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른 이점이 없는데도 6시간이나 걸리는 열차를 선택한 이유는...
2022년 12월 30일 금요일
예약 필수! 스키 관광객들로 빈자리 없이 꽉 찼던 베르겐-오슬로행 열차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알게 된 건데 나는 한 곳에서 오래 머무르는 것보다는 가급적 많은 곳을 가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어떤 날은 ‘이동’ 자체가 주요 일정인 날이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베르겐에서 오슬로로 가기 위해서 가장 합리적인 이동 수단은 비행기다. 기차와 비교했을 때 이동 시간이 3배 짧고 요금 차이도 거의 나지 않는다.
여름이었으면 노르웨이의 계곡, 피오르드 협곡, 산 등을 보기 위한 목적으로 열차를 타는 관광객이 있긴 하지만 모든 것이 눈으로 덮여버린 지금 딱히 열차를 타는 이점은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 고민했고 이동에만 6시간이 걸리는 열차를 선택한 이유는...
여름만큼 아름답진 않겠지만 그래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이 구간을 보고 싶었고 홋카이도, 핀란드에서 기차 여행의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동하는 시간이 버려지는 시간이 아닌 충분히 여행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기에 이번에도 고민 끝에 오슬로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겨울이라 한적하겠지라는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아침부터 역 안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들 스키를 타러 가는 건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큰 배낭을 메 스키장비를 들고 있었다. 사람들의 복장만 보면 기차역이 아니라 마치 스키 리조트의 대기실 같았다. 사실 일찍 출발했음에도 기차역을 찾지 못해 헤매어서 정말 딱 출발시간 10분 전에 역에 도착한 터라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플랫폼은 어딘지 헷갈리지 사람들은 발 디딜 틈 없이 가득하지...
정신없이 캐리어를 밀고 (나름 가져온 것들을 쓰고 먹고 있는데 왜 짐이 줄어들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겨울 여행의 짐은 참으로 무겁다) 출발 5분 전에 간신히 열차를 탔다.
노르웨이 풍경을 보겠다고 호기롭게 열차를 예약했을 때 내가 간과한 건 이곳은 해가 늦게 뜬다는 사실이다. 아침 8시 열차를 탔음에도 창 밖은 여전히 어두컴컴했고 조금 지나면 해가 뜨긴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잠시 눈을 붙였다.
기차 안이 소란스러워져서 눈을 떴는데 다행히 날이 밝아 있었고 창밖을 보니 홋카이도, 핀란드와는 다른 설경이 펼쳐져 있었다. 집, 도로, 마을 등등 사람이 거주하는 흔적이 원래 없는 곳인지 아니면 새하얀 눈에 뒤덮여 지워진 건지 알 수없지만, 기차가 다니는 길 외에 보이는 거라곤 눈 덮인 산과 얼어붙은 호수 밖에 없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약 없는 겨울을 끝없이 달리는 영화 설국열차 같이 현실감이 없는 풍경이었다. 기차 안에 사람들마저 없었다면 정말 마지막 인류가 된 기분이 들 뻔했을 정도로 사람의 흔적 없는 설경 속을 기차는 태연하고 묵묵히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역시 기차를 타기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며 감상에 빠져 한참을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는 바깥 풍경과는 달리 기차 안은 출발할 때부터 사람들과 많은 짐들로 가득 차 있었고, VOSS라는 곳에서 스키 장비를 가득 짊어진 사람들이 많이 내렸다. 여기가 아마 이 기차를 타고 온 대다수 사람들의 목적지인 것 같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기차에서 내렸고 스키 장비와 짐을 잔뜩 짊어진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을 싣고 기차는 다시 설경 속에 유일한 흔적을 남기며 지나쳐 갔다.
이제 해는 환히 떴다. 한동안 산과 계곡 외에 아무것도 없는 설경 속을 지나다가 VOSS를 지난 이후부터는 열차를 타고 높은 산의 능선을 천천히 내려가고 있는 것처럼 설산의 풍경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 세계 크리스마스트리의 원산지는 노르웨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산에는 눈 쌓인 크리스마스트리들이 가득했다. 그대로 들고 가서 집에 장식해 두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나무들이었다.
비행기로 이동했으면 분명 얻지 못했을 시간이었다.
노르웨이의 풍경을 내 눈으로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러니까 마치 내가 카메라가 된 것 같았다.
열차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시간 낭비 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지만 이 설경은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
하염없이 바깥풍경을 보다 잠시 졸다 하다 보니 벌써 11시였다. 열차를 탄지 세 시간이 지났지만 그렇게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지가 않다. 서태지의 Take 5를 들으며 틈틈이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했다.
왜 인지 이 노래가 떠올랐고, 언젠가 다시 이 노래를 들으면 지금 이 순간이 떠오를 것 같았다.
GEILO라는 곳에 정차했다. 점점 도시에 가까워지는 건지 건물들이 많이 보였고 묘하게 산 아래로 내려온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지나온 곳들보다는 화기애애 함이 느껴졌다.
여름에는 지금 이 풍경이 호수겠지... 그것도 아름다울 테지만 지금 이 풍경이 참 좋았다.
이렇게 계속 하염없이 기차를 타고 있으면 언젠가 이 풍경이 지겨워질까?...
지겨워질 것 같지는 않고 시간, 공간감을 잃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아마 이 열차가 같은 곳을 계속 빙빙 돌고 있다고 해도 알아차리리 못했을 것이다.
내게는 너무도 아름답고 편안한 풍경이었다. 삶이 힘든 순간 나는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이 망망한 설경 속에 파 묻혀 버리는 상상을 하게 될 것 같다.
세상에 좋아져서 굳이 여행가지 않아도 집에서도 모든 걸 볼 수 있고 할 수 있는 체험 다 똑같은데 왜 시간과 돈을 들여 여행을 가냐 그 돈으로 여기서 더 즐겁게 지내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마다 가치관은 다르니까.
단지 나는 내가 경험하고 겪어봐야 내 안에 저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여행을 다닌다.
이 경험은 내 안에 그러니까 나라는 저장매체만 기록되는 기억이다.
여행을 통해 이곳에서의 시간과 경험을 기록하면 나는 언제든 다시 이 장소, 이 시간으로 돌아올 수 있다.
때때로 힘겨운 삶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이 기록들이 위안이 돼주고 삶을 버티게 해주는 것 같다.
6시간의 여행을 마치고 5일 만에 나는 다시 여행의 시작점 오슬로로 돌아왔다.
2022년은 종료까지 하루만을 남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