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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라서, 고기 굽는 법도 배웁니다.

<1> 오빠라서, 좋은 점

by 최다을

<고기 굽는 법을 배운다는 점>


고기는 저절로 익었습니다. 저는 고기를 딱히 구울 필요가 없었어요. 고기는 알아서 팔딱 뛰어서는 노릇노릇 구워졌으니까요. 네. 제 아버지가 매번 고기를 구워주셨거든요. 가족끼리 식사를 하면 고기는 꼭 아버지가 구우셨어요. 모르겠어요. 제게는 시키지 않으셨어요. 제 나이 스물다섯 정도까지 말이죠. 그러다 보니 딱히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어찌 보면, 네. 저는 편하게 자랐습니다.


무엇인가를 많이 못 해보면 그것에 그만큼 서툴기 마련입니다. 연필을 잡는 법을 모르면 연필을 잡을 때마다 놓치죠. 포토샵을 사용해본 적이 없으면 펜툴을 그리고 이미지를 선택하는 것마저 어려워하듯, 안 해 본 것엔 겁이 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본인 입장에서도 힘이 들긴 합니다만, 타인이 보기에도 탐탁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것을 더욱 자주 접해 봐야 된다고 봅니다. 하지 않을수록 그에 대한 반감, 공포, 불안이 심해지니까요. 하지만 세상사가 모두 마음대로 풀리지는 않습니다. 쉽게 그것들. 그러한 두려움들을 이기기는 쉽지가 않단 말이죠. 낯선 게 먼저니까요. 해외여행에 처음 가면 어떠하던가요. 그 낯선 도시에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장소에 간다는 게 얼마나 인간의 두려움을 자극하더란 말입니까. 처음 수능을 보던 날 어떠하셨는지 기억하시나요. 손을 떠셨는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저는 온몸을 떨었거든요.


제게도 익숙지 않은 게 꽤 있습니다. 중에 고기 굽는 게 특히 그러합니다. 이게 참 편치 않았습니다. 제게는 특히요. 고기를 많이 안 구워본 탓일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감각이 발달하지 않은 것이죠. 그러다 보니 노력하려는 시도조차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것에 미숙하다는 것은 문제가 많았으니까요. 이는 같이 고기를 먹는 이들이 맛난 고기를 못 먹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모처럼 가족끼리 모여서 고기를 먹는데, 제대로 못 구워진 고기는 그 자리의 기쁨을 망치기에 충분하잖아요. 그러니 '고기굽자子'가 고기를 제대로 못 구우면 밥 한 끼의 행복은 저 멀리 빕스에 가 있게 될 수도 있습니다. 뭐, 가족이니 이해해 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탓일까요. 저는 나이가 들수록 고기를 굽고 싶은 마음이 커졌습니다. 용기가 생기는 것이었죠. 뭐든 배우고 싶었는데, 중에 ‘고기’ 굽는 법이 특히 샘났습니다. 무엇보다 고기를 구울 때마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게 보이지는 않아서요. 저도 이 세상에서 ‘고기’를 잘 굽는 청년으로 우뚝 서고 싶었죠. 대한의 건아로 말입니다. 마침, 제가 대한의 건아로서 고기를 구울 일이 생겼습니다. 가족끼리 고기를 구워 먹기로 한 어느 날이었답니다. 처음에는 고기를 누가 구울까 고민을 했습니다. 평소처럼 아버지가 고기를 구울 수도 있을 ‘때’였죠. 저는 용기를 냈습니다. “제가 고기를 굽겠습니다. 아버지는 쉬십시오” 아,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용맹한 발언입니다.


옆에 동생이 있지만, 그렇다고 동생에게 고기 굽는 일을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 학생은 말이죠. 고기를 굽다가 기름이 튀기면 깜짝 놀라거든요. 그러면 동생은 울으려고 해요. 많이 뜨겁다고요. 제가 보기에 이 기름은 학생의 마음 건강에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아직 더러운 기름에 물들지 않은 피부를 보호해야 마땅하죠.


