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입시, 그리고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 폭식증
나는 '대학 가면 다 해결된다'는 그 어디에나 통용되는 말을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이 무색하게 폭식증은 대학생활 내내 고쳐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더 심해졌다. 원했던 대학에 합격하고 서울로 상경하며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 것이 복병의 화근이었다. 낯선 환경과 외로운 시간을 홀로 버티기 위해 나는 또, 끊임없이 먹었다. 망가진 식습관에도 가족과 함께 생활한 덕에 여태 지킬 수 있었던 수면 패턴마저 불규칙해져 갔다.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시간을 가리지 않는 심한 폭식을 이어갔다. 대학에 입학한 지 한 달도 안돼서 새벽 3시가 넘은 시각, 기숙사 옆 24시 편의점에 달려가 2만 원어치 과자와 라면을 사서 입에 욱여넣던 그때의 절망과 충격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렇게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즐거울 줄만 알았던 나의 대학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고되고 힘들었다. 그저 '견디기 위해' 나는 먹었다. 그렇게 대학을 다니며 꼬박 지난 3년 고쳐지지 않는 폭식증에 무너지고, 좌절했으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일어났다. 물론 일어날 때마다 예외 없이, 다시 넘어졌다. 번번이 무너질 때마다 영원히 고꾸라진 채 코를 박고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 죽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지금에 한 가지 깨달은 것은 폭식의 이유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과거의 잘못된 다이어트가 이렇게 미친 듯 음식을 먹어대는 유일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라는 생각은 명백한 착각이었다. 그간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던 수많은 문제들을 나는 폭식증을 겪으며 천천히 마주했다. 완벽주의, '~해야 한다'는 끝없는 강박, 경제적 부담, 진로 고민, 인간관계 등 가벼운 문제로 여겼던 그림자들이 켜켜이 쌓여 아주 깊은 구덩이로 나를 내몰고 있었다.
입학한 지 약 3주 만에 또 나는 심한 폭식을 했다. 룸메이트가 자리를 비운 기숙사 방에서 속상한 마음과 쓰린 속을 억지로 삼키며 혼자 한참을 울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엄마도 이제 내 곁에 없었다. 그 날 나는 노트북을 열어 폭식증에 관한 두 번째 기록을 남겼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이 우울감을 달래기 위해 그날 밤 일기를 쓰는 나는 필사적이었다. 하루 종일 무얼 먹었었는지 기억을 되짚어가며 모두 적고 나서야 나는 잠들 수 있었다.
2018. 03. 20
잊을 만하면 또 엄청난 폭식을 반복하고 후회하곤 한다. 이번 사단은 어젯밤부터 시작됐다. 새로운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진 저녁, 술을 원래 마시지 않아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으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평소 잘 먹지 않던 콜라와 사이다를 들이켜고, 오묘한 맛의 닭볶음탕도 생각 없이 먹어댔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식어 빠진 치즈 스틱, 케첩과 마요네즈로 범벅이 되어 무슨 맛인지 모를 계란말이를 계속 먹었다. 생각보다 술자리는 일찍 끝났고 기숙사에 도착하니 11시가 되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며 외로움이 밤만 되면 폭풍처럼 몰려왔다. 그래서 허전함을 달래려 그날도 고구마 말랭이를 한 봉지 뜯었다. 꼭꼭 씹어먹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대충 질겅 씹고 급히 삼켰다. 한 봉지를 더 뜯었다. 먹을수록 불안했다. 죄책감이 들었다. 지금 먹으면 살찔 거라는 생각에도 한번 터진 식욕은 멈출 줄을 몰랐다. 육포를 곧이어 한 봉지 뜯고, 뚱뚱한 아몬드 초콜릿 6개를 금방 씹어 삼켰다.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아. 오늘만 조금 많이 먹었을 뿐이야.’ 스스로를 애써 위안하며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폭식을 무마시킬 심보로 물을 몇 통이나 들이켰는지 모른다. 물먹는 하마도 아니고.
볼록 튀어나온 배에 힘을 주어 괜히 홀쭉하게 만들어 만져보며 다짐했다. 반드시 내일은 건강하고 절제된 식사를 할 것이라고. 마음 한 구석에는 현실을 자각하지 못한 욕심도 있었다. 오늘 많이 먹은 것을 무마하기 위해 내일은 평소보다 적게 먹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이때까지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증을 여전히 떨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하룻밤 자고 일어났다고 사람은 변하랴.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습관처럼 일어나자마자 무언가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늦은 시간까지 먹은 까닭에 아침부터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다. 어쨌든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끌려 토마토 4개와 금귤 6개, 고구마 2개를 먹었다.
그리 나쁘지 않은 아침식사라고 생각했다. 건강한 과일도 먹었고, 아침 식사를 챙겨 먹는 것이 다이어트에 좋다는 기사를 읽었던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정말 멍청하게도 든든한 아침 식사 후 책상에 든 초콜릿을 먹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들었다(20살의 나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먹고 싶은 만큼, 적당히 먹는다는 것을 어려워했다). 속은 어젯밤의 실수로 울렁거려 물을 들이켜면서도 말이다(그 모든 폭식한 시간을 이때의 나는 '실수'로 치부했다. 결코 '실수'도, '잘못'도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결국 난 패배자였다(폭식할 때마다 스스로 '멍청이', '패배자', '쓰레기'라고 욕했다. 그리고 무슨 벌을 스스로에게 줄 것인지 고민했다). 이 때는 겨우 참아냈지만 학교 수업을 다 마치고 기숙사에 돌아와서 남은 초콜릿들을 모두 까먹었으니 말이다.
