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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작가 Sep 28. 2020

전역, 그 필연적 사건


레트로바이러스는 닭, 쥐, 고양이, 원숭이, 인간 등 대다수의 척추동물에서 발견된다. 1911년 라우스(Rous) 박사가 닭에 종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처음 보고하면서 존재가 알려졌다. 레트로바이러스는 기본적인 유전자만 가지는 simple retrovirus, 기본적 유전자와 보조 단백질을 갖는 complex retrovirus로 분류된다.  에이즈(AIDS)의 원인 바이러스인 HIV가 complex retrovirus의 대표적인 예이다.


대다수의 동물 바이러스는 바이러스 유전자를 보호하는 단백질(캡시드) 조립 후  바이러스 겉껍질을 입는 착외피 단계를 순차적으로 수행하는데 반해, 레트로바이러스는 두 개의 과정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리고 바이러스 입자가 세포 밖으로 나간 후에야 성숙(maturation) 과정을 거친다. 세포 밖에서 수행되지만 레트로바이러스 입자의 감염성 획득을 위해 필수적인 단계이다.




피하고 싶었다. 전역을 앞둔 마지막 해에 근무 빡세고 분위기 험악한 곳으로의 전출만은 정말 피하고 싶었다. 진해에서 서울까지 통학하며 어렵게 대학원 1학기를 마친 터였다. 계속 이어서 공부하려면 수도권과 가까운 곳이거나 최대한 한직이어야 했다.


'차년도 전역 예정이며 서울 00대학원에서 학기 진행 중입니다. 전역 준비와 학위 진행을 위해 다음 인사에 참고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구구절절 간곡하게 인사 상담을 남겼다. 나에게 빽이나 운이 있다면 다 끌어다가 몰빵하고 싶을 정도로 간절했다. '설마 전역한다는데 작전이나 중책을 맡기겠어?' 하는 객기와 '작전은 절대 안 되는데..' 하는 불안이 마음속에서 널뛰었다.  한 달여의 시간이 흘렀고,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금요일, 인사계획이 발표되었다.


2함대 함정 작전관.


오 마이 갓! 동기에게 전해 들은 나의 다음 근무지는 무려 2함대였다. 서해 수호의 최전방, 그것도 함정 작전부서 책임자인 작전관이라니!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고, 남편은 그 모습이 웃기다며 배꼽 잡았다.


웃거나 말거나 나는 정말, 진심으로 자신 없었다. 짧은 군 생활이지만 한 번도 작전의 중심에 있었던 적 없었다. 그런 내가 부하를 통솔해서 제대로 작전과 훈련을 집행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두려웠다. 내가 책임질 수 없는 무게인 것 같아서 부담스러웠다.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피하고 싶었다. 그만큼 무서웠다.


그러나 탈영하지 않는 이상 피할 방법은 없었다. 암담한 와중에도 시간은 야속하게 흘렀고, 결국 2함대 함정 작전관으로 부임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중요한 직책을 맡은 이상 잘 해내야 했다. 나와 대원들을 지키려면 무조건 잘해야 했다. 그리고 부임한 지 석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다.


전역을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피가 끓었으며,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넘쳤다. 짧은 군 복무 중 가장 열과 성을 다한 시간이었다. 힘들어도 웃을 일은 있었고 보람된 일은 많았다. 하다 보니 익숙해지기도 했고 계속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근무 끝무렵에는 2함대 함정 작전관도 했으니 다른 임무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마저 생겼고, 급기야 전역 신청서 제출을 망설였다.


계획했던 대로 꿈을 찾아 이듬해 전역은 했지만, 어쩐 일인지 생각했던 것만큼 아주 홀가분하지는 않았다. 군복을 벗기만 하면 무엇을 하든 희희낙락일 줄 알았는데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체감할 때마다, 불안한 미래에 '전역한 것이 꿈이었으면' 하고 바랄 때마다 내 결정이 옳았는지 되짚어야 했다. 다시 돌아가도 전역할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때까지 현재와 과거의 저울질은 지겹도록 반복되었다.


꽤나 당혹스러웠다. 군대에 있을 때 늘 벗어나고 싶어 했고, 때론 내 길이 아닌냥 굴었다. 남의 옷을 입은 듯 불편했고, 노력해도 닿지 않는 기준에 좌절했었다. 그런데도 그 길에 미련이 남았던 것일까. 군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인정받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일까. 인정은 내 것인 적 없었고, 안정은 내 것일 리 없는데 그 걸 꿈꿨던 것일까. 


되새김질의 아이콘이었던 그때의 나 자신보다 더욱 당황스러웠던 것이 또 있는데, 바로 나의 군 경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군인, 그중에서도 해군, 게다가 장교였다는 사실을 알면 나를 보는 눈빛이 바뀌었다. 아주 흥미로워했고, 군 생활을 궁금해했고, 신문이나 뉴스에서 떠들어댔던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어 했다. 특이하거나 특별한 사람으로 대우했고 간혹 대단한 사람이라 치켜세우기도 했다. 정작 군인이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시선이었다.


소속되어 있을 때는 몰랐다. 유니폼 없이, 지지 없이 홀로 선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하고 불안정한 일인지.

벗어나니 보였다.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했었는지, 내가 얼마나 멋지게 버텨 냈는지.

조직을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단단한 사람이 되었는지.

이걸 깨닫고 나자 그제야 비로소 나 자체로 존재하는 인생이 시작되었다. 어쩌면 나에게 '전역'은, 바이러스로 치자면 레트로바이러스의 '성숙' 같은 필연적 과정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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