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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형 Jul 08. 2022

_카페 산노루-1

: 일곱번째이야기



 1.

   카페에 홀로 앉아있노라면 머릿속이 금세 멍해진다. 특히 오늘처럼 밖을 거닐다가 더위와 갈증에 못 이겨 카페에 들어오게 되면 먼저 시원한 메뉴를 아무거나 시켜놓은 뒤 넓고 폭신한 의자를 찾아서 털썩하고 앉아버린다. 가방을 테이블 아래에 내팽개쳐 놓고 주문한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노곤함이 몰려온다. 나는 잠시 정신을 놓은 채 창밖 풍경이나 벽에 걸려있는 그림 따위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주문했던 음료를 받아오면 허겁지겁 절반 정도를 마셔버린다. 그렇게 갈증과 더위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을 때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면서 이 공간은 어떤 분위기를 갖고 있으며 내가 마신 음료는 무슨 색을 띠고 어떤 향과 맛이 나는지 찬찬히 음미하게 된다.

   오늘 내가 온 이 카페는 사실 갑작스럽게 방문한 카페는 아니다. 이번에 제주도로 넘어오기 전 여행계획을 짜면서 기회가 되면 한 번쯤 오려고 염두에 두었던 장소이다. 다만 버스에서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고 있다가 순간 내가 내려야 할 곳을 놓쳤다는 생각에 동네 할머니를 따라서 급하게 내렸는데 알고 보니 내가 내려야할 정거장으로부터 두세 정거장 정도 먼저 내리는 바람에 계획에 없던 산책을 강제로 하게 되었다. 걸어가는 동안 ‘고사리 숲길’이라는 재미있는 올레길이 있어서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여름의 뜨거운 햇살과 차도의 먼지를 헤치고 걷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이 카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정갈하고 모던한 분위기였다. 미니멀한 가구의 배치와 상품의 디스플레이, 세련된 폰트로 인쇄된 메뉴판과 상품의 태그들은 제주도라는 이곳의 지역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잘 만들어진 좋은 상품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처음에는 제주녹차라는 지역의 특산품을 판매하면서 지역 고유의 색깔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사뭇 아쉬웠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실은 그것도 일종의 편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상품에 어울리는 좋은 디자인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지역의 특색을 반영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인 것이다. 여하튼 깔끔한 유니폼을 갖춰 입은 직원들의 친절한 응대와 함께 주문한 음료 또한 디자인에 어울리는 깔끔한 맛이었다.

   시계를 보니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는 그래도 꽤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오늘 하루 바쁜 일정을 보낸 만큼 이곳에서라도 내게 주어진 여유를 느긋하게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3분의 1쯤 남아있는 음료는 잠시 밀어두고 양팔을 팔걸이에 가볍게 얹어놓는다. 동시에 등받이에 어깨가 닿을 만큼 천천히 몸을 눕히면서 가장 편안한 각도를 찾아낸다. 그리고는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조금씩 머릿속을 비워내기 시작한다. 눈 앞에 펼쳐진 카페 안의 풍경이 바람에 살랑대는 풀잎들 마냥 한가하다.



2.

   내가 앉은 바로 옆 테이블에서는 한 여성이 귀에 이어폰을 꽂은 체 책을 보고 있었다. 나는 집중하는 일을 해야 할 때는 오히려 아무것도 듣지 않는 편인데 이렇게 음악을 들으면서 무언가에 집중하는 사람을 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이 카페에서는(아마도 의도한 것일 테지만) 차분하고 잔잔한 연주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히려 이런 음악이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음악과는 별개로 주변의 모든 소리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던 것일까. 아, 어쩌면 단지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에 집중하기 위해 평소처럼 이어폰을 끼고 자신이 즐겨듣던 음악을 듣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옆 테이블을 지나 벽 쪽에는 6명은 거뜬히 앉을 수 있는 큰 테이블이 있었다. 그 자리에는 이제 막 성년이 된 듯한 앳된 얼굴의 대학생들이 조용한 카페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며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 대해 평소에 나였다면 조금은 불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먼 곳까지 와서였을까, 한껏 유해진 마음으로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돌이켜보면 내가 지내온 스무 살 시절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때 매일 밤 자취방에서 친구들끼리 모여 술자리를 벌인 적이 있었다. 마치 야간알바를 하는 것처럼 밤새 시끄럽게 떠들다가 아침에 잠이 들곤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대문에는 옆집에서 A4용지에 직접 써서 붙인 장문의 편지가 있었다. 내용인즉슨 밤마다 너무 시끄러워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히 자중하고 사과를 해야 할 일이었겠지만 철없던 나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몇 번의 시끄러운 술자리가 있었다. 지금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 자신이 당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이 일을 부끄럽게 여기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내 삶을 냉정히 되돌아보았을 때 그 시절의 나는 자유라는 이름의 광기에 취해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이 너무 부끄러웠고, 후회되었으며 이제 다시는 그러한 짓을 하지 않는다.

   물론 누군가는 이러한 방법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릇에 물이 넘쳐야만 그릇의 크기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한 번쯤은 넘쳐봐야 깨닫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것이 누군가의 삶을 망치거나 이 사회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적당한 광기는 오히려 그 본질을 진실되게 깨닫게 한다고 믿는다. 마치 차라투스트라처럼 말이다. 

