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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작가 Sep 14. 2020

그래도 달콤한 내 인생

바이러스 입자가 세포 내 진입에 성공하면, 바이러스는 유전자 발현 및 복제가 가능한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보통 세포질이나 세포핵 안이다. 핵 안에서 복제하는 바이러스는 핵 공을 통과해야 한다.  바이러스 게놈이 핵에 진입하는 전략은 크게 4가지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처럼 RNA 게놈을 가진 경우는 RNA+단백질의 크기가 작아서 그대로 핵 공을 통과한다. DNA 바이러스는 캡시드의 크기에 따라 다른데, 허피스바이러스처럼 캡시드가 클 경우에는 핵공에 도달한 후 캡시드가 '일부' 파손되면서 DNA 게놈이 핵공을 통해 진입한다. 아데노바이러스는 캡시드가 '상당히' 파손되면서 게놈이 핵 안으로 들어가고, 파보바이러스는 캡시드의 크기가 작아서 캡시드 통째로 들어간다. 전략은 4가지로 나뉘지만, 결국 2가지 방법이다. 통과하거나 캡시드가 깨지면서 게놈만 찔러 넣거나 이다. 게놈을 드러내는 것이 핵심이다. 그래야 유전정보가 노출되고 복제가 가능해진다.




고등학교 때 '생명공학'이라는 분야를 알게 된 후부터 나는 줄곧 그 길을 꿈꿨다. 하얀 실험복을 입고서 피펫과 비커를 들고 인류와 공학의 발전을 위해 심오한 실험을 하는 그 분야가 그렇게나 끌렸다. 난치병의 원인을 밝히고 치료제를 만드는 상상을 매일 했다. 내 머릿속에서 나는 이미 세계 유수한 인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과학자였다.


수능을 말아먹고 재수에 대한 희망도 가질 수 없었을 때 사관학교 합격 통보를 받았다. 집 안의 회색빛 공기를 견디다 못해 내린 선택이었다고 속으로 울부짖었지만, 어쨌든 내가 직접 두발로 걸어 들어간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사관학교를 졸업하면 군인이 되는지도 모르고 시작된 길이었다. 내 인생의 중요한 선택 앞에서 어쩜 그리도 무심하고 무계획적이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온다. 

시작이 그러했으니, 과정이 평탄했을 리 없다. 나는 줄곧 '군인다움'을 강조하는 군대에 적응하지 못했고, '생명공학'을 잊지 못했다. 수시로 자퇴하고 싶었고, 틈만 나면 생명공학 관련 기사와 책을 읽었다. 그럼에도 아빠의 지독한 반대와 나의 줏대 없음이 기막힌 콜라보를 이뤄 사관생도 시절 4년을 용케도 버텨 냈다. 

군인은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다 그만두고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생각했다.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그 분야로 갈 거라고. 죽기 전에는 꼭 그럴 거라고. 그게 내 꿈이라고. 


그래도 이왕이면 다홍치마, 아빠도 좋고 나도 좋게끔 군대 안에서 생명공학 비스무리 한 길을 찾아보려 애썼건만,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 그나마 관심 가는 분야를 찾았던 것이 생화학 무기였고, 그중에 바이러스였다. 하지만 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에게 바이러스 연구자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인사 담당이었던 선배가 '그런 건 제대하고 해라'라고 했을 정도니까 말 다했다. 


결국 나는 꿈 찾아 퇴역했다. 아빠는 한동안 내 전화를 받지도 않으셨고, 나는 나대로 오기와 불안으로 점철된 시간을 보냈다. 인정을 먹고사는 내가 아무도 응원해주지 않는 길을 간다는 것은 외롭고 지치는 일이었다. 힘들다고 마음 편히 기댈 사람도 없고, 난관에 부딪쳐도 하소연하거나 넋 놓고 퍼져있을 수도 없었다. 가벼이 내쉬는 한숨도 숨겨야 했다. '그러게 내가 뭐랬냐'라는 힐난을 받지 않으려면 마음은 가시밭길을 걸어도 겉보기에는 꿋꿋이, 당당히 걸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마음을 많이 다쳤다. 원망했고 서글펐다. 무조건 안으로만 꽁꽁 숨겼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조차 나를 보듬지 않았고, 반대를 무릅쓰고 내린 결정이니 내가 다 책임져야 한다고, 보란 듯이 성공해야 한다고 다그치기만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하루는 매일같이 꿈같았다. 비로소 내 인생 같았다. 내가 선택하는 대로 시간은 흘렀고, 내가 쌓는 대로 내가 만들어졌다. 신이 났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오는 일과표도, 달성 목표도 더 이상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벅차게 행복한 날들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것이 왜 이렇게 외롭고 험난했어야 했는지 다시 복기해 본다. '결국 선택한 것은 나'라는 자조 말고, '아빠한테 인정받고 싶었어'라는 핑계 말고, 무엇이 이유가 되어 줄까. 


나는 그저 나로 존재하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계획하는 하루를 살고, 내가 선택한 음식을 먹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인생을 살고 싶었을 뿐인데.


돌고 돌아 지금의 이 길에 서 있고, 또다시 눈 앞에 여러 갈래의 길이 펼쳐졌다. 어떤 길을 걷든 결국에는 한 곳으로 연결될까. 알 수 없다. 그저 선택하고 묵묵히 걸어야 한다. 내 선택을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니라도 하는 수 없다. 한 번의 외로운 선택의 결과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 선택의 핵심은 '나로 존재하기'라는 것이다. 온전히 나를 중심에 두고 내 인생의 방향을 바라보아야 함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긴다.


부딪치고 구르느라 껍데기는 좀 부서졌지만 그게 대수인가. 나는 아직 온전하다.

나를 드러내고 내가 원하는 길을 걷겠다. 내가 만드는 내 인생, 당연하지만 참 어려운 그 일을 내가 해내겠다. 나답게, 내 색깔대로. 

그 길에서 뭐라도 되겠지. 안되면 또 어때. 그것도 내 인생. 내 선택이 빚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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