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형 Jul 24. 2022

_우연히-1

: 여덟번째이야기




1.

   여행지에서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물론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사용이 자유롭지 않았던 과거와 비교하면 상황이 훨씬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길을 잃어버리곤 한다. 여러 번의 여행을 통해 나름 길을 잘 찾는다고 자부하고 있음에도 내가 여전히 길 위에서 헤매는 이유는 직접 경험하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지방의 버스노선 시스템 때문이다.

   대도시와 달리 인구밀도가 낮은 소도시에서는 똑같은 번호판을 달고 있는 버스들이 시간대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경로로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경유해야 할 지역은 많지만 노선을 다양화하는 데 한계가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같은 노선번호를 단 버스가 시간대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코스로 다니는 것이다. 이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버스번호만 같다고 해서 탑승했다가는 딸랑 표지판 하나 있는 이름 모를 정류장에서 언제 올지 모를 버스를 기다리며 반나절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철저한 계획이 필요하다. 나의 경우, 먼저 가고 싶은 곳들을 쭉 나열한다. 그리고는 시간대별로 존재하는 다양한 버스노선들을 퍼즐 맞추듯 비교해가며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을 결정한다. 그러다 보면 동선을 최소화하기 위해 분 단위의 일정이 계획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모든 것을 계획하고 또 계획한 대로만 다닐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여행의 묘미는 계획에서 벗어난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면서 그동안 반복적인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삶의 재미를 발견해 나가는 것인데 말이다. 더욱이 개인적으로 여행을 하는 동안만큼은 주어진 시간을 내 마음대로 흥청망청 탕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성과 합리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옭아맸던 매일의 일상들과는 달리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자신에게 너그럽고 관대해지더라도 그저 즐거울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시간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않은 채로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오늘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나 홀로 덩그러니 길 위에 남겨져 있는 상황을 마주해야만 하는 날이 온다. 계획대로라면 이번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했어야할 버스는 당연히 좌회전하지 않았고, 그것은 내 계획이 틀렸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도 내리지 않을 것 같은 곳에서 홀로 내릴 때의 기분이라는 것이 있다. 그럴때면 저 사람이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고 내리는걸까 라는 주변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시선이나 의문스러운 표정을 볼 때면 마치 나 자신이 낯선 세계에 홀로 떨어진 이방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며 사실 버스 안의 사람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의 예상 경로에서 벗어난 버스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정류장이 있었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그곳에 혼자 내려야 했다. 그 순간에는 다양한 감정이 교차했지만 막상 아무렇지 않게 떠나가는 버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오히려 마음은 더 홀가분해졌다. 특히 여기처럼 주변에 아무것도 없이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라면 뭔가 상쾌한 기분이 들면서 지금부터 잘해보자라는 긍정적인 의욕이 샘솟는다.


   지도를 통해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을 확인한 후 배낭을 둘러메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1차선 양방향 도로에는 당연히 인도도 없고 사람도 없다. 크고 작은 자동차들은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쌩쌩 지나가고 있었고 그 옆에서 나 홀로 느릿느릿 걷고 있다. 정거장에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허름한 버스표지판만이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그렇게 떠나가는 나의 뒷모습을 담담히 지켜봐 주고 있었다.     

