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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형 Aug 08. 2022

_우연히-2

: 여덟번째이야기




4. 

   누군가가 내게 인생에 있어 최고의 영화를 하나 꼽아보라고 물어볼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 항상 떠올랐던 영화 중 하나는 매트릭스였다. 지금까지 진짜라고 믿어왔던 세상은 사실 완전히 연출된 데이터 속의 세상이었고 그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실존하는 세상이 존재함을 지각했을 때 주인공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하나는 방금 깨달은 모든 진실을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 다른 하나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며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고민으로 고통스럽고 치열한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것.


   제3자의 입장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쩌면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힘들더라도 진실과 마주하는 삶을 살아가는 게 도덕적으로 옳은 판단이며 그 선택으로 인해 감내하고 이겨내야 할 수많은 시련들은 주인공이 당연히 짊어져야 할 무게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 질문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 주어진다면 어떨까. 당연히 영화처럼 극단적인 형태의 선택지는 아니겠지만 그 무게는 영화 속 주인공이 짊어지고 있는 것보다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결과를 내가 감당해야만 한다는 부담감과 어쩌면 지금까지 쌓아왔던 삶의 소중한 것들이 훼손되거나 부정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들, 나는 앞으로 다가올 이 불확실하고 두려운 모든 시간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신념을 잃어버리지 않고 진실과 마주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 신념이라는 것이 사실은 제도화된 사회가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믿도록 학습시킨 것이며 나 또한 그 안에서 속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이 모든 불확실한 것들을 차치하고 그저 현재 나의 삶에 만족하며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방향으로 선택을 한다면 어떨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향해 비겁하다고 손가락질할지라도 내게는 나의 삶을 지켜내는 것이 더 올바른 선택이며 오히려 위선적이지 않은 진짜 나의 모습이 아닐까. 



5.

   내가 그곳을 다시 방문한 것은 약 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정거장에는 허름한 버스표지판이 여전히 한쪽으로 기울어있었고 그 앞에는 우두커니 서서 떠나가는 버스의 뒷모습을 담담하게 바라보던 내가 있었다. 나의 시선이 닿는 많은 곳에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모습들이 오버랩 되었고 그 장면들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서로 닮아 있었다. 길가에는 새파란 하늘을 향해 한껏 솟아있는 편백나무들로 가득했고 그 아래에는 생의 의지를 놓지 않은 잡목들이 잔뜩 뒤엉켜있었다. 물론 지금의 나는 이 풍경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 당시와 똑같은 마음으로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연히 발견했던, 그래서 지나쳐야만 했던 과거의 나와는 달리 지금의 나는 오직 이 자리에 서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이 풍경이 조림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던 날, 나는 근처에 있는 산책로를 통해서 조림지 내부로 들어가는 숲길이 조성되어있다는 점을 알아냈다. 그리고 언젠가 한 번 그 숲길을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 길을 걸으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이 내가 믿어야 할 진실이고, 그래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그 고민의 끝에 선 지금, 배낭을 다시 둘러메고는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마주한 곳은 비자나무 조림지였다. 이곳은 생각보다 넓지는 않았지만, 지역민들이 직접 조성한 숲으로써 비자나무 열매를 채취하여 소득을 창출하기 위해 조성된 조림지라고 한다. 나무들이 바둑판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질서정연하게 식재되어있으며 곳곳에 나무데크나 벤치 등이 놓여 있었다. 내가 다니면서 보았던 것에 비하면 이곳의 비자나무는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다. 안내판의 설명에 의하면 비자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비교하면 생장이 아주 느린 편이라고 한다. 그래서 500년~800년생 비자나무들이 자생하고 있는 비자림과 비교하면 이곳의 풍경 자체는 오히려 평범한 편이었고 확실히 내가 많이 보았던 과수원의 느낌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자나무 특유의 납작하고 기다란 잎사귀들이 주는 생경한 풍경과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퍼지는 은은한 비자나무 향은 좋았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비자나무 조림지를 지나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이 잇달아 나왔다. 안내판은 있었지만, 이곳에 대한 정보는 명확하지 않아서 조림지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지도상, 이 주변에 조림지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어디까지가 조림지이고 어디까지가 자생하는 숲인지는 사실 구분하기 어려웠다. 종종 간벌의 흔적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숲의 관리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오래전에 진행된 대규모 간벌의 흔적인지도 알 수 없었다. 

