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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형 Jun 28. 2022

_간이역과 폐철선-2

: 네번째이야기.




2009년, 22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솔직히 아깝다. 한편으로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인지도 잘 모르겠다. 내 주변의 많은 어른들에게 조언을 구할 때면 인생은 현실이고 현실은 냉정하다고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나는 그들이 살아온 삶의 과정을 들으면서 포기해야할 것들과 선택해야할 것들에 대한 결정에 충분히 공감하고 존중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순순히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만큼 삶의 무게를 견뎌보지는 않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생각했던 것 또는 기대했던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내가하면 그들과는 다르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 역시 그들처럼 쉽게 실망하고, 좌절하며, 또 힘들어해왔다는 점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냉혹한 현실의 칼날에 긁히고 베이기를 반복하다보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즐거움보다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져서 결국에는 현실에 안주하는 그저 그런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현실’은 나에게 주어진 곳이다. 이곳을 벗어날 방법 따위는 없으며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곳이다. ‘기대’는 내가 생각해오던 것이다. 나만의 것이다. 어느 쪽이든 ‘현실’과 ‘기대’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외면하고 포기하는 것은 결국 어린아이들이 반찬 투정하는 것과 다를 게 없는 것 아닐까. 비록 기대했던 것이 아닐지라도 그것과 마주하고 부딪히면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내고, 또 만들어 나가는 것이 옳은 방향이 아닐까. 내일의 도전이 무서워 과거의 답습을 반복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기회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하는 것 아닐까. 궁극적으로는 행복, 즉 즐거움이라는 감정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두려움의 반대말이 아닌 두려움을 지배하는 단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작년 초에 전국 해안선 순회를 목표로 자전거 여행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3주 정도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짐만을 꾸린 배낭을 메고 한손에는 앞으로의 일정이 적혀있는 종이 지도를 나풀거리며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 내가 살고 있던 오이도를 기점으로 해안선을 따라 서해와 남해, 그리고 동해안을 지나 다시 강원도의 거대한 산맥들을 넘어 집으로 돌아오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내가 이러한 여행을 계획한 이유는 <INTO THE WILD>같은 로드무비의 영향도 물론 있었겠지만 단순히 그동안 내게 익숙했던 공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욕망이 더 컸다. 아득한 수평선을 따라 한참을 달리면 가끔씩 비릿한 바다냄새도 풍겨오고, 한적한 포구 옆을 지나칠 때면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적당한 해안가에 자리를 잡고 누워 저 멀리서 감실거리는 고깃배나 구경하며 한바탕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상상, 그 상상은 나로 하여금 도저히 그 길 위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어리고 미숙했던 내게 한없이 냉혹했다. 나름 철저하게 준비했던 일정은 중간에 길을 잃어버리면서 엉망이 되었고, 그 이후로 나는 매일 저녁마다 적당한 숙소를 찾기 위해 낯선 도시의 밤거리를 헤매어야만했다. 광활한 대지를 가르며 신나게 달려 나갈 줄 알았던 수많은 길들은 사실 굽이치는 산들을 극복하기 위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연속이었다. 그 길의 한가운데서 나는 이번 오르막길이 마지막일거라는 얄팍한 희망으로 힘겹게 언덕을 넘어내었지만 그 앞에서 늘 나를 기다리던 것은 더욱 높은 오르막길이었다. 더욱이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해안도로라고 해서 정말 해안에 접해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실제로 내가 지나쳐온 대부분의 풍경은 이름 모를 산을 배경으로 잔뜩 우거진 잡목들과 도로를 따라 끝없이 펼쳐져있는 논밭들, 그리고 전원적인 풍경 뒤에 감춰져있었던 농가들의 너저분한 모습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나는 처음에 계획했던 여행일정을 끝까지 완주하지도 못했는데 그 이유는 여행도중 자전거를 도둑맞았기 때문이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어젯밤 꽁꽁 묶어놓았던 자전거가 마술쇼처럼 사라져있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의 황당함이란, 자전거 거치대 앞에서 이럴 리가 없다며 혼잣말을 되뇌고 당연히 내가 어떤 착각을 했을 거라며 눈앞에 펼쳐진 진실을 믿지 않았던 그 순간, 결국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번 여행을 이렇게 끝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 솟구치는 허망함에 좌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발걸음이 의외로 가벼웠던 기억들.