   오늘처럼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을 걸을 때면 자연스럽게 주위의 풍경에 시선이 쏠린다. 낯선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하는 풍경들은 보통 나의 일상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기에 늘 흥미롭다. 반듯하게 일구어 놓은 밭에는 검은 빛깔의 흙들 사이로 푸릇푸릇한 새싹이 돋아나 있고, 이름 없는 저수지에는 억새풀들이 각자의 섬을 이루며 바람을 따라 춤을 추고 있다. 이제 막 수확을 마친 논밭 주변에는 미쳐 실어 보내지 못한 농작물들이 굴러다니기도 하고, 커다란 자물쇠로 굳게 잠긴 용도를 알 수 없는 창고들과 거미줄이 가득한 버려진 가옥들 옆을 지날 때면 괜히 숨을 죽이고 발걸음을 재촉하기도 한다. 이러한 풍경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치 세상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동안 나의 일상을 담아내었던 세상이 소소하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익숙함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은 운이 좋게도 높다란 편백나무가 도로 양쪽으로 가득한 길을 걷게 되었다. 쭉 뻗어있는 도로를 따라서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그 끝에는 내가 좌회전을 해야 했을 교차로가 있었다. 그 장면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문득 내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전이 공간에 들어선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차가 지나가지 않을 때면 주변 숲에서 풍겨오는 향기가 적막한 도로 위로 차분히 가라앉았고 이따금씩 멀리서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에는 새들의 화려한 울음소리가 실려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면서 일정은 꼬이고 오늘 하루 걸어야 할 길은 한참은 더 늘어났다. 하지만 우연히 발견한 이 풍경 덕분인지 왠지 모르게 마음은 더 평온해진 듯싶었다.



2.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던 중 나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버스에서 홀로 내려 걸었던 그 길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편백나무 숲이 알고 보니 조림지라는 것이었다. 조림지라는 단어 자체도 낯설었지만 내가 상상으로만 알고 있던 조림지의 모습과 직접 마주했던 현실 사이의 괴리감에 나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더는 앉아있지 못하고 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그대로 뒤에 있는 침대에 몸을 눕혀야 했다.     

 

   인공의 자연에서 자연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현상을 꿰뚫어 본 진실이었을까 아니면 충동적인 감상에서 기인한 허상이었을까. 어쩌면 나는 여전히 어리고 미숙하여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해서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는 점이다. 하늘을 향해 기다랗게 뻗어있던 편백나무의 수직성이 드러나는 풍경들과 그렇게 만들어진 어둡고 습습한 그림자를 견뎌내며 온몸으로 대지를 딛고 일어선 키 작은 관목들과 어린 풀잎들의 처절한 몸 사위들. 그것은 생에 대한 고고한 의지였으며 동시에 좀 더 근원적이고 원시적인 형태의 강렬한 무언가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자연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의 본질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조림지에 대해 좀 더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다 놀라운 사실을 하나 더 발견했다. 카카오 지도에서는 이 지역에 대한 항공뷰를 2008년부터 최근까지 주기적으로 제공하고 있었는데 2008년부터 2014년까지는 지금보다 훨씬 넓은 지역이 편백나무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다 2017년 사진에서는 조림지의 1/3 정도의 나무가 지도상에서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으며 2019년이 되어서는 추가로 벌목사업이 진행되었는지 전체의 절반 정도가 사라지면서 황량한 대지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세히 살펴보니 주변에 다른 조림지들도 있는 것인지 군데군데 꽤 많은 부분이 잘려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온 내게 이러한 풍경은 결코 낯선 것은 아니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도시의 물리적인 요소들에 대해 자본의 논리가 개입하기 시작한다면 그 순간부터 모든 요소는 숫자로 치환된다. 그렇게 감정이 배제된 철저한 계산과정을 거치고 나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단순명료한 결과가 도출된다. 그 계산서는 수많은 사람을 울고 웃게 하겠지만 내 경험상 대게의 경우 웃는 자들에 의해 많은 것들이 결정되어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해결방법에 대해서 나는 어릴 적부터 항상 의문이었다. 우선 정량화할 수 없는 가치를 그럴듯하게 정량화하여 논하려고 한다는 게 가장 큰 모순처럼 여겨졌고 심지어 그 과정을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어느 정도 큰 그림을 그려놓고 그 안에서 짜 맞추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러한 일들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과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고 더욱이 이러한 논리를 대체할만한 더 좋을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그러다 오늘 그 냉혹한 현실이 사실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그동안 내가 간과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일들이 비단 인간들의 터전인 도시에서만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조림지라는 공간 자체가 다양한 목적에 의해 인공적으로 조성된 자연이기에 각자의 목적에 맞게 운용하면 될 일이지 내가 옳고 그름을 논할 일은 아니다. 더욱이 내가 그곳에서 보았던 편백나무들은 주로 가구나 생활용품에 많이 이용되는 자원이며 평소에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만큼 불편하게 느낄만한 여지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이질적이라고 느꼈던 이유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곳에서 경험하고 발견했던 것들이 조림지 본래의 목적과 대치되는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라는 새로운 가치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들과는 별개로 이곳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누군가가 아주 짧은 시간에 만들어 낸 작은 서명 하나만으로도 마치 어느 잔혹한 신화 속의 신들이 수많은 생명들의 운명을 손가락 하나로 좌지우지하듯 이곳 역시 하루아침에 새로운 역사로 탈바꿈되고 있었다.



