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최고가 아닙니다>
‘남아선호’, ‘남존여비’, ‘남자를 낳을 때까지 아이를 낳자!’
잠깐. 여기서 물러가시면 아니 됩니다. 제게 오해가 생겼다면 푸시고 가셔야죠. 제 해명을 좀 들어주시길 부탁드려요. 앞에 나열한 이 말들은 말 뜻대로 남아선호 사상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그랬잖아요. 남자가 중요하다고. 그래서 아빠 이름을 물려받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건 또 다른 면에서도 문제가 됩니다. ‘정의’란 결국 남성적인 면으로 떠받든 지 오래라고 하죠. 남자로 태어났다는 데서 특권 자체가 또 무시 못 할 만큼 큽니다. 이게 어떤 면에서는 권위가 되기도 했고요.
이제, 하고 싶은 말을 하려 합니다. 제가 앞에서 나열한 이 말들은 정말로‘옳은 것’일까요? 남아가 선호돼야 되나요? 남자가 여자보다 더 귀하나요?
저는 오빠입니다. 나이가 많은 오빠요. 나이가 많으면 어떤가요. ‘내가 나이가 더 많아!’하고는 ‘권력’를 드러내지 않던가요? 저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은연중에 ‘첫째’라는 데서의 ‘권력’을 쓰려고 했던 것 같아요. 동생에게 내 말이 옳다는 말만 했고, 내가 보고 들은 게 많아서 옳다고 하기를 수차례 그랬거든요. 저도 모르게 제가 옳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김지혜 교수님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보다가 머리가 번뜩 뜨이지 뭡니까. 저는 알게 모르게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하루는, 계란으로 그것을 느꼈습니다. 삶은 계란은 찬물에 담그지 않아도 잘 먹을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삶아지고 바로 먹으려고 했죠. 반면에 동생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찬 물에 담가 놓으라고요.
하루는, 말이죠. 며칠 전에 이야기했던 내용을 누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토론이 있었습니다. 저는 물론 제가 옳다고 했죠. 저는 분명 기억한다고요. 동생은 본인이 옳다고 했습니다. 서로 상반된 ‘기억’을 주장하니, 참 물증이 없으니 누가 옳은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나는 나만 옳다고 생각했다고. 그래서 그렇게 하라고 강요했다고. 근데 그렇게 무조건 내가 옳다고 주장하면 그건 아집이었다고. 그건 매우 무서운 거라고. 저는 많이 틀렸습니다. 제가 한 장의 시험지라면 제 인생 곳곳에서는 소나기가 내린 채였죠. 그런데도 100점인 것처럼 행동했던 것입니다. 나이가 많다고 똑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솔론은 배울수록 나이가 먹는다고 했듯, 겉모습이 그 사람의 ‘나이’를 알려주지는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내가 너보다 위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었죠. 서로를 계급화시켜서 생각하는 것이니까요.
저는 ‘첫째’이지만 모든 면에서 ‘첫째’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백째’보다 못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첫째’라는 명목에 우쭐 대곤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건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기다란 줄을 서있다고 해보죠. 제가 첫째입니다. 경품을 받으려고 ‘가’ 자리 앞에 서 있어요. 그렇게 오래도록 기다리다가 알았습니다. 잘못된 자리에 서있었다고. 문제는 저만이 아니라 제 뒤로 서 있는 99명도 피해를 입는다는 것입니다. 잘못 꿴 단추는 결국 셔츠의 모든 위치를 손상시키는 것이죠. 이는 ‘첫째’라는 데서 막강한 책임감이 동반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알았어요. 같이 도와가야 결국 이긴다고요. 저만의 힘으로는 모든 다 알 수 없다고요. 저는 한참이나 부족한 청년이죠.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저보다 어려도 그 사람의 조언을 귀담아들을 수 있어야 됐어요. 예전에 미스 코리아 출신으로 하버드대에 들어간 ‘금나나’라는 분의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그분의 책에서 보고 한몇 년을 생각했는데요. 그분은 수학을 조금 어려워했는데, 자신이 모르는 부분은 자신보다 어린 분에게도 배웠다고 하더군요. 배움에 급은 없다고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야 된다고요. 이렇듯, 결국 같이 도와가야 좋은 결과가 나옵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생각처럼 술술 풀리지 않습니다.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굽히고 들어가는 것이 안 좋게 보이는 사회이기도 하니까요.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아!”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고,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은데, 형이라 불러, 말조심하고”라는 말도 어렵지 않게 하고 말이죠. 하지만 저는 이제부터라도 그런 ‘습관’은 그만두어야 된다고 봅니다. 동생을 통해서 배웠거든요. 제가 저를 ‘완전’하다고 보는 생각에서 그만두는 게 중요하다고요. 나에게도 부족한 점이 많고, 앞으로 나아갈 부분이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된다고요. 그래야 사람은 더욱 성장할 수 있다고요. 인간은 누구나 완전하지 못합니다. 어디엔가 분명히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이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남의 말은 틀렸다 선언합니다. 스스로는 완전하다고요. 그 선언은 마치 ‘전쟁’ 선언과 같아서, 상대와의 ‘불소통’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