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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형 Jun 28. 2022

_간이역과 폐철선-1

: 네번째이야기.





   나는 국내여행을 좋아한다. 금전적인 부담이 적고 마음이 동할 때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었기에 집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에 첫 발걸음을 내딛었던 스무 살의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낯선 곳을 향해 떠났다. 수많은 버스와 기차에 몸을 실었고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한 거리를 거닐었으며 또 다시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서 늘 무언가를 기다리곤 했다.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들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소한 기억들과 단편적 인상들이 혼재되어 있는데 그중 나의 가슴을 가장 설레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기차여행에 대한 어떤 환상이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나로서는 늘 기차와 버스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 주로 ‘언제’, ‘어디를’ 가느냐에 따라서 그 승부가 갈리겠지만 언제부턴가 승자는 늘 기차가 되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버스터미널은 전국 어디를 가도 다 비슷하게 생겼다. 100미터 밖에서도 보일만큼 커다랗게 쓰여 있는 “○○버스터미널”이라는 간판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또다시 전국 각지의 지명이 적혀있는 간판들이 모두 다른 글꼴과 다른 크기와 다른 색상으로 사방팔방에 붙어있다. 그것은 아마도 민간기업인 버스운송회사들이 독자적으로 노선을 운영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나는 그 모습이 다채로워 보인다기보다는 오히려 산만하고 조야하게 느껴졌다. 이러한 인상은 대합실의 분위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넓은 공간 한가운데에서 쉴 틈 없이 흘러나오는 TV소리와 정리되지 않은 상가의 가판대들, 그리고 사방에서 풍겨오는 온갖 음식냄새들은 나로 하여금 도저히 이곳에 머물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얼른 발권을 마치고 정류장이 있는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오면 늘 담배를 태우는 사람들과 마주해야 했고 바닥에는 쓰레기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져있었다. 수시로 들락날락하는 버스들은 끊임없이 먼지와 소음들을 만들어 냈고 결국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체 방황할 뿐이었다.

   그러나 기차역은 다르다. 주요도시의 커다란 기차역은 조금 예외겠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했던 작은 역들은 대부분  박공지붕을 머리에 이고 그 이마 위에는 역사의 이름을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그 모습이 조금은 촌스러워 보일 때도 있지만 어차피 교외에 위치한 작은 역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나름의 개성과 분위기가 녹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요즘은 주로 각 지역의 캐릭터를 이용해서 아기자기하게 역사를 꾸미는 경우도 생겼지만 대게는 승객들이 필요로 하는 시설들만 간단히 구비해놓고 소소하게 방문객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색이 바랜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시끄러운 거리의 소음을 대신하여 나부끼는 나뭇가지들 사이로 청량한 바람이 솨솨 소리를 내며 불어오고, 앞 다투어 자신을 뽐내기 바빴던 현란한 간판들의 어수선함과는 달리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정적인 풍경이 화려한 계절의 변화를 담백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나는 특별히 기억에 남지 않을 그 흔한 풍경이 좋았고 시간이 지나 그날의 기억이 잊혀질 때쯤이면 다시 한 번 그러한 공간을 찾아 떠나곤 했다.


   이제는 제법 눈치를 챘겠지만 그렇게 나의 관심이 닿았던 곳은 바로 간이역이다. 하루에 기차가 몇 대 들어오지 않는 간이역은 대게 무인역이거나 혹은 소수의 역무원만이 상주해있었다. 이용객이 적은만큼 대합실의 크기는 늘 작은 편이었고, 내가 경험했던 어떤 역에는(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작은 방 한 칸 정도 되는 공간에 오래된 나무벤치 하나만이 단출하게 놓여 있는 곳도 있었다. 역사 밖으로 나오면 쭉 뻗어있는 철로 위로 산과 강, 마을과 논밭이 어우러진 한가로운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오랫동안 잘 가꾸어진 역사에는 지역 특성에 맞는 향토수종들이 식재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한 곳은 기차역이라는 고유의 기능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몸과 마음을 즐거이 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이번에 내가 글로 남기고자하는 것은 이러한 기억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난 10여년의 시간동안 나는 꽤 많은 기차역을 다녔다. 그중에는 기억에 남지 못하고 스쳐지나간 역들이 더 많았겠지만, 여행의 목적지로써 다녀갔던 역들도 있었고 때로는 우연히 그 역에 머물게 되면서 생각보다 좋았거나 혹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나’의 모습으로 가득하다. 나만의 이상을 찾기 위해 일상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관찰하고 상상했던 날들, 그렇게 발견해낸 모든 새로운 것들에 경탄하던 순간과 사라지고 버려진 것들에 실망하며 고개를 떨구고는 조용히 뒤돌아서던 순간들, 그 모든 순간들을 기억하며 좌절과 희망 사이 그 어딘가에서 현실과의 타협점에 대해 고민했던 시간들까지.


   돌이켜보면 그것은 환상이었다. 내가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고, 바라보는 객쩍은 낭만.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환상적이었다. 내가 미쳐 알고 있지 못했던 것들로부터 새로움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바라볼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은 위대하지 못한 내가 그럼에도 오늘 하루를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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