    

   아까부터 비어있던 내 앞쪽 테이블에는 어느새 새로운 사람이 통화하며 혼자 앉아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 사실을 인지한 이후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도 이 사람은 여전히 통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주문한 음료를 가져오면서도 한 손으로는 계속해서 통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몇 개의 단어들은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에는 업무상 끊기 어려운 전화인 줄 알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나는 조금 전에 내려놓은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고는 오늘 찍었던 사진들을 확인하기로 했다. 찰나의 순간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들이 작은 액정화면 안에서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에도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처럼 통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주위가 조용해졌다는 느낌이 들었고 나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내 앞의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고 테이블 위는 오히려 아까보다 더 깨끗해진 듯했다. 마치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가고 맑은 해가 떠오른 날처럼. 이상한 일이었다.



3.

   내가 여기에 처음 들어올 때는 비어있는 자리가 많지 않았다. 나는 혼자였지만 바 테이블은 의자가 불편해 보였고 결국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출입구가 보이는 테이블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자리라서 번잡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어차피 테이블들이 모두 매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으니 특별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내가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은 이후 대여섯 개의 팀들이 카운터를 들락날락할 때쯤 청금석 계열의 푸른빛이 도는 기다란 꽃무늬 원피스를 입을 한 여성이 카운터 앞에서 아까부터 서성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고르는 듯한 움직임이었는데 사실 나도 아까 선물용 녹차파우더를 구매할 때 내가 잘 모르는 종류가 많아서 꽤 고민을 했었다. 그러나 가만히 보고 있으니 무언가를 고르고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주변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 문득 매장 여기저기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벽에 걸려있는 액자에 핸드폰을 들이대며 사진을 찍고 있는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의도적으로 헝클어뜨린 머리에 도저히 다양한 표정을 지을 줄 모를 것 같은 진중한 얼굴, 린넨 소재의 흰색 셔츠를 연한 청바지 안쪽에 집어넣고 진한 갈색빛의 플랫한 구두를 신은 이 남자, 보통 여기까지 와서 이런 옷차림을 한 사람은 내 경험상 매사에 진지하고 사소한 것 하나에 쉽게 넘어가려 하지 않는 성향을 갖고 있다. 물론 당연히 팩트는 아니고 내 추측이다.

   그렇게 1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촬영을 마치고 이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오면서 나는 이들이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뒤늦게 주문을 마친 그들은 내 뒤쪽으로 지나가면서 한동안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주문한 음료가 나오자 다시 내 시야에 나타났다. 이들이 주문한 것은 단출한 두 잔의 음료였지만 당연하게도 남자는 이 중요한 순간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음료를 아무도 없는 바 테이블 위로 가져갔다. 그렇게 세팅을 마친 뒤 여기저기로 이동하여 자세를 고쳐 잡으며 다시 한번 핸드폰을 들이밀기 시작한다. 붐비지 않는 카페에서 방해하는 사람이 없으니 한 컷, 한 컷에 진심을 담는다. 그 옆에는 다시 한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서성이던 여자가 있었다. 그렇게 5분이 넘는 시간 동안 진지한 촬영을 마치고 다시 음료를 들고 자리로 돌아간다. 잠깐이었지만 원래부터 무표정한 얼굴이었는지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진에 만족하지 못한 것일까.



4.

   사실 이곳은 꽤나 외진 곳에 위치한 카페였기 때문에 내가 타야 할 버스 시간을 고려하면 이곳에 마음 놓고 오랫동안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물론 내 스스로도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혼자 카페에 오래 앉아있을 성격도 아니었다. 사실 이곳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을 계획도 없었는데 그냥 테이블에 앉자마자 왠지 지금 이 순간 뭐라도 쓰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오늘 아침 일찍 김포에서 제주도로 넘어왔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협재행 버스를 탔고 알아봐 두었던 식당과 카페에 들려 여유를 즐기기도 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날씨도 좋아서 잠시 산책을 하기도 했다. 오후에는 계획대로 미술관에 들려 전시를 관람했는데 특별히 기대했던 전시는 아니었기에 인상 깊은 전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로인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일정을 마치고 예약해둔 숙소로 넘어가려다 보니 처음에 계획했던 것보다 시간이 좀 많이 남았다. 그리고 이렇게 나는 이 자리에 앉아있게 되었다.

   코로나 여파인지 카페는 단축운영을 하고 있었고 이제는 나를 제외하면 한두 테이블밖에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다. 나도 조금 뒤에 도착할 버스를 생각하면 자리를 정리하고 떠나야 했다. 이곳에 와서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끼적였던 글을 마무리 지으려다 보니 문득 지금 이 순간이 내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펜을 놓고 오른손으로 턱을 괸 체 창밖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특별하지 않은 하루에서 무언가를 집어낸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유리창에는 이제 비가 내리는지 빗방울이 하나둘씩 묻어나기 시작했고 곧 마감준비를 해야 하는 직원들은 건물과 건물 사이를 오가며 창 프레임 안팎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이 카페는 여러 동의 작은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건물들 뒤로 엄청나게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넓은 녹차 밭이 있었다. 물론 카페의 규모를 생각하면 그곳에서 재배하는 녹차만으로 이렇게 상품화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어쨌든 여기서 관리하는 녹차 밭인 건 확실했다.)


   그렇게 10분이 넘는 시간 동안 고민해보았지만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멀리 오기는 했지만 특별하지 않은 하루, 그래도 평소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관심 두지 않았을 것들을 관찰하고, 걷지 못했던 길들을 걸었으니 그걸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비가 제법 오는지 음악 소리 뒤로 빗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오전에는 날씨가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는데 기상예보대로 비가 오기는 오는 것인가 싶었다. 우산을 미리 챙겨와서 비는 별문제가 안 되는데 내일 아침에는 태풍이 제주도에 상륙한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래, 일단 버스부터 타자.







카페 산노루_ 제주시 한경면 조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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