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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작가 Sep 01. 2020

인정한다, 인정받고 싶은 내 마음

내 인생을 꿰는 한 단어에 대하여

바이러스가 우리 몸의 세포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DNA를 복제하고 우리를 감염시키려면, 일단 세포와 연결되어야 한다. 코로나 19(COVID-19)의  경우, 바이러스 외피에 있는 왕관 모양의 단백질이 그런 역할을 수행한다. 이 단백질이 우리 몸의 세포 표면에 있는 수용체와 결합해서 바이러스 DNA를 세포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바이러스의 전염력을 결정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감염의 첫 단계인 진입, 그중에서도 바이러스-세포 간 부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후 과정도 진행될 리 없으니 바이러스와 세포 표면의 수용체 단백질의 결합력 차이가 전염성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 몸의 세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수용체에 바이러스의 단백질이 마치 자물쇠와 열쇠처럼 딱 들어맞는 것. 신기함을 넘어 신비롭기까지 하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열쇠는 무엇일까?


한동안 그 이유를 찾아 헤매었다. 대체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무엇을 위해 이런 선택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 3년 내내 진학을 희망하는 학과로 생명공학과를 적어 냈으면서 별안간 왜 군인의 길을 선택했는지, 군인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 생각했으면서도 왜 전역을 그토록 고민하고 망설였는지, 퇴역해서는 그렇게 원했던 공부를 하고 그 분야로 취직했으면서도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웠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오래도록 마음의 방황을 겪었다. 여러 가지 진단 도구를 통해 나를 만나고, 수도 없이 글로 풀어낸 끝에 만난 답은 '인정 욕구'였다. 돌아보니 인생의 선택 A부터 Z까지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인정받기 위한 선택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꽤나 잘했었다. 공부 말고는 잘하는 것이 없기도 했거니와, 높은 성적을 받아왔을 때의 부모님의 반응이 제일 열광적이었다. 열광적이라고 해봤자 입에 귀에 걸려서 "역시 내 딸!"이라는 말 한마디뿐이었지만, 그 정도의 칭찬이라도 받으려면 나에게는 공부밖에 없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나의 부모님은 왜 그리 칭찬에 인색했을까. 아, 그렇다고 해서 나의 인정 욕구가 부모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원망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 성향 자체가 그렇기도 하다. 물론 여러 가지 성격 검사에서 그렇다고 말해주기 전까지는 부모님을 원망했지만. 사실은 지금도 조금은.


결국 모두 나의 선택이었다. 아빠 때문에, 엄마 때문에, 성적 때문에,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말해왔지만, 알고 있다. 결국은 나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중학교 1학년, 생물 과목을 처음 접하고 의사를 꿈꿨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빠의 가게가 화재로 모두 잿더미로 변했고 나는 빨리 돈을 벌고 싶었다. 늘 반에서 1,2등을 하고 시골이기는 했지만 시 전체 학생 중에서 10등 안에 들기도 했던 내가 실업계 진학을 하겠다고 나서니 학교 선생님도, 부모님도 발칵 뒤집혔다. 나를 설득하던 선생님께서는 공립 고등학교이면서 외국어 고등학교를 추천했고 부모님도 동의했다. 나는 생각했었다. '그래, 외국어고등학교라면 내가 배우는데 돈이 좀 들어가도 부모님께 덜 미안하겠지. 실업계에 가지 않고 계속 공부하겠다는 내 마음이 욕심 같지 않겠지.'라고. 나는 선택했고, 합격했다. 돈이 없어서 교복은 3년 내내 졸업생들이 버리고 가는 옷더미에서 고르고, 학교에 내야 하는 육성회비 같은 고지서는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노란색 종이였지만 나는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에 최선을 다 하는 아이로 부모님께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생명공학과에 진학하겠다고 치열하게 공부해놓고 결국 입학원서를 넣은 곳은 사관학교였다. 수능 시험을 완벽하게 망치고 재수를 하겠다고 말한 후, 집 안 가득했던 회색빛 공기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형편이 어려우니 무조건 국립대여야 하고, 그중에서도 서울대여야 한다고, 내 딸을 믿는다고 아빠는 늘 입이 마르도록 말했었다. 아빠의 목표이지 내 꿈이 아니라고 처절하게 싸우면서도 나는 인정받고 싶었다. 결국 나는 사관학교를 선택했고, 예상대로 방황했다. 어째서 내가 하는 생각은 아직 세상을 모르는 철부지의 것으로 치부되는지 아빠에게 악다구니 쓰며 따져 물어도 아빠가 주는 답은 늘 같았다. 살아보면 알 거라고. 아빠를 이해하는 날이 올 거라고. 나의 화답도 늘 같았다. 그 날이 올 때까지 내 인생이 고달픈 건 어떡할 거냐고. 아빠는 입을 닫았다.


