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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 써 봄 Mar 15. 2024

나는 까마귀다.

어제 숙제를 하며 기억에 남는 선생님을 쓰라고 하는 란에서 지구가 이야기했다. 

나는 2학년때는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이 안 나. 3학년 4학년 때 선생님은 너무  재미있게 해 주셨는데 왜 2학년은 기억이 안 나지? 

"그럴 수도 있지"라고 답했지만 '지우고 싶은 기억이어서 그럴 거야.'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끼익"

숨을 크게 들이쉬고, 교실 안으로 한 발을 밀어 넣었다. 바닥은 매끈하고 반짝였으나, 탁한 연둣빛 색상은 내 마음을 그려 놓은 듯했다.


총회날을 기다리기까지 그 시간이 지나면 속이 후련해 질지, 아니면 더욱 상처를 받게 될지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다잡느라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시작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감싸 쥐느라, 옷깃을 한번 더 여미고 지구의 책상에 앉았다. 정신줄을 붙잡으려 애썼지만, 막상 그녀의 얼굴을 보니, 원망의 마음이 밀려왔다. 고개를 숙이는 편이 나았다.


가장 중요했던 쟁점인, 가림막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한 분이 뒤편에 쌓여 있는 가림막을 가져와 울분을 터뜨렸다. 중간중간 찢기고 연필로 구멍 난 가림막은 아이들의 학교 생활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가림막을 왜 쓰게 되었는가에 대해 공격적인 질문을 하자 당황한듯한 담임은  지구의 이름을 이야기한다.


"지구가 자리를 이탈해서 다른 아이들의 집중력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막상 지구의 이름을 이렇게 듣게 되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교사로서  최소한의 아이 보호조차 없는가. 공공연히 부모님들께서 지구로 인한 일이라는 것을 전해 들었다고 해도 이 자리에서 직접 아이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옳은 처사인가 순간적으로 수십 가지의 생각이 스쳐나가며 이어나갈 이야기를 기다렸다.


다른 분들이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 보이자, 담임은 갑자기 교탁으로 돌아가더니 의자에 있던 점퍼를  꺼내 들었다. 당황한 기색의 엄마들의 얼굴을 보며 담임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지구가 나는 까마귀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뛰어다녔습니다. "


점퍼에 있는 후드를 머리에 걸치고는 "나는 까마귀다!"를 외치며 분단 사이를 뛰는 담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짧은 시간이 슬로 모션처럼 선명하게 내 눈앞에 펼쳐지며, 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내 아이의 치부를 흉내 내는 누군가를 지켜보는 것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모멸감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머릿속으로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미 아이는 잘 못을 했고, 그 책임은 나에게 있다. 우리 아이 때문에 다른 아이들은 학습권을 침해당했다. 아동학대 검색을 통해 알게 된 학습권은 이렇게 유용하게 쓰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구 엄마입니다. 지구가 다른 아이들의 학습을 방해했고, 제가 그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여러 부모님들과 2반 친구들에게 사과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서, 한마디 한마디 이어가기 쉽지 않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저 멀리 교실 뒤 편에서 지켜보던 교감이 달려 나와, 왜 이러시냐고 나를 자리에 앉혔다.


옆자리 네모 엄마가 내 어깨를 감싸 쥐었고, 이 자리에 앉아 모든 고통을 감내했을 지구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모든 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담임과 위클래스 선생님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냐는 나의 말에, '어머님이 상처받을까 봐...''상담 선생님이 전문 가니까 대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는 말은 나를 더욱 아연실색하게 했다.


더 이상 실망할 것도 없었지만 어떠한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상황에 절망감은 더 심해졌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부모니까 아이를 지켜야 했다.


총회는 금요일, 그 후 돌아온 월요일. 아이는 드디어 병원에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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