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너스: 죄인들(Sinners) - 라이언 쿠글러
사랑과 평화라는 이름 아래 다시 구축되는 공동체는 순진한 상상에만 머물다 보면 폭력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이제는 상호 이득이 되지 않으면 관계 맺는 것이 어색해진 오늘날의 대가 없는 관계 맺음은 가족만 남은 것이 아닐까. 돈을 지불하면 딱 그 가격의 관계만 허용된다. 받은 돈보다 더 많은 것을 한다면 그 사람은 순진한 사람이다. 집 밖의 누군가가 도움을 청하며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기가 망설여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외면할 것인가. 무조건 타인이 적의를 갖고 나를 해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세상살이는 더욱 각박해지는 것은 아닐까.
<씨너스>는 1900년대 흑인 차별에 대한 서사지만, 뱀파이어라는 소재를 활용하여 공동체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태어난 이상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 그 소속된 공동체에서 공유되는 현실들은 대게 우리의 말로 바꿔서 접근하자면 편견 내지는 관습 정도로 해석될 것이다. 따라서 한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가 서로 마주할 때 서로 간의 현실은 부딪히고 갈등한다. 우리가 외국인을 볼 때 느끼는 언어나 문화의 차이로 인한 부딪힘뿐만 아니라, 같은 나라지만 서로 다른 고향에서 온 이들 또한 그러한 부딪히는 상황을 겪는다. 공동체 내부에서도 그렇다. 공동체의 구성이 개인의 집합이라면, 각 개인들은 서로 간의 다른 지점들로 인한 차이를 겪기는 마찬가지다. 같은 공동체이며 공유된 현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각 개인들은 동시에 각각의 또 다른 현실들을 갖고 있다. 주인공인 새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음악을 사랑한 탓에 아버지로부터 도피한다. 새미의 사촌 형들인 스모크와 스택 또한 자신들이 태어난 곳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위해 시카고로 도피한다. 이러한 탈주 상황은 우리가 얼마나 끊임없이 갈라지고 다시 이어지는지, 반복의 상황들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 영화에서 중추적으로 다뤄지는 소재인 뱀파이어는 이러한 갈등과 차이들을 단번에 제거하고 통합해 버릴 상황을 제안하지만 그 구호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영화 속 뱀파이어의 특징은 집으로 침입하려 할 때 집에 있는 내부인들이 허락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뱀파이어는 강력하고 불사의 능력을 가졌지만 인간의 목을 물기 위해선 인간이 먼저 허락해야만 그들을 뱀파이어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다소 황당할 정도로 매너 있는 레믹(뱀파이어)은 사랑과 평화라는 구호 아래서 새로운 공동체를 제안한다. 뱀파이어가 되면 서로의 모든 기억이 공유되고 고통과 느낌까지 공유된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가거나 어떠한 위험부담을 감수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융해된다. 기억이 공유된 뱀파이어들이 다 같이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서로 춤을 추는 장면은 기이하면서도 섬뜩하지만, 사실상 인간 역사를 들여다봐도 인간들은 노래나 춤을 통해 연대감을 확신하고 서로의 공유된 문화를 만들었다. 뱀파이어라는 설정은 그러한 문화적 맥락의 역사를 단축하고 재빠르게 유대감을 설정하는 형식인 것이다.
