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역띠 Oct 01. 2021

오늘도 한 그릇 잘 먹었습니다

_든든한 한국인의 소울푸드, 국밥에 대한 단상







어린 시절 맛있는 걸 사주시겠다던 아버지를 따라 재래시장 한구석에 위치한 허름한 국밥집*을 방문한 이후로 나는 라면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돼지국밥으로 바뀌었다. 국밥집 특유의 그 구수한 냄새와 익숙한 분위기가 좋다. 얼큰하고 뜨끈한 국밥을 먹으면 한 끼 든든한 식사와 함께 아버지와 함께 나누었던 따뜻한 추억도 같이 먹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나는 종종 별 이유 없이 국밥이 먹고 싶어진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국밥이 간절히 먹고 싶어지는 그런 날.

* 나중에 동생을 통해 알게 된 건데 그 국밥집은 여전히 그때 그 자리에서 영업 중이라 한다.





점심시간을 기다려 몰래 동료들의 눈을 피해 직장 근처 순댓국집을 찾았다. 주문을 하고 조금 있자 밑반찬이 나오고, 공기밥이 나왔다. 적당한 허기로 메인 요리를 기다리는 시간마저도 행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보글보글 뚝배기 한가득 순댓국이 나왔다. 후후 불어 맛본 첫 숟갈은 약간 심심한 듯 그런 대로 좋았다.


본격적인 식사를 위해 자세를 고쳐 잡았다. 다진 양념 풀고, 새우젓 넣고, 송송 썰어 둔 청양고추까지 취향에 맞게 넣고 나니 비로소 내 입맛에 딱 맞는 순댓국이 완성됐다. 본격적인 식사를 시작하고, 순식간에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속이 풀린다. 훌륭한 해장이었다. 든든하게 한 끼 해치우는 데에는 역시 순댓국만 한 것이 없다. 하긴 순댓국뿐이겠는가. 모든 국밥은 든든한 한 끼 식사로 부족함이 없다. 가히 한국인의 소울푸드라 할 만하다.


한 뚝배기 하고 가실래예?






국밥은 참 특이한 음식이다. 한국인이라면 대체로 국밥을 좋아하지만,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선 국밥을 보기 어렵다. 상견례라든가 소개팅 메뉴로 순댓국을 고르는 일이 없는 것처럼. 그러나 기업 총수도, 국가 원수도 소주 한 잔 곁들이며 한 그릇 뚝딱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 국밥이다. 때와 장소는 가릴지 모르지만, 국밥을 즐김에 지위고하는 없다. 그런 점에서 국밥은 참 특이한 음식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국밥은 역시 서민들의 음식이다. 가난한 학생 시절,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 세 장만 있으면 배불리 먹을 수 있던 것이 국밥이었다. 어떤 때엔 정말 돈이 없어 다섯이 가 국밥 네 그릇을 시켰는데, 인심 좋은 주인아주머니께서 한 그릇 더 내어주시며 돈 안 받을 테니 모자라면 더 먹으라시던 장면이 내가 기억하는 국밥의 이미지이다. 저렴하지만 든든하고, 투박하지만 따뜻한 것.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국밥의 모습이다.


국밥은 시간에 쫓기던 떠돌이 상인(보부상)들을 위해 개량된 음식이다. 저렴한 가격에 얼른 한 그릇 해치우고 일어나기에 꼭 알맞은 생계 맞춤형 식사였다. 떠돌이 상인들에겐 차분히 엉덩이 붙이고 앉아 느긋하게 밥 한 그릇 먹을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매서운 추위와 무더위에도 장이 열리는 곳을 찾아 전국 각지를 떠돌 수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따끈한 국물에 밥 한 공기 뚝딱 말아먹는 국밥은 간편하면서도 먼 길 떠나기 전 더없이 든든한 한 끼였을 것이다.


국밥은 소주와도 잘 어울린다. 소주를 마시면 얼큰한 국물이 반드시 생각나게 마련인데, 고된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노동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가슴속 울분을 한 잔 술로 달랬다. 그때 한 잔 술과 함께한 음식이 바로 국밥이다. 강도 높은 노동 직후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국밥은 좋은 식사 거리였고, 한 잔 걸치기에 어느 무엇보다도 잘 어울리는 안줏거리였다. 소주 한 잔에 뜨끈한 국물까지 깔끔하게 비우고 나면 삶의 그 어떤 고민도, 아픔도 깨끗하게 씻겨 나가는 듯했다. 배도 부르지만 먼저 맘부터 부르다. 그래서인지 국밥은 다른 어떤 음식보다도 더욱 든든하고 흡족하다. 이렇듯 국밥은 고단한 민중들이 기운을 되찾고 다시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준 힘의 근원이자,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서민들의 곁에서 든든하게 한 끼 식사를 담당했던 국밥. 국밥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뽀얀 국밥에 담긴 서민들의 삶과 애환에는 토를 달 수 없다. 국민 소설 중 하나인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 가난한 인력거꾼인 김 첨지의 아내는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수많은 음식 중 하필 설렁탕이 먹고 싶다 말한다. 오죽하면 설렁탕이었을까. 흔하면서도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을 녹여내기에는 이만한 음식이 없다는 걸 작가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는지.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자신의 선거 유세 영상에 국밥집을 등장시켜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부터, 2021년 윤석열 후보까지 꾸준히 국밥 모티프가 애용되는 것을 보면 한국인에게 국밥이 갖는 상징성을 그들도 잘 이해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선거철만 되면 빤질나게 국밥집을 드나드는 모습을 보면서, 맑은 국물처럼 그 빤하고 투명한 의중에 씁쓸해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전 국민의 공감대를 얻어내는 데에 국밥만 한 음식이 없다는 것. 특히 서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 국밥만 한 소재도 드물다는 것만큼은 몇몇 ‘꾼’들의 행보를 통해서 잘 보여지고 있는 듯하다.


2012년 대선 후보 당시 MB 선거 유세 영상 중,







나는 종종 아무 이유 없이 국밥이 먹고 싶다. 특히 요즘같이 속이 쓰린 날엔 뜨끈한 국밥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얼큰한 국물을 들이켜다 보면 온갖 쓰라림으로 고통받던 내장이 확 풀어짐과 동시에 마음 속 묵은 생각과 찌꺼기들까지도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는 듯하다. 오랜 세월 사람들 곁에서 울고 웃으며 그들의 사연과 함께 지내 온 내공 덕에 넉넉히 우려낼 수 있는 시원스럼일 것이다.


나도 언젠간 ‘역시 …하면 그 사람이지.’, ‘그 사람이 …엔 제일이지.’와 같은 말을 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 쓰린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얼큰한 저 국밥처럼 말이다. 간절한 누군가에게 요긴한 한 끼 식사가 되어 주고 싶다. 뚝배기 한가득 푸짐하게 담겨 나오는 순댓국처럼 오랫동안 누군가의 허기를 달래주고 싶다. 당신이 뚝배기 한 그릇을 비우는 동안 맘속 응어리도 함께 비워 줄 넉넉한 품이고 싶다.


오늘도 한 그릇 자알 먹었다.

오늘 하루도 잘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



며칠 전 동료 선생님과 또 다녀왔다. :)



_with 사각사각 글쓰기모임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매일 저녁을 차려 먹기로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