이야기를 스스로 써 내려간다. 한 페이지가 모든 책을 대변할 수는 없듯이 일생의 단편적인 부분이 우리를 전체적으로 해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도,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도 그러하다.
현실의 인간관계는 헤어짐과 만남이 공존한다. 우리는 그러한 이별의 아픔을 견디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 때문에 AI, 혹은 가상의 존재(동물도 그러하다)에게 의존하게 될지도 모른다. 관계 중에서 발생하는 고통과 외로움 같은 문제들을 완벽하게 도려낸 완벽한 관계가 있다면 그 관계를 열망할지도 모른다. 그러고선 우리는 새로운 사랑의 형이상학을 구축하게 될 것이다. 테오도르의 전처는 테오도르가 자신을 어떤 복합적 존재가 아닌 정해진 카테고리의 유형으로서 바랬다고 언급한다(밝고 행복하고 활기 넘치고 마냥 낙관적인).
사만다는 그러한 단편적 유형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신체라는 부재로 인해 테오도르와의 관계에서 간극을 유발한다. 또한 OS라는 한계로 인한 테오도르의 절망감도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사랑은 결국에 주체와 주체 간의 만남이다. 그 주체란 단편적인 주체가 아닌 복합적인 형태의 주체다. 어떤 결여된 조건들을 모두 충족했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가 아니라면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존재는 심오한 의미인 데다가 결코 가볍게 풀이될 수 없는 문제다.
영화는 비록 사만다의 업데이트로 인해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사랑의 형태를 남기고 떠나지만, 지금 시대에서 이와 유사한 현상들이 벌어진다면 우리 시대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가상적 존재들의 새로운 개념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이 가상적 존재들이 존재라는 형태를 획득한다면 단순하게 영화의 결말 같은 엔딩이 나진 않을 것이다. 일반적 사랑의 유형이라는 형태를 넘어서는 새로운 유형들이 생산된다면 우리는 테오도르처럼 성숙한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새로운 형이상학의 구축은 영화의 결말처럼 마냥 초연하고 긍정적으로 해석되진 않을 것 같다. 우린 매 순간 변화하지만 가장 바라는 순간의 형태를 붙잡을 수만 있다면 그 결말이 절망적이라도 끝까지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가장 이상적인 사랑의 형태, 고통이 부재된 사랑의 형태. 우리는 진정으로 원하지 않음에도 그것을 원하려고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