이쯤에서 보면 뱀파이어의 방식이 인간의 방식보다 훨씬 나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형식은 여전히 폭력적이며 소위 문명적이지 못하다. 뱀파이어라는 호러적인 장르 특성상 목을 깨물고 피를 흘리며 뱀파이어가 된다는 피상적인 모습 때문만이 아니다. 집에 있는 누군가가 타인을 초대해야 비로소 타인이 들어갈 수 있다는 뱀파이어의 방식은 문명적이라 할만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의 목을 물어버리고 강제로 접속한다. 물리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이 강제적으로 공유되고 재빠른 합의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이중구조는 뱀파이어의 접속 방식을 더욱 기묘하고 섬뜩하게 만들고 결국에 이들이 전제하는 방식은 폭력만이 있음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들이라고 해서 크게 이와 다를 것인가? 우리 또한 그저 호의로 열어준 문 때문에 누군가의 폭력에 의해 희생당하고 상처 입는 경우가 많다. 영화에서 레믹은 이를 지적하며 스모크에게 말한다. 너희들에게 건물을 판 인간은 사실 KKK 소속이며 자신이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뱀파이어로 만든 부부 또한 너희들을 죽이려고 했던 KKK라고. 아마 자신이 없었으면 스모크와 스택은 KKK에게 죽었을 것이라 말한다. 차라리 뱀파이어가 되어서 공유된 공동체를 만들고 서로 살아간다면 더 좋을 것이 아닌가? 영화에서 이러한 레믹의 존재는 인간성의 추악함을 보여주려는 장치다. 레믹은 강제로 다른 뱀파이어들에게 명령하진 않는다. 다만 서로의 경험이 공유되고 이어지는 과정만이 폭력적이고 강제적일 뿐이다. 여기서부터 이미 우리 사회를 곰곰이 되돌아 생각해 보면 인간 또한 별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새미 또한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며 강요되지 않았던가? 스모크와 스택 또한 불우한 가정 때문에 억압받았다. 그렇다면 뱀파이어와 인간은 별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이며 오히려 레믹의 구호인 사랑과 평화는 인간보다 훨씬 신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스모크는 새미를 뱀파이어에게서 구하며 레믹을 죽이고, 살아남은 그들은 서로 각자의 길로 가는 선택을 결단한다. 레믹이 아무리 박애주의자적인 행동을 보이고 인간보다 훨씬 신사적이었다고 하지만 뱀파이어가 된 그들은 레믹에게 홀려 있는 상태였다. 그가 말하는 구원이란 타인의 동의를 요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말하는 일방적 형태의 구원이었다. 그런 저주받은 상태의 강제적 유대를 우리가 진정으로 원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뱀파이어가 되는 과정 자체가 폭력적이라 하는 것과 더불어 레믹의 제안 자체에도 은밀한 억압이 내재되어 있다. 레믹을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바라본다면 레믹의 제안이 일방적 형태의 구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뱀파이어가 된다면 모든 것이 잘 될 거야라는 수상한 구호는 영혼을 잠식당하고 저주받은 존재인 뱀파이어의 정당성을 온전히 해명하지 못한다. 영화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뱀파이어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고 그들을 두려워한 이유는 그들이 이질적인 존재임에도 있지만, 사실상 그들의 구호가 믿음직스럽지 않은 구호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물리기만 했을 뿐인데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레믹의 구호에 동참한다. 이러한 집단 광기가 너무나도 손쉽게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은밀한 전체주의의 작동을 읽어낼 수 있다. 주지되었듯이 이미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독재자들은 광활한 유토피아를 약속한다. 레믹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유토피아를 약속한다. 레믹은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막강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 아닌가? 하지만 이는 독재자들 또한 막강한 능력을 선전하며 그 능력이 있든 없든 인민들이 그들의 전능함을 받아들인 것과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설령 레믹의 그 능력이 진짜라고 하더라도 전 세계 인구를 뱀파이어로 만든다는 전략은 터무니없으며, 뱀파이어가 되기 전 신사적으로 뱀파이어가 되기 위한 계약이나 뱀파이어가 죽은 상태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저주받을 것이란 조건들을 납득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레믹은 이를 신사적으로 극복할 것인가? 영화를 보면 전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그저 광기와 폭력의 산물이며 그 포장 수단으로 매너나 신사를 선택했을 뿐이다.
