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 – 이창동
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인 공주(문소리)는 중증뇌성마비장애인이다. 종두(설경구)는 교도소에서 이제 막 출소한 남자다. 변변찮은 직업도 없고 가족들에게 걸림돌이 취급을 받는 종두는 어느 날 자신이 뺑소니 사고를 쳤던 피해자의 집에서 공주를 만나게 된다.
공주는 종두와는 다른 의미로 가족들에게 외면받는다. 공주의 가족은 장애인인 공주를 이용해 장애인 지원 아파트에서 살지만 정작 공주를 필요할 때만(장애인이 살고 있는지 점검을 올 때) 공주를 집으로 들여올 뿐 평소에는 공주를 다른 곳에서 지내게 한다. 그런 그곳에서 갑자기 종두가 찾아온다. 종두는 공주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그녀의 집에 들어와 그녀를 강간할 뻔한 사람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꽃을 선물해 주고 그녀에게 예쁘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종두가 유일했다. 사회에 고립되며 언젠가 터져버렸을 울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사랑을 원했는지 종두에게 강간당할 뻔한 위기를 겪고도 공주는 그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은 종두 또한 당황스럽지만, 그들은 곧 다시 만나게 된다.
사회에서 외면받는 사람들인 두 남녀는 결국에 서로 간의 공간을 구축하고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들의 공간은 현실에선 발 디딜 수 없지만, 상상으로는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없이 환상적인 공간으로 전환된다. 그것은 뒤에서도 나오겠지만, 공주의 상상과 종두의 꿈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들은 현실을 완전히 배제하진 않고 현실을 꿈으로 이어 붙이는 작업을 반복한다. 영화 <오아시스>는 현실에 빠진 남녀가 서로의 공간을 환상 속에서 구축한다는 틀을 전과자와 장애인,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로 만들어냈다.
종두는 공주의 집에 찾아가 빨래를 해주고 보살펴준다. 공주의 가족들이 가끔 공주를 찾아오지만, 확실히 종두와는 달리 그저 생사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가족들은 공주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보살펴주지만, 종두는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정성스럽게 발을 씻겨주고, 밖으로 나가 데이트도 하며 그녀와 함께 즐겁게 보낸다. 공주는 중증뇌성마비장애인이지만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발음이 어눌하고 말하는 것도 느리지만 그와 함께 다니면서 공주는 종두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주변 사람과 종두의 차이를 느끼며 자신을 인식하는 자들의 호의를 구분하기 충분했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보살펴주고 같이 밖으로 나가 데이트도 해주는 종두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흐름이다.
영화는 종두와 공주가 함께 있을 때 공주의 환상을 아련하게 보여준다. 지하철에서 장난을 치는 커플을 보며 자신도 스스로 일어선 채로 종두에게 장난을 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들이 식사하러 가는 곳은 사람들이 밥을 먹고 있음에도 사장은 점심시간이 끝났다고 말하며 그들을 거부한다. 사람들도 이상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거부당하며 다른 곳으로 내몰리지만, 공주의 환상 속에서 공주는 종두와 같이 있을 때마다 휠체어에서 일어나고 종두에게 장난을 친다. 여느 연인들처럼 평범하게. 이 평범해 보이는 모습을 묘사한 연출이 공주에겐 환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 이 영화의 기묘한 점일 것이다. 때문에 그에 맞춰 공주의 환상은 신비롭게 묘사되지도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마치 단절된 현실을 환상으로 이어 붙이듯이. 공주만 그런 꿈을 꾸는가. 종두도 마찬가지로 꿈에서 공주와 춤을 췄다고 말한다. 꿈이지만 ‘진짜 생생한’(종두의 묘사대로) 장소에서 그들은 춤을 춘다. 그들의 상상은 현실로 이어지려 노력한다. 현실에서는 시동이 꺼진 차에서 내린 종두가 공주를 안고 도로 위에서 춤을 춘다. 그 춤은 계속해서 그들의 환상과 현실을 연결 짓는다. 그들은 어느새 도로에서 집으로 이동한다. 집에서 그들은 다른 이들과 함께 춤을 춘다. 그녀의 집에 있는 오아시스라는 그림에서 나오는 인도 소년과 코끼리, 여자가 나와 춤을 춘다. 공주의 집에서 종두와 공주는 즐거워하며 그들과 함께 춤을 춘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회가 그들을 바라보는 처지는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종두는 대책 없이 손님의 차를 몰고 나가며 자신의 친형을 곤란하게 한다. 현실에서 종두는 걸림돌이고 무책임한 개인이다. 주변인들은 종두를 문제아라고 인식하며 그를 껄끄러워할 뿐이다. 공주는 시각적으로 사람들에게 거리감을 준다. 사람들은 공주가 들어오면 공주를 신기한 듯이 쳐다본다. 어머니의 생일에서 공주를 데려오자 사람들은 공주를 거부한다. 그녀가 뺑소니 피해자의 딸이라는 사실 때문에라도 그의 큰형은 노골적으로 거북해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녀가 장애인이라는 것에 시선이 호의적이진 않다. 결국, 식사자리에서 거부당한 종두와 공주는 그날 공주의 집에서 사랑을 나누지만, 종두는 집에 찾아온 공주의 가족들에게 신고당해 경찰서에 들어가게 된다.