사관학교 졸업 후 5년간 의무 복무 후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아빠와 등을 질 각오로 제대했다. 길은 길에 연하여 열릴 것임을 믿고 뛰어든 세상.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는 생각 하나로 들어선 새로운 길. 그 길에서 참 많이도 불안했다. 구운몽의 주인공처럼, 대학원으로 출근하는 내 모습이 사실은 군대 안에서 꿈으로 맛보는 것이라면 차라리 마음 편할까 생각했을 정도로 아무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은 나의 미래가 두려웠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지만, 재능은 재미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었다. 남들보다 몇 번 더 검산하고 검토해야 할수록 불안했다. 내 실력이 결국은 그만큼인 것 같아서,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무기력해지기 일쑤였다.


대학원을 졸업할 때가 되어 취업을 고민할 때에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였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분야의 연구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지만, 그 외의 모든 여건이 여의치 않은 선택지 1번,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분야는 아니지만 그 외의 모든 여건이 맞아떨어지는 선택지 2번. 꽤 오랜 망설임 끝에 내가 고른 선택지는 2번이었다.


결정을 내리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대학원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생각했었다.

‘이건 하늘의 뜻이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문제도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선택지 1번이 사실은, 하늘이 나에게 2번으로 결정하라고 등 떠밀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해석했었다. 그리고 '인정 욕구'내 결정을 응원했다. 여전히 나의 길을 인정하지 않는 가족에게 보란 듯이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들이 그렇게 반대한 길이지만, 난 이 길에서도 잘 나간다고.


몇 년이 지나 들여다본 그때의 고민의 흔적은 흐리멍덩했다. 나름대로 오랫동안 치열하게 고민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고작 4통의 이메일이 전부였다.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한 이유도 간결했다. ‘가족들의 반대와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지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라고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 문장 앞에서 부끄러워졌다. 그것은 완벽한 핑계였다.


나에게는 참 쉽고도 흔한 핑계. ‘가족들의 반대’. 하지만 이제는 안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쓸 용기가 없었다는 것을. 가족들이 반대한 길에서 행여 실패라도 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는 것을. 그만큼 내가 스스로 내리는 결정에 확신이 없었다는 것을.


쉬운 길을 택해왔다는 것을 인정한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몸부림치면서 나조차 내 마음의 목소리를  인정해주지 않았던 것을 반성한다. 그리고, 내가 지금 꿈꾸는 길조차 인정 욕구에 기반한 것은 아닌지 곱씹어 본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까지 내려놓는다면 어떤 길을 가고 싶은 것인지도 깊이 물어본다.


이제와 후회가 된다.

다시 그 길을 갈 수 있을까.

지금 이 생각은 막다른 골목 앞에서 찾는 돌파구일까, 아니면 지나간 길을 되짚어 돌아가면서 찾는,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출구일까.

새삼 질문이 무겁다.

그 길이 아니라면 어떤 방향이어야 할까.

이번에 내가 손들어줄 ‘하늘의 뜻’은 어떤 길일까.


가 걷는 길이 내 색깔의 삶이라는 것을,  숨 크게 들이쉬고, 쥐어 짜내어 믿어 본다. 망칠까 봐, 잘못된 선택일까 봐, 이 길 끝에 아무것도 없을까 봐 미리 걱정하진 않겠다고 다짐도 해본다. 내일이면 다시 쪼그라질지언정, 그래도 오늘은 기지개 펴 본다. 그래도 되는, 온전한 나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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