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쥐의 탈출극

부산으로!

by 욘킴

퇴사 후 서울을 떠나 부산에서 지내기 시작한 지 어느덧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그간 몇 차례 여행자로 방문했던 도시인 부산은 세 시간 남짓의 지루한 기차 여행, 해운대의 반짝이는 해변,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국밥이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아는 부산이라는 도시의 기호이자 전부였던 셈이지요.


하지만 살기로 작정하고 내려온 도시의 얼굴은 사뭇 다릅니다. 야트막하고 오래된 주택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있고, 그 사이로 가파른 계단이 즐비한 골목이 이어집니다. 나는 범일동, 수정동, 좌천동 골목을 다람쥐처럼 오르내리며 산책을 하고, 과일이 유난히 달고 맛있는 동네 채소 가게를 기어이 찾아내 하루의 먹거리를 해결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일단은 꽤나 야무진 생활의 궤도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실 서울이 싫다, 답답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산 지는 꽤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본격적으로 짐을 싸기까지는 한참을 우물쭈물하였습니다. 이력서를 쓸 때도, 사표를 던질 때도, 그리고 서울을 떠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도 내 주변에는 언제나 무시무시한 괴담들이 유령처럼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비전공자는 힘들다”, “나가면 고생이다”, “집은 무리해서라도 서울에 마련해야만 한다” 같은 말들 말입니다. 또, 이 나이에는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얼마를 얼마나 가져야 한다는 둥의 그런 말들 말입니다. 나는 원래도 세상 사람들의 충고를 경청하는 타입은 아닙니다만, 그런 말들이 주변을 떠돌고 있으면 몹시 거슬리곤 했습니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거슬리는 옷솔기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막상 주변의 잡음을 가지 치듯 쳐내고 보면, 세상일은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회사에는 전공자도, 비전공자도, 심지어 전공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무전공자(?)도 섞여 있었습니다. 물론 힘들거나 고생인 날도, 흔들리는 날도 있었지만, 큰일이라도 날 줄 알았던 퇴사라는 이벤트 후에도 나의 인생은 딱히 붕괴되지 않았습니다.


서울이 아닌 곳에서 살아보는 것 또한 나의 인생에서 처음 벌여본 일입니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 사는 곳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감상입니다. 계단을 오르면 숨이 차고, 한 봉지에 4천 원꼴로 담아 온 귤이 생각보다 더 달콤해서 기분이 좋은 오후를 보내기도 합니다.


나는 비록 서울이 고향이지만 ‘고향’이라는 단어에 원래 담겨야 할 만큼의 애정이 있다든가 궁극적인 안식처와 같은 곳이라 여긴 적은 없습니다. 어쩌면, 혹시라도 그런 의미가 생기는 기회가 될까 싶어 떠나본 것도 있습니다만, 내내 자라난 것은 결국 마음이 머무는 곳이 곧 삶이 머무는 곳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의 무시무시한 괴담에 이리저리 들볶이며 살거나, 시장에서 직접 골라온 신선한 파프리카와 소시지를 볶아 먹으며 살거나 둘 중 하나의 생활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매해 그런 기로에 서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올해의 나는 소시지 야채볶음을 선택하였습니다. 당을 40% 줄인 케첩을 사용했지만 삶의 맛이 드라마틱하게 변화하는 일 같은 건 적어도 이번 선택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관련 글: 입맛의 디테일-소시지 야채볶음 https://brunch.co.kr/@yonkim/33​ )​


서울 쥐의 고집스러운 탈출극은 그렇게 소박한 풍미로 매듭지어가고 있습니다. 괴담 속 유령들은 늘 그렇듯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입니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다시 또 나만의 궤도를 따라 내일과 모레의 하루를 준비하면 그만이니까요.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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