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호주, 영국?
진로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만큼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진로에 대한 생각도 참 많았다. 아무리 내가 무엇을 하게 될지 틀에 가두지 않는다고 해도 정말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에헤헤 하면서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기까지 내 고민의 여정은 이러했다.
해외여행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한 번도 젊을 때 해외에서 삶을 꾸려나갈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들인 비용에 비해 최대의 효율을 내지 못할 것 같다는 이유로 남들 다 간다는 어학연수나 교환학생 한 번을 가지 않았다. 나의 구역인 한국에서 적은 비용으로 편안하게 지내며 가끔씩 사치를 부리고 싶을 때 여행을 가는 편이 훨씬 이득이라는 계산 아래였다. 써놓고 보니 이마저도 참으로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다. 정저지와!
사람의 사고라는 게 생각보다 더 딱딱해서, 한 번 심어진 생각의 뿌리는 아주 굳건해지고 그 위에 쌓이는 새로운 생각들만이 형태를 바꿀 여지가 있는 경우가 많다. 따져 물으면 저기 제일 아래 깔린 그 생각의 전제를 뒤집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지만, 원래 그래왔으니 그 시작부터 들여다볼 생각은 미처 못하고 만다.
20대 초에 했던 언어학습에만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저 바보 같은 생각은 작년 말까지도 유효했다. 외무영사직을 생각하긴 했지만 근무지가 해외에 위치해 있을 뿐, 한국 사람들과 한국 회사에서 하는 일을 골랐으므로 사실상 정말 내 삶을 새로운 어딘가로 옮겨볼 생각은 못했던 것이다. 공무원 시험 합격 후 비는 시간 동안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와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비용과 시간면에서도 너무 여유가 없었고 혼자 집 구하기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 막막하게 느껴져서 금방 접었었다.
20대 초중반에 한 번씩 생각했던 주제여서 그랬는지 도통 그쪽으로는 생각이 뻗어나가지 않았지만 해외에서 살아보겠다는 마음을 먹은 후로는 조금의 진척이 있었다. 학벌주의가 완연한 대한민국 사람답게 그 나라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우선 어떤 식으로라도 학위를 따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사 전공을 이어서 석사 공부를 하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학사를 다시 하기에는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아무리 해외가 우리나라보다 나이에 관대하다고 해도 뼛속까지 한국 사람인 나에게 나이가 한 살 한 살 먹어간다는 것은 나의 가능성이 점점 닫힌다는 뜻이었기에 쉽사리 마음먹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 제일 안전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 학사부터 다시 해보자는 마음으로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독일의 대학들을 뒤적여봤다. 학사과정을 영어로 진행하고 등록비가 없으며 실무 위주의 교육을 해서 인턴십과 취업까지 연계가 되는 과정이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응용과학대라는 개념이었는데, 일반 종합대학과 똑같이 쳐주는 학사학위가 나온다는 말과, 일반 학사학위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말이 현지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갈리는 것 같았다. 사실 학벌에 대한 미련은 없어서 이 쪽으로 한 번 방향을 잡아볼까 하는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곧이어 이런 직무로는 취업 비자를 받을 만한 직업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외생활을 길게 해 본 적이 없어 비자 문제를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서 공부한다고 시간은 다 보내놓고 비자를 못 받는다면? 그렇게 공부에 열정도 없는데 여러모로 큰 낭비임이 틀림없다.
게다가 독일 대학 입학에 필요한 서류들과 영어 성적은 준비해 놨지만 추천서를 받고 자소서를 쓰는 등의 지난한 과정을 감내할 만큼 내가 공부가 간절한 게 아니니 이 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절한 게 아닌 수준이 아니라 공부는 딱히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나중에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서 더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면 모를까, 지금 상황에서 열의도 없는 공부를 했다가 어떤 결과를 맞을지는 뻔해 보였다.
자연스럽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찌 됐든 일을 하다가 돌아올 수 있는 워킹홀리데이로 생각이 옮겨갔다. 예전에 반짝 머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진 이후 꾸준히 주변인들이 다녀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에 처음 고려했던 그 시점보다는 훨씬 덜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때는 무려 2015년쯤으로 유튜브도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았던 데다가 블로그에서도 후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나도 사회경험이 거의 없는 아주 어린 학생이었기 때문에 체감하는 벽이 아주 높았다. 하지만 2024년이 되기까지 알바를 같이 했던 언니, 친척 동생, 여행에서 만난 친구, 영어 회화 스터디에서 만난 사람들이 해외로 이주해 가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나라고 못할게 뭐람?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나도 모르게 자라났나 보다.
