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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작가 Oct 05. 2020

엄마. 다시, 처음.

바이러스는 숙주세포가 있어야 생명체로써 존재한다. 그전까지는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바이러스는 세포에서 왔을까? 세포였다가 일부 기능을 잃었거나(세포 퇴화설) 생존과 증식에 필수적인 일부만 따로 떨어져 나왔을 수도 있다(세포 탈출설). 어쩌면 세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세포와 함께, 또는 세포보다 먼저 지구 상에 나타났을 수도 있다(독립 기원설).

수십억 년 동안 끊임없이 진화해온 바이러스의 처음을 설명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바이러스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려고 애썼지만, 여전히 바이러스의 등장은 오리무중, 미스터리다. 어쩌면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려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가설이 짬뽕된 것일 수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바이러스마다 각기 다른 방법으로 탄생했을 수도 있을 테고.




24살에 결혼했다. 해군 장교로 임관한 지 2년 만이었다. 장교의 경우는 1~2년마다 발령이 나서 근무 지역이 바뀐다. 남편도 군인이라, 결혼 후 함께 한 시간이 길지 않다. 같은 지역에서 근무할 때에도 둘 다 바다에 나가 있거나, 내가 배 타고 나가면 남편은 입항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내가 퇴역하고 나서는 부대에 전화해볼 수도 없어서 남편이 직접 전화 주지 않으면 소식을 듣기도 어려웠다.


결혼하고 나서 한동안 나는 아이를 꽤 간절히 원했었다. 하지만 남편과 함께 있을 시간도 짧았고, 병원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난임이라 했었다. 대위로 퇴역하고, 그토록 바라던 대학원에 진학해서 졸업도 하고, 회사에 취업해서 적응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기는 찾아오지 않았다. 부부가 너무 떨어져 지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내심 이대로 타의적 딩크족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마침 남편과 잠시 함께 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고, 남편과 상의 끝에 난임 전문병원을 찾았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결혼한 지 오래되긴 했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 만큼 인공수정부터 차근차근하자고 권유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 저는 꼭 올해 안에 가져야 해요. 남편이 곧 부대로 복귀해요. 아기가 신생아일 때 잠시라도 남편과 함께 육아하고 싶어요. 시험관 시술부터