아. 기름은 제게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고기를 굽기 시작하니 기름이 활개를 치더군요. 이 눔의 돼지고기는 왜 이리 고기가 많은지. 그것들을 키친 타올로 열심히 닦아내며 고기의 상태를 점검해가며 고기를 구웠습니다. 기름이 튄다고 해도, 저는 그리 놀라지 않습니다. 뭐, 그냥 기름이 튀네, 하고 넘어갈 정도였죠. 대한의 건아가 이런 것으로 겁을 먹겠습니까. 그런데 동생은 막 놀래더군요. 괜찮은지, 화상을 입지는 않았는지 물어보더란 말입니다.


이 날은 아주 더운 날이었습니다. 한여름은 아직 가을에 전권을 내주지 않은 상태였고, 시민들은 흉포한 여름에 어쩌지 못하고 무더위만 삼키는 날이었습니다. 그 더위의 한 복판. 저는 에어컨 바람이 도달하지 못하는 그 주방 가스레인지 앞에 서 이 여름을 나고 있었습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면 어떤가요. 그것일랑 마음 쓰지 않고 고기만 열심히 구워 나갔습니다. 무엇이든 배우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지식의 전수는 쉬운 게 아니니까요. 마음이 무르익으려면 몸이 고생을 해봐야죠. 기술을 그냥 얻으려고 하면 그건 도둑 마음이죠.


때가 되어 어느새 고기 한 접시가 결성됐습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고기들을 한 접시에 모였다는 말입니다. 제가 얼마나 노력해서 구웠는지, 고기의 단면은 매우 곱게 익어있었습니다. 드디어 맛을 보게 됐습니다. 제 어머니와 동생은 맛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렴, 제가 구운 고기잖아요. 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죠. 그리고 이 고기들이 제 입으로 들어갔을 때, 저는 씁쓸한 생각이 몰려오는 것을 참지 못했습니다. 고기가 맛이 없었거든요. 제대로 굽지 못한 것이죠. 너무 많이 익혀서 그리 된 것이었습니다. 조금 두껍다고 해야 될까요. 이렇게 맛이 없는 고기가 아니었는데. 저는 실망을 금치 못했습니다. 고기를 이렇게 못 구웠다니.


옆에서 동생이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학교에서 수련회에 가서 고기를 구웠는데 다 태웠다고요. 그래서 어떤 오빠가 “누가 이 고기를 이렇게 구웠어?”라고 물어보기까지 했다고요. 그 오빠는 “식당 알바를 좀 해봤어”라면서 고기를 구워주는데, 본인이 구운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고요. 그런데, 오빠가 구운 고기도 맛이 있다고요. 이는 형식적인 말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제게는 가볍게 달려오지 않더군요. 웃음이 피어나 저를 다독이더란 말이죠. 제가 구운 고기도 우리 가족의 한 끼 행복이 되기에 충분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요. 이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되던지.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덕담을 해준 적이 있는가. ‘형식’적일지라도. 이 소소한 한 마디도 누군가에겐 천 리를 가게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되는데.


저는 줄곧 ‘바람직한’ 오빠란 고기를 ‘잘’ 굽는 오빠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족 간에 모여서 고기를 구울 때 그것을 잘 구우면 꽤나 도움이 되니까요. TV만 봐도 그렇고,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게 고기를 잘 굽는 청년이니까요. 근데 이날 고기를 구우면서 깨달았습니다. 정말 ‘바람직한’ 오빠란, 그런 오빠가 아니라는 것을요. 진정으로 바람직한 오빠란, 고기를 굽다가 기름이 튀어도 동요하지 않는 오빠였습니다. 담담하게 요리하는 오빠. 기름이 뜨겁게 튀어 올라 손등에 자취를 남기고 가도, 괜찮다고 웃을 수 있는 오빠. 제가 보기엔 그런 오빠가 진짜 고기를 잘 굽는 오빠였습니다.


식기를 치우며 미소가 지어지더군요. '한낮의 여름은 참으로 따듯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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