고민이 시작된 시점은 워홀 막차라 불리는 만 30세였다. 만 31세가 되는 생일이 몇 달 남지 않은 시점이었고, 3달 안에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의외로 독일에도 워킹홀리데이가 있었고 찾아보니 베를린은 영어만으로도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후기가 꽤 있었다. 이에 더해 여행하기 좋고 축구의 나라이며 유럽에 위치한 영어 사용국인 영국과 여행의 기억이 너무 환상적이었던 호주까지 총 3개의 선택지를 놓고 고민을 했다. 독일은 비자 신청 후 3개월 안에 입국해야 하고, 거기 가서 영어를 사용한다면 정말 단편적인 경험만이 가능할 것 같아 일찌감치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남은 건 영국과 호주였는데, 호주는 만 30세까지, 영국은 2024년 협약이 개정되며 만 35세까지 선택이 가능했다.
마케팅에서 흔히 써먹는 방법이 품절임박, 마지막 상품이듯이 만 31세 생일이 고작 3개월 남은 나에게 만 30세까지만 신청이 가능했고, 지금이 아니면 이제 끝이라는 불안감이 여행의 기억과 힘을 합해 마음에 불을 질렀다. 호주에는 친척동생이 워홀 중이고, 높은 임금으로 돈을 벌기가 쉽다니 여기서 경험을 하고 돈을 모아 정말 가고 싶었던 영국으로 건너가는 게 어떨까 하는 그럴듯한 계획이 떠올랐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국가를 옮겨 다니며 워홀, 유학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계속 마음에 무언가가 걸렸다. 빠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조급함을 덜어내고 차분하게 생각해 보니 또다시 정말 원하는 것을 내버려 두고 조금이라도 안전한 길을 택해서 빙빙 돌아가려는 내 모습이 보였다. 하루하루가 소중한 지금 1년이나 호주에서 돈을 먼저 벌어보겠다고 머물게 되면 적응했구나 싶을 때쯤 또 나라를 옮겨야 하지 않을까? 정말 경험하고 싶었던 건 유럽에서의 삶인데 막상 호주에서 1년을 보내고 나서 내가 해외 생활이 맞지 않는 사람인 것을 깨닫는다면 영영 영국에는 못 가게 되는 게 아닐까? 돈이 목적인 워홀을 하게 되면 정말 그 나라 사람들과 섞이며 다양한 경험을 하지 않고 그저 돈을 많이 주는 일을 찾아다니진 않을까? 만 31세 생일을 하루 앞둔 날까지 정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호주 워홀 중인 친척동생과도 수 없는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이러다가 머리가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 고민한 끝에 만 31세가 되기 불과 4시간 전, 최종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번에는 우회하지 말고 바로 가보자는 결론이었다. 영국 가서 돈 좀 못 벌고 그지처럼 살면 어때, 온전히 내가 선택해 원했던 내 삶을 살고 있는 건데. 그렇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만 31세가 되는 자정, 치열했던 고민이 끝났다. 이제 법적으로 신청자체가 안되니 더 이상 마음 졸일 필요가 없었다.
그때부터 새로운 걱정이 나를 괴롭혔는데, 2024년부터 영국 워홀은 선착순으로 바뀌었다. 5,000명의 쿼터가 다 차면 그때 신청이 닫히는 방식이었는데 6월의 중순에도 아직 5,000명이 다 차지 않은 상태였다. 여러 상황을 종합하여 봤을 때, 내년 2,3월쯤 영국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영국의 경우 비자를 신청하고 6개월 이내에 입국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렇다면 9월쯤 신청하는 것이 적합한데 과연 그때까지 마감이 되지 않고 열려있을까.. 미리 받아놓게 되면 유효한 2년의 비자 기간이 깎이게 되고 마냥 기다렸다가 올해 신청이 마감되면 또 조급해질 것 같았다. 내년 1월 말에나 비자 신청이 열릴 것이고, 비자 발급은 아무리 빨라도 3주는 소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왕 조급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니 한 번 올해 9월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작년까지 1,000명이던 쿼터가 올해부터 5,000명으로 늘었고, 나이도 만 35세까지로 바뀌었으니 임금이 낮고 물가가 비싸며 상대적으로 워홀러들이 적응하기 힘들다는 영국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주에 비해 '덜 급한' 차선책이 됐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였다. 배짱 좋게 9월에 신청서를 넣겠다고 말한 것과 달리 혹시나 닫힐까 조마조마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드디어 9월 초, 무사히 신청서를 넣었다. 9월 말인 지금도 여전히 열려있고, 선착순 5,000명 첫해였던 올해의 사례를 보고 내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더 여유를 가지고 신청하지 않을까 싶다.
영국 건강보험료 약 290만원, 비자 신청비 약 55만원, 도합 345만원을 이미 지출하고 나니 마음이 편하다. (비자는 아직 안 나왔지만 아마 나올 테니)나 이제 진짜 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