3.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다. 모든 경로가 예약된 자동주행 자동차에 탑승하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편한 복장으로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 하루 여기저기 쏘다니며 내게 주어진 의무를 다함으로써 비로소 얻어낸 지금의 이 값진 자유로움이 한편으로는 무한히 가볍게 느껴진다. 많은 생각과 다양한 감정들이 무수히 교차했던 불과 몇 시간 전의 기억들이 먼 과거의 일처럼 희미하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멀어진 그 거리만큼 오늘 하루 남아있는 시간도 천천히 흐른다. 그러다 문득 아주 사소한 트리거(대개는 우리집 고양이들에 의해 발생한다)로 인해 현실을 자각한다. 수많은 핑계를 둘러대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내 모습.


   언제나 귀엽지만, 지금은 나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는 고양이들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한다. 후줄근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 어둠 속에서는 결국 다 똑같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그렇게 밖을 나선다. 그리고는 동네 사람들만이 왕래하는 한적한 골목길을 골라서 천천히 걷는다. 무더운 여름밤의 한적함 사이로 대낮의 매미들처럼 왱하는 실외기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 옆을 지나칠 때면 문득 날이 더운 것인지 아니면 실외기에서 내뿜는 열기로 인해 더운 것인지 제대로 분간하기가 어렵다. 함정처럼 숨어있는 실외기들을 피해서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재건축단지로 오게 되었다. 한때 내가 러닝 코스로 삼았던 이 지역은 2년여 전만 해도 크고 작은 건물들로 가득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고 은백색의 매끈한 펜스만이 거대한 성벽처럼 길을 따라 굳건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이제는 감히 그 안을 넘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커다란 가로수들만이 유일한 듯했다.

   펜스를 따라 걷다 보니 철거된 두 단지의 사잇길을 걷게 되었다. 본래 양쪽에 다양한 종류의 건물과 나무들이 있던 자리인데 이제는 2m 남짓한 키 작은 펜스들이 군병들처럼 서로 마주 보며 서 있었다. 그 사이에서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던 나는 문득 내 머리 위로 도심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커다란 하늘이 날것 그대로 덩그러니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만이 이곳의 하늘을 밝힐 뿐 거리의 소음이나 여기저기 솟아있는 건물들의 실루엣은 물론 그 흔한 나무 한 그루도 주변에 없었다. 그렇게 내 앞에 줄지어 서 있는 키 작은 펜스들은 하나의 기다란 수평선을 만들어내었고 그 너머에는 달빛들 사이로 도톰한 구름이 여름밤의 하늘을 자유롭게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이 재개발 단지가 갖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잊어버린 체 그 자리에 넋 놓고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철거가 완료될 때까지 재개발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던 세입자들의 울부짖음과 이곳에서 오랫동안 같이 살아왔으나 누구에게도 배려받지 못한 채 무자비하게 쫓겨나야 했던 새와 나무와 고양이들, 나는 불과 2년 만에 사라져버린 이 많은 것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음에도 지금 발견한 이 풍경의 아름다움을 감탄하며 서 있던 것이었다. 지난날의 추악했던 모습이 지금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은 이제 곧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면 금세 사라질 풍경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 이 한순간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이 장소가 갖고 있는 자본의 논리가 행했던 부조리와 비상식을 잠시 망각했던 나의 행동은 비겁하고 어리석은 행동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들었다.







이전 18화 _카페 산노루-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