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내밀한 상상

우연과 상상 - 하마구치 류스케

by 김지민




삶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우연의 과속을 우리가 상상이라 할 수 있다면 이 영화 속 상상들은 여러 차례 추돌 사고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영화에서 세 가지 추돌 사고들은 각각의 상상과 얽힌 여러 우연들이 겹쳐져서 일상적 규모의 이야기들을 생산한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메이코는 자신의 전 남자친구와 절친한 친구의 만남 앞에서 전 남자친구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오는 대학교수 앞에서 교수가 쓴 소설의 음란한 부분을 낭독하고 녹음된 파일을 교수에게 보내주려 하지만 엉뚱한 사람에게 전송하게 된다. 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츠코는 자신의 옛 여자친구를 동창회에서 만나길 기대하지만 실패하고, 우연히 길에서 만난 비슷한 여자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이 세 가지 이야기들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치정극이나 자극적인 사건들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적인 감각을 남겨둔 채 우리 곁에 있을법한 이야기의 형태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있을법한 이야기를 주목하게끔 만드는 능력이란 하마구치 류스케의 능력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는 일상에서 포착될법한 이야기들을 자신만의 카메라로 재구성해서 우리 앞에 던져둔다. 이 이야기들은 어떠한 과잉이나 비약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뭇 일상적인 수준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수단은 필요 없다는 듯이 영화는 이야기들을 더없이 흥미롭게 다뤄버린다.


영화에서 상상과 우연이 겹치고 발휘되는 장면들은 하나같이 거리낌이 없다. 우리가 몇몇 눈치를 봐가며 소심하게 머뭇거리는 순간을 영화는 망설임 없이 우리를 상황 속으로 들이닥치게 만든다. 설마 전 남자친구에게 가서 말하지는 않겠지. 설마 녹음된 파일을 단순히 실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보내서 이혼하게 되지는 않겠지. 처음 본 사람 앞에서 자신의 사연들을 말하지는 않겠지. 어디까지나 상상만으로 남겨둘 법한 부분들을 영화는 우연이라는 힘을 빌려 거침없이 발휘한다.





우리 안에는 어떤 내밀한 상상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상상들을 거리낌 없이 말로 내뱉거나 행동으로 보여주며 살지는 않는다. 여러 사회적인 시선이나 눈치, 내면에 있는 망설임같이 온갖 외·내적인 규제들이 우리의 상상들을 붙잡아두기 때문이다. 그러한 규제들을 벗어나고 싶은 은밀한 충동들을 느끼다가도 그 시선 때문에 망설이게 될 때, 누군가가 그것들을 꺼내 보여준다면 우리는 규제에 대한 배신감에 희열을 느낀다. 영화에서도 이러한 희열의 순간들이 나타난다. 범법행위는 아니지만, 은근히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주인공들의 행동들이 우리를 안절부절못하게 하다가도, 그 행동들이 작동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불안을 배신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메이코가 자신의 친구와 자신의 전 남자친구가 있는 자리에서 했던 상상의 말들을 떠올려보자.





“결정했어? 카즈는 누구로 할 거야? 구미 미안해, 카즈의 전 여친이 나야. 최악의 우연이지? 진짜 웃기다. … 마법 같았어. 그리고 깨달았어. 난 카즈를 사랑해. 마음속 깊이 카즈만을 원하고 있어.”





메이코의 상상은 상상이라 밝혀지기 전에 우리의 불안을 보기 좋게 배신한다. 우리는 그 배신에 감화되어 불안감과 동시에 은근한 쾌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상상의 배신감이 주는 희열이다. ‘이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데….’라는 불안을 무너뜨려 버리는 그 상상들은 타인과 충돌하며 다시 튕겨 나가고 현실에 반영되는 순환을 겪는다. 상상이 벌어지는 순간, 불안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지만 은근한 희열과 함께 존재한다. 이는 고통(불안)과 쾌락(희열)이 동시에 있는 주이상스 Jouissance의 개념과도 비슷해 보인다. 주이상스는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의 개념이다(욕동과 욕망과도 관련된 이 내용은 다음에 다뤄보자).


이는 우리가 햇빛을 볼 때 해는 따뜻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눈에 고통을 주는 것처럼 고통과 쾌락이 동시에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원하지 않지만 동시에 원하는 양가적인 상태의 욕망을 바라는 것은 정신분석학적으로도 미묘한 순간들이다. 메이코가 거침없이 말을 꺼내는 순간 관객은 불안했던 일들이 벌어지는 순간을 목격하고 그 속에서 뒤따라오는 묘한 상쾌함을 느낀다. 결국에는 비밀로 하려던 말들을 꺼내는구나. 메이코가 말하던 최악의 우연. 절친한 친구가 마음에 들어 하던 남자가 자신의 전 남자친구라니. 그리고 세 사람이 동시에 마주하자 메이코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상상들은 앞선 우연들과 충돌한다.


자 그렇다면 그 후론 어떻게 될까? 그것들이 영화에서 일상적인 규모로 벌어지고 복잡 미묘한 시선들로 마주하게 될 때, 영화는 비로소 제목에 맞는 의미들을 획득한다. 우리 안의 내밀한 삶들을 구성하는 몇 가지 우연들과 몇 가지 상상들. 우연과 상상의 충돌. 우연과 상상. 영화는 이러한 우연과 상상들을 세 개의 에피소드로 이어나가면서 마무리한다.





‘만약’이라는 상상은 우리가 다시는 가보지 못할 상황으로 가본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흥미로운 예감이다. SF 영화는 그 규모가 거대한 나머지 우리를 감탄하게 만드는 상상력을 보이는 데 있지만, 이 영화는 그 규모가 일상적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의미의 감탄을 유발하는 듯하다. 그곳에는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마다 남겨진 대사들과 인물의 시선, 몸짓, 장소들이 이뤄져 있다. 우리가 생각만 했던 내밀한 상상들이 ‘만약’ 우연이라는 힘에 밀려 튀어나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러한 추돌 과정에서 벌어지는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을 보게 되는 걸까. 우리는 왜 그런 우연들과 상상에 애틋해지고 마는 걸까?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러한 추돌 과정들을 섬세하게 엮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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