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기획

by 진경


명명의 기원


태초의 세계엔

아직 이름이 없었다.


무언가가 흘렀고

무언가가 타올랐으나

누구도 그것을

“물”이라거나 “불”이라 부르지 않았다.


사물은 있었지만,

구조는 없었다.


그러므로 세상은 존재했지만

세계는 아니었다.


어떤 말은 발명되지 않았고

다만 오래도록, 입술 너머에서

도래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다른 이가 그것을

공유했을 때—


그제서야 우리는

공통의 현실을 갖게 되었다.


말은 사건 이전에 도착했고

존재는 말에 의해 구성되었다.


말은 세계의 설계도였다.

그리고 설계도는

우리를 하나의 구조로 묶었다.


세계관의 조직화


파시스트의 감옥에 갇혔던

한 이탈리아의 철학자는


지식인의 작업이란

이데올로기의 토양을 교란시키는

말의 편집이라 썼다.


이는 대문자 담론이 아니라

생활어로,

습관의 문법으로

현실에 침투시키는 기술이었다.


그는

벽돌도 없이

사유의 건축을 시작했다.


단어는 벽이 되었고

문장은 기둥이 되었으며

어순은 균형이었다.


어떤 시절, 붉은 깃발보다

조용한 말이 더 멀리 갔고

광장의 함성보다

서재의 문장이 더 오래 남았다.


말이 구성되고

의식이 감염되며

삶이 그 문장을 복사할 때,

세계는 다른 질서를 입는다.


혁명이란 총이 아니라

어떤 말을 믿게 만드는 일.


그 믿음이 제도보다 오래가면

우리는 그것을 시대라 부르고

그 믿음이 모조리 쓸려가면

우리는 그것을 폐허라 부른다.


그는

단지 문장을 바꾸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문장은

체제의 어법을 바꾸었다.


아직 오지 않은 문장


말해지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면

아직 발화되지 않았을 뿐인가?


우리는 안다.

말이 먼저 도착한 자리에는

세계가 나중에 따라온다는 것을.


어떤 언어는 쓰여지기도 전에 금지되었고

어떤 이름은 말해지는 순간 사라졌다.

그 잔해 속에서

우리는 말의 기원을 다시 세운다.


그러므로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것들을 위해

우리는 다시, 언어를 기획한다.


백지의 시간 위에서

말의 뼈대를 세우고

사유의 근육을 붙이고

마침내 그것이 걷기 시작할 때,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된다.


말은

잉여가 아니라 구조이며

장식이 아니라 조건이다.


기다림은 이제 문장의 형식이 아니다.

우리는, 누락된 문법을 조립하고

그 문장 안에서 길을 만든다.


도래하지 않은 세계를

발화 가능하게 만드는 것—

우리가 감행하는

말의 혁명.


#眞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