비록 인간 또한 서로를 억압하고 갈등하지만, 기억이 공유되고 연결되는 능력도 없지만 서로 이해하며 맞춰 가려 노력하고 자아를 지키기 위해 투쟁한다. 사실상 뱀파이어에 물리기 전에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달아나려 했고 그들은 이성적 납득이 아니라 기억의 공유와 신체의 변환 때문에 레믹의 구원 제안에 동참했다. 우리는 이미 피에 젖어 태어난 죄인들이지만 태양 아래서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리는 죄를 덧씌우려 하지 않는다. 그 대가로 인해 타인과의 손쉬운 이해가 성립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말년의 새미를 찾아온 스택은 스모크와 같이 마지막으로 본 태양을 추억하고 그날 밤의 기억을 자신의 삶에서 멋진 순간이었다고 대답한다. 그는 뱀파이어였지만 자신이 인간이었을 때를 가장 아름다운 날로 추억하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의 형이 자신을 살려주는 대신 새미를 살려주라는 약속을 지킨 것도 그의 남아 있는 인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종 타인과의 관계 맺음과 타자를 내 안으로 들이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등장하는 음악에 관한 설명은, 우리가 남들과 같이 더불어 살아가면서도 그 부대낌 속에 악의를 가진 이들이 출현할 것이란 암시는 인간관계의 전반을 서사적으로 보여준다. 이미 현실 속에서 관계와 결합으로 서로의 소속감을 확인하려 하지만 각각의 공동체들은 다른 공동체를 배척하고 그 속에 있는 개인들도 마찬가지로 타인을 배척한다. 장 폴 사르트르가 『닫힌 방』에서 썼던 ‘타인은 지옥’이라는 유명한 문구가 이러한 현실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죄를 가중하는 일을 자초해서는 안 되겠다. 그 죄의 형태가 무엇이든 간에 타자를 들이고 그 타자와 불가피하게 대립하는 상황을 회피해서도 안 되겠다. 타인은 분명히 말해 지옥이지만, 영화에서 스모크가 지옥에나 떨어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담담하게 넘긴 것처럼 삶에 초연해질 필요가 있다. 도저히 견디기 힘든 타인과의 관계라도 자신의 길이 있을 것이고 언제나 막다른 길에서 스스로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은 온다. 영화는 다소 감상적이지만 전혀 억지스럽지 않게 이를 풀어가며 마무리한다. 기타리스트로 성공한 새미는 스택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스택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의 선택에 대해 끝까지 삶을 이어간다. 레믹이 말한 구원의 의미가 스택의 몸에 깃들었다 하더라도 새미와 스택은 각기 다른 자유의 길을 이어나간 것이다.
(여담이지만, 사실 이 영화는 각각의 거리가 먼 장르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생소한 형태다. 뱀파이어, 블루스, 인종, 공포, 종교 등 여러 요소가 결합되어 있어 자칫하면 뭉개질 수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두드러지지 않고 나름대로 일관적인 진행을 보여준다. 이 형식 자체가 보여주는 것이 각각의 다른 타인들과의 관계 맺음을 시사한 것이라는 짐작은 과한 해석일까.)
이방인이라는 말 자체에는 이방인과 더불어 우리라는 이분법적 구도와 ‘우리’는 과연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자크 데리다는 이방인에 대한 문제는 이방인이 제기한 질문, 이방인에게서 온 질문을 함께 고려하는 문제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우리와 이방인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이란 말인가?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이방인의 문제, 즉 타자와 외국인, 결혼이주여성 등 여러 가지의 문제는 데리다가 말한 이방인의 문제와도 결부된다. 언어가 같으면 우리는 같은 국민일까. 법적으로 정의된 바운더리에 속한다면 국내인의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일까. 이러한 복잡한 문제 속에서 환대 문제란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환대는 역설적으로 그 환대를 하는 자, 집주인의 선택에 달렸기 때문에 외부인의 운명은 오로지 그 집주인의 몫으로만 남겨 있다. 따라서 환대란 그 자체로 비대칭적인 관계다. <씨너스>는 그런 면에서 이 구도를 역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집에 있는 자가 그들을 들일 수 있는 권리를 쥐고 있지만, 권력은 외부인이 더 강하다는 구도다. 이 관계 사이에서 팽팽하게 유지되는 긴장감은 영화를 몰입하게 만드는 요소였지만, 현실에선 지극히 보기 드문 상황이다. 이러한 역전된 구도, 권력이 이전된 상황은 어떤 상황으로 암시할 수 있는가. 예컨대, 데리다의 경우에는 강하기 때문에 쉽게 정당화될 수 있는 법의 강제성을 빌려 법이 추구하는 정의 실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방인, 타자의 문제를 돌아보고 있다. 환대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법의 강제성이 이를 보장해줘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법 제정은 동시에 딜레마를 야기하는데, 영화에서도 강제성과 폭력성이 은연중에 드러났듯이 법 또한 강제성과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국인은 우선 환대의 의무, 비호권, 그 한계, 그 기준, 그 치안 등이 명시되어 있는 법의 언어 앞에서 이방인이다. 그는 정의상 자신의 언어가 아닌 언어로, 집주인. 주인{접대인}. 왕. 영주. 권력. 국민. 국가. 아버지 등이 자신에게 강요하는 언어로 환대를 청해야 한다. 주인은 그에게 자기 자신의 언어로의 번역을 강요하는데, 이것이 첫 번째 폭력이다. 환대에 대한 문제는 여기서 시작한다.”(Derrida, 『환대에 대하여』, 64p.)