점심에는 가방에 챙겨 온 야채즙과 구운 고구마가 있었지만 더 달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 순간부터 무엇도 절제할 수 없었다. 고구마 말랭이를 한 봉지 먹고, 곧장 빵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마침 눈 앞에 보인 파리바게트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크림치즈가 듬뿍 든 블루베리 베이글을 덥석 사 11시에 점심으로 먹었다. 속은 여전히 달았다. 조금 덜 단 샌드위치나 브리또를 먹을 걸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단 것을 이른 시간부터 먹으니 몸에 열이 나는 듯 더워졌다. 폭발한 식욕은 멈출 줄을 몰랐다. 잠시 도서관에서 만화책을 보다 곧 편의점에 들어가 찹쌀 팥 패스츄리를 샀다. 역시 단 빵이었다. 그렇게 2개의 빵을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후회했다.
나는 왜 매번 이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할까. 내 몸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 멍청한 혀가 좋아하는 것만 이리 먹어댈까. 속상하고 우울해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공부도 하기 싫었고 남은 수업도 가고 싶지 않았다. 정말 바보 같이 빨리 기숙사에 들어가 이 우울함을 달래줄 초콜릿을 어서 먹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끔찍했다. 오후 5시, 긴 수업을 마치고 홀로 기숙사 방에 들어갔다. 기숙사 앞 슈퍼에서 불닭볶음면을 샀다. 건강한 학식을 챙겨 먹으라는 엄마의 전화를 뒤로 하고 왜 라면을 사 기숙사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학식은 밥이니까 멍청하게도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우는 것이 살이 덜 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숙사에 들어간 순간부터 본격적인 폭식이 시작됐다. 초콜릿을 시작으로 고구마 말랭이 6 봉지(목이 막히면서도 꾸역꾸역 먹어댔다), 남은 육포 2 봉지, 고스란히 남겨 들고 온 군고구마 3개, 김밥 1줄, 떡볶이 1인분, 불닭볶음면 2 봉지, 초코송이 1박스, 칙촉 8개, 건포도 2 주먹 가득, 서랍 구석에서 찾아낸 기다란 가락엿 4 덩이까지 몽땅 먹어치웠다. 허전함과 우울함을 달래려 계속 먹어댔지만 외로움과 짜증은 커져만 갔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제 그만 먹어야 하는데'하고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엄마도 없는 이 곳에서 나의 폭식을 말려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 나 그만 먹고 싶어요. 그런데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요. 허전한 마음을 달랠 것은 지금 이 음식밖에 없어요.
엄마에게 이곳에서도 고쳐지지 않는 폭식으로 힘들다고 더 이상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항상 잔소리하면서도 나를 걱정했던 엄마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런데도 단 음식에 한껏 달아오른 나는 불타는 속을 진정시킬 생각으로 또 아이스크림을 사러 매점으로 달려갔다. 멍청이다, 진짜. 요거트맛 아이스크림 콘을 씹어 삼키며 다짐했다. 이게 정말 마지막일 거라고. 이제 오늘은 더 이상 먹지 않을 것이고, 내일부터는 정말 달라질 거라고. 하지만 무서웠다. 항상 이런 거짓말로 스스로를 속이는 것도 더 이상 소용이 없었다. 엄마, 나 진짜 어떡해.
침대에 누워 무기력하게 휴대폰을 보다 노트북을 켰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먹은 것들을 하나하나 적어보니 매번 반복되는 폭식 패턴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제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폭식증에 이별을 고할 때다. 나는 달라질 것이다. 이 다짐이 거짓말일지 아닐지는 앞으로 두고 봐야 할 일이겠지만 나는 결심했다. 폭식증을 반드시 고칠 것이라고. 한번 더 나를 믿어주기로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전히 다이어트라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한 상태였고 배고픔을 참다 한 번에 몰아 먹는 것이 단순히 나의 '의지박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건강한 음식이 아니라고 임의로 분류한 초콜릿이나 과자를 먹고 싶은 욕구는 죄악이라고 생각했고 자연스러운 식욕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계획에 틀어진 음식을 하나 먹는 순간, 모든 것이 망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하루 종일 참은 식욕을 그제야 터트렸다. 과거로 돌아가 이 날 울며 일기를 쓰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욕구는 자연스러운 거야. 두려워하지 마."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기면 그냥 먹으면 돼. '~만큼 먹어야 한다'는 제약 같은 건 없어.
네가 먹고 싶은 만큼, 원하는 만큼 먹어도 괜찮아."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은 정해져 있지 않아.
그러니 너는 좋아하는 초콜릿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아침부터 빵을 먹어도 하루를 망쳤다고 생각하지 마."
"많이 먹어도 좋으니 꼭꼭 씹어서, 좋아하는 음식들로 '맛있게' 먹자."
"밥으로 하루에 적어도 1번은 온전한 식사를 해보자. 건강한 음식으로 몸을 편안히 채우는 연습을 하는 거야".
그리고
"정말 많이 힘들고 외로웠었구나. 사랑해. 미안해."
그러나 내가 이 모든 말들을 스스로에게 건네기까지는 이로부터 2년이 더 넘는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