   숲길의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20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삼나무와 편백나무들이 내 시야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높다란 나무들에 가려 하늘조차 잘 보이지 않았고 그 때문인지 나무 주변에는 키 작은 초화류들만이 가득했다. 좁은 공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길쭉한 나무들이 원근감을 지워버릴 정도로 끝없이 중첩되는 풍경에 나는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마침 가까운 차도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소음이 아니었다면 원시림의 한가운데 홀로 떨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을 것 같았다. 놀라운 마음에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숲길을 따라 걷다 보니 앞서 생각했던 조림지와 자연의 구분에 대한 고민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사방에서 흩날리는 숲 내음을 좇아 코를 킁킁거리다가, 스폿조명처럼 내리쬐는 햇빛 속에서 생동감 있게 자라나는 풀잎들을 발견할 때면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세속적인 세상과는 도저히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새로운 세상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음에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여전히 아름다웠다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순간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파란 하늘과 초록 잎들, 진갈색 나무줄기와 검은 흙색은 따스한 햇볕에 반짝이며 유려한 색채의 조화를 이루었고, 반복되는 듯하면서도 바람에 보드랍게 나부끼며 다양하게 변주하는 풀잎들의 선율감은 청명한 새소리와 묘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마치 유영을 하듯 자유로이 거닐 뿐이었다.










6. 

   어느 날이었다. 무더운 밤이었고 더위에 지친 나는 잠시 산책을 하기로 했다. 동네 골목길을 돌고 돌다 보니 어느새 재개발 단지의 사잇길에 이르렀다.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철거를 마친 이후에도 한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었는데 오늘 보니 높다란 펜스 사이에 커다란 현수막이 하나 걸려있었다. 늦은 밤이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중요한 내용일 것 같아서 시간을 내어 읽어보기로 했다. 제자리에 서서 가만히 읽어보니 그동안 멈춰있었던 공사가 이제야 본격적으로 진행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약 3주 뒤에는 이 사잇길을 폐쇄한다고 적혀있었다.     

   재개발 단지가 워낙 컸기에 이 사잇길이 폐쇄되면 주변의 사람이나 차량들이 한참을 돌아서 가야 했다. 그래도 이 길만큼은 공사가 완료될 때까지 남아있기를 바랐는데 공사의 편의성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결국, 내가 한때 러닝 코스로 삼았던 그 길들은 통째로 공사장 안에 들어가게 된 셈이었다. 그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속 아쉬움과 공허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길을 폐쇄한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사잇길의 풍경을 앞으로 볼 수 있는 날도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사실이 가벼웠던 내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오늘 하루는 날씨가 맑았는데 그래서인지 구름도 정말 잘 보였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까이에는 하트모양의 하얀 구름이 호젓이 떠다니고 있었다. 평소라면 쉬이 지나갈 길이었겠지만 오늘은 그냥 그렇게 보내게 되면 나중에 분명히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 위로 아무도 지나가지 않을 때를 기다렸다가 냉큼 사진을 찍었다.


   여전히 아름다웠다이 길을 걸을 때마다 이 풍경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사라지게 될 줄은 몰랐다. 문득 지난날 즐겁게 거닐었던 조림지가 생각났다. 그곳도 어느 날 누군가에 의해서 조용히 사라지게 되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7.

   결국, 그렇게 우연히 만난 이름 없는 풍경들은 나 같은 운 좋은 사람들에게만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그 순간을 다양한 방법으로 기록하는 것뿐이다.

   사실 나의 기록은 대단한 것은 아니어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금세 잊혀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언젠가는 누군가 우연히 접하게 된 나의 기록이 흥미롭게 읽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즐겁게 기억하는 사람들은 비록 어느 날 길을 잃고 헤매는 순간이 오더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이야기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스스로 소중하게 여기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나의 기록이 그들에게 새롭고 즐거운 기회가 되고, 그 기회가 또 다른 기록으로 남으면서 다시 한번 누군가에게 새로운 기회로 주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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