데리다는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을 타진하는 데 있어서 법에 내포되어 있는 본래의 의도, 정의를 관철할 것을 주장한다. 외국인에 대한 법을 대할 때 우리는 본래의 정의 실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들에게 제시하는 법이 그들의 언어가 아닌 자국의 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강제성을 제거하고자 데리다는 절대적 환대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물론 이 정의 실현에 초점을 맞춘다는 의미 또한 환대를 하는 집주인에게 온전히 달려 있기 때문에 이마저도 쉽지 않은 제안이긴 하다.
<씨너스>의 구도가 특이한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러한 비대칭적 관계에서 그 권력을 외부인, 이방인에 넘겨버린 상황이기 때문이다. 뱀파이어와 인간의 대립 구도가 현실의 관계를 비틀어버렸기 때문에 환대의 역전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영화에서 소위 법으로 표현되는 강제성의 상징은 사실상 뱀파이어의 힘에 있는 것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환대에 관한 문제를 마저 풀어보자. 이방인에 대한 환대는 왜 문제시되고 있는가. 우리는 왜 타자를 초대해야 하며, 그들이 굶도록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할까? 이는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누구이며 타자란 또 누구인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같은 문제를 형이상학적 돌파구를 통해 해결한 이가 있는 것 같다. 필자가 생각하기론 그 인물은 임마누엘 칸트다.
임마누엘 칸트는 오랫동안 도덕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 개의 비판서를 내며 이성의 선험적 원리로부터 도덕을 구출해내는 시도를 했다. 그 시도는 말년의 『영구평화론』에도 적용되어, 그는 세계시민적 사고를 요청하게 된다. 칸트의 선험적 원리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마치 도덕법칙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만, 우리의 부당한 현실과 잔인함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도덕법칙은 마땅히 해야만 하는 강제적 원리가 아니라 자연법칙과도 같이 필연적이며 우리는 그 법칙에 대한 존경심과 이성의 의욕으로 마땅히 따라야 한다. 여기서 그 명령을 내린 이는 누구인가? 신? 이질적 존재? 뱀파이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따라서 이 명령은 강제성의 명령이 아니며 현실을 개진하고자 하는 칸트의 강력한 제안 정도라고 해두자. 그리고 이러한 제안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선 우리의 얄팍한 경험을 모조리 배제하고 선험적(경험을 넘어서는)인 차원에서만 도덕을 구축할 수 있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결국 칸트는 이러한 명령의 연장선으로 개인의 직업이나 사회적 위치 차원에서의 이성 사용이 아니라 한 국가, 그 국가를 넘어선 한 세계의 시민으로서 이성을 사용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한 이성 사용의 요청으로 세계시민법을 입법하고 우리가 본래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지 말 것을 말한다. 우리는 본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적이 없다. 따라서 다른 곳에서 온 이방인은 혐오받을 무언가가 아니다. 그는 마땅히 우호의 권리로써 존중받아야 할 존재이며 우리는 그 존재에 대해 무조건적인 환대를 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추돌 사고들이 우리의 비정한 현실이라 해도 우리는 그 비정함과 비참함 속에 머물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런 면에서 레믹의 제안은 순간적으로 달콤한 것이지만(간편하고 빠르게 세계평화를 이룩한다는 의미에서)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성을 저버리는 짓이다. 적어도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람은 조금이라도 우아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