한편으론 이 영화는 이상적 사랑에 관한 내용이지만 그 사랑을 카메라가 따라가던 와중에도 눈에 밟히는 것은 사회의 시선과 구조다. 공주와 휠체어를 같이 들고 지하철 계단을 가파르게 내려가는 종두, 공주와 같이 데이트를 하려 해도 이동에 제약이 걸리고 사람들이 거부하는 상황들. 이러한 구조적인 요소들은 우리 사회의 은근한 구석을 들춰낸다. 하지만 영화 자체에서도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미묘하게 어긋나는 것 같다. 자신을 강간하려 한 남자만 자신을 사랑한다는 비참함 속에서 공주는 자신의 집에서 섹스를 하는 도우미의 신음 소리를 옆방에서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마지막에 경찰에게 심문을 받을 때도 사람들이 공주의 말을 듣기보다는 외부 사람의 시선에서 공주의 증언은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구성된다. 그녀가 내내 동정받는 모습이 영화에서 보이는 순간 그 거북함은 우리의 도덕적 인식을 건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녀가 단순히 불쌍해 보여서가 아니라 그녀가 속해 있는 구조 속에서 느껴지는 부조리함이 그 인식의 원인이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동정을 유발하는 형식은 빈곤 포르노적인 방식이다. 동정이 곧 도덕이라면 도덕은 그저 단순히 비참한 감정의 유형에만 머물 것이다. 도덕은 오히려 총체적인 감정이자 인식이지, 결코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영화 내내 공주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동정의 시선을 받는다. 공주가 몸으로 종두가 자신을 강간한 것이 아니라고 몸부림칠 때도 가족들은 그저 공주를 달래기만 한다. 공주는 영화 속에서 감정 표현이 격한 바보처럼 묘사된다. 중증뇌성마비장애는 팔다리 마비, 경직, 떨림, 비정상적인 자세 및 움직임 등으로 인해 걷기, 앉기, 서기 등 기본적인 운동 수행이 어렵다고 한다. 인지적인 측면에서도 주의력 결핍, 기억력 저하, 학습 속도 지연 등으로 인해 학습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상적인 인지 능력을 보이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인지능력에 결함이 있을 것이라 판단할 수는 없다. 공주 또한 전반적으로는 이러한 유형의 장애인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녀가 적절히 묘사된 인물이었는지는 나로서는 판단하기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영화는 그들의 순수한 사랑에 대해서 아름답고도 비참하게 묘사하지만(경찰서에서 빠져나온 종두는 밤마다 나뭇가지 그림자가 무섭다는 공주의 말을 기억하고 미친 듯이 나뭇가지를 자른다), 배우 문소리가 자신의 글에서 밝혔듯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오히려 악화시킨 것은 아닌지 우려할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영화의 설정 자체가 자신을 강간하려 한 남자에게 사랑에 빠지는 장애인 여성이라는 것이 장애인 분들에게 불편한 인식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 부분에 대해서 장애인 분들이 불쾌하셨다면 이는 비판받아 마땅할 내용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묘사하는 장애인에 대해 논란이 있었음에도 영화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인식과 구분에 대해 짚어내고 있다.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종두라는 인물은 물론 전과자이지만,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로 교도소를 다녀왔고, 공주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배척당한다. 그들은 환상에서 그들만의 장소를 꾸릴 수밖에 없었고 이는 우리가 사랑을 바라보는 형식의 구조를 드러낸다. 우리는 순수한 사랑에 열광하는 면이 있다. 순수한 사랑은 응원해주고 싶고 그들이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고난에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이 영화가 나름대로 감상에 젖은 영화라면 그들의 결말은 아름답게 마무리될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렇게 아름답게 꾸려지는 사랑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그 점을 담담하게 노린다. 특히나 영화에서 묘사된 장애인의 상황이 그렇다. 장애인 지하철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고 장애인에 대한 시선과 인식 개선 또한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한 각기 다른 개인들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보편적 사랑이라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끌어와야만 그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일까? 살려달라고 외치는 와중에는 바라보지 않고 외면하다가도 보편적 사랑의 구조를 미적으로 재현해야만 숙연해지는 것일까. 다소 우울한 결론이 나온 것 같지만 영화라는 틀을 통해 장애인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일종의 미적 충격 요법이라고 생각한다면 위안이 될까. 영화를 보다가 미적으로 황홀한 장면을 보고 감탄하다가도, 장애인에 대해 걸리는 장면들이 나타나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장애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기도 했다. 문득, 감독은 이것 또한 염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