   그 이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는 우선 전공을 바꿨다. 애초에 입시성적에 맞춰서 입학한 학교였기에 미련은 없었다. 그동안 다녔던 1년 반이라는 시간을 생각하면 당연히 아까웠지만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날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과 잘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고, 결론을 내는 데는 생각보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니던 학교에는 자퇴서를 제출했다. 동시에 입시시험을 다시 치렀다. 그렇게 나는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학교를 같이 다니던 친구들은 별다른 말없이 홀연히 사라졌다가 모든 것을 바꾸고 나타낸 내 모습에 당황해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우리는 젊었고 같이 시간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예전처럼 밤새 술잔을 부딪치며 떠들썩하게 밤을 지새웠고 나의 변신은 그저 재미있는 이벤트가 된 듯 했다. 부모님은 내가 선택한 전공이 어찌되었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도유망한 직업군은 아니라는 점에서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그럼에도 어쨌든 내가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하여 이뤄낸 성과였기에 무한한 격려를 보내주었으며 다시 한 번 나를 지지해주었다. 인생의 두 번째 전환점(첫 번째는 13살 때 바둑을 그만두기로 결정한 것이다.)을 만들어낸 나는 아쉬운 마음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올해 첫 학기를 보냈다. 누구에게나 소중하고 특별한 순간이었겠지만 나에게는 그 의미와 무게가 조금 더 무거웠던 시간들이었다. 낯선 것들로 가득했고  나는 있는 모든 게 쉽지 않았지만 나는 있는 힘껏 부딪혔다.


   짙푸른 하늘 아래 농익은 단풍이 산허리를 감싸 안을 때쯤 나의 입대날짜가 정해졌다. 내년 2월 달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날짜를 통보받자 마치 시한부인생이 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달려왔던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졌고 동시에 하루빨리 새로운 무언가를 해내야겠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나의 갈증을 달래줄 무언가를 찾아 헤매던 그때 우연히 눈에 들어온 책이 한권 있었다.

 

 「간이역 여행」
   간이역에는 추억과 그림, 소박하지만 정겨운 풍경
   그리고 즐거움이 있다   


   평소라면 그냥 스쳐지나갈 평범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간이역이라는 단어가 주는 알 수 없는 울림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느낌의 음악을 들어본 기분이었다. 책의 첫 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책에 등장하는 ‘간이역’은 사전적 정의와 여행자의 시각에서 본
 ‘한적한 마을 외딴 역’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한때는 지역의 자랑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역사는 끊임없이 몰려드는 화물과 사람들로 우글거렸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손길이 역 이곳저곳에 닿기 시작했다. 이정표를 나타내는 팻말부터 시작해서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한 벤치들이 곳곳에 생겨났다. 삭막했던 역사의 빈 공간을 채워줄 커다란 나무들이 심어졌고 그 아래에는 언제부턴가 자리를 꿰차고 앉은 커다란 조경석과 관목들이 계절마다 새로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역사의 풍경은 그들만의 아름다움으로 성숙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과는 상관없이 시대는 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한 세대를 채 넘기지 못하고 시절을 풍미했던 산업들은 과거의 영광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쇠퇴해갔다. 지역경제의 근간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이 떠나간 빈자리는 다시 채워지지 않았고 이름 모를 잡초만이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목적지를 잃어버린 열차들이 하나둘 선로를 떠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역을 거쳐 가는 기차도, 머무르려는 사람도 남아있지 않았다.

   과거와 현대의 틈 사이에는 결국 간이역이라는 낭만적인 이름만이 우두커니 남았다. 나는 그 틈 사이가 궁금해졌다. 그곳에는 이제 무엇이 남아있을까. 흔히 향수라고 불리는 그 시절 그 사람들의 낭만적인 흔적들일까, 그 흔적들은 여전히 아름다울까 혹은 정말로 아름다운 것일까, 현대라는 이름의 오늘을 살아가며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내가 그 틈 사이에서 어떤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빛이 바랜 역사의 머리에는 하얀색 페인트를 두텁게 칠한 나무판 위로 먹색을 띤 역명이 정갈하게 쓰여 있습니다. 글자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글자꼴 형태의 비례가 인상적입니다. 플랫폼을 지나 역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보행자를 위해 선로 사이에 설치된 새까만 침목에서 이곳의 오래된 시간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잠시 자리에 서서 그 무게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낡고 오래된 것, 그들이 그동안 짊어졌던 그 무게에 대해서 이제는 덜어주어야 할지 아니면 기념해야할지,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한 저는 일단 침목을 밟지 않고 한걸음에 크게 뛰어넘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한 번 그 무게가 갖는 의미와 마주친다면 아마도 ‘지금의 나’와는 다를 ‘미래의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곧게 뻗어 있는 점자블록을 따라 걸으면 투명한 유리문 뒤로 반대편 풍경이 보입니다. 언제나 활짝 열려있는 문이지만 왠지 그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합니다. 이곳은 무인역입니다. 승무원이 없는 자그마한 역사에는 무인역이라는 안내문과 함께 폐쇄된 옛 창구와 화장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합실 안쪽에는 하얀 먼지가 뽀얗게 앉아있는 의자가 놓여있고 그 위로는 색이 바랜 풍경사진이 체리색 액자틀 안에 고이 잠들어있습니다. 이에 괜스레 발소리를 죽이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와 봅니다.

   거리에는 가을을 담은 노란빛 은행나무만이 저를 반겨주고 있었습니다. 이 주변에는 지역민을 제외하면 아무도 오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흔한 식당하나 없는 곳입니다. 조금 더 걷다보니 건널목이 하나 보이고 그 반대편으로 오랜 세월의 때가 잔뜩 묻어있는 간판이 보입니다. 가까이서 보니 역전 상회라는 오래된 낱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반쯤 열려있는 문 안에는 역시나 아무도 없는 듯합니다. 단조로운 일상을 묵묵히 꾸려나가고 있는 이곳, 이곳은 바로 간이역 갈촌역 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다음 열차가 오기까지 한 시간 반이라는 시간을 부여 받았습니다.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할까요? 


   주변을 배회하다가 다시 갈촌역사로 돌아왔습니다. 유리문에 붙어있는 안내문을 자세히 읽어봅니다. 하루 평균 이용객이 6명밖에 되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직원을 배치할 수 없다고 적혀있습니다. 아까 오전에 순천역에서 표를 끊을 때 역무원이 처음 들어보는 역이라는 표정을 지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인적이 드물어서 그런지 바깥과 달리 공기마저 차갑게 느껴집니다. 심지어 이곳저곳 펼쳐져 있는 거미줄과 죽은 체로 굳어버린 곤충들 때문에 감옥과 같은 느낌마저 들곤 합니다. 음산한 역사와는 달리 창밖의 풍경은 한가하기 그지없습니다. 유리문을 열고 다시 플랫폼으로 나오니 오후의 햇살을 담뿍 머금은 산들바람이 한달음에 달려와 쓸쓸해진 내 마음을 달래줍니다.

   플랫폼 위에 서서 주위를 살펴보니 이곳에는 벤치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벤치는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짝이 있으니까요, 서로 등을 맞대고 선 이들은 그냥 하나가 아니라 두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벤치에 자리를 잡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여기서부터 20미터쯤 떨어진 곳에 "정지"라고 쓰인 표지판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세상이 멈춰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아니, 실제로 가만히 멈춰 있습니다. 시간은 흐르지만 눈앞의 세상은 표지판이 지시하는 대로 가만히 정지해 있습니다.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듭니다. 어디한번 나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봅니다. 1분, 2분, 3분, 5분……. 이렇게 계속 멈춰 있으면 내 삶도 잠시 멈출 수 있을까요? 단, 5분일지라도 시간의 흐름을 멈출 수 있을까요? 그렇게 10여분쯤 지났을까, 이런, 어디선가 벌이 달려와 앵앵거리는 바람에 놀라서 움직여버렸습니다. 그래도 10분, 전 제 인생의 10분을 멈추었습니다. 만약 저랑 동시간대에 태어난 사람이 있다면 방금 전 10분을 멈춰 있었으므로 제가 동생이 되는 셈입니다. 생각보다 재미있군요. 저는 시간을 거스른 최초의 사람입니다.

   한 시간이 넘게 지나서야 기차가 들어오면서 이곳의 정지된 화면을 깨뜨립니다. 반대편 기차입니다. 이번에는 기차에서 무려 5명이나 되는 사람이 내렸습니다. 저까지 포함해서 벌써 6명이나 오고갔으니 오늘은 특별한 하루인 듯합니다. 반대편 열차가 떠나면서 다시 시간이 멈추었고 저는 다시 한 번 혼자가 되었습니다. 곧 있으면 내가 탈 기차가 도착하면서 다시 시간이 흘러가겠지만, 그 이후에는 또 다시 시간이 멈추고 덩그러니 빈 벤치만 적적하게 남아있겠지요. 어쩌면 이곳은 아직 20세기 일지도 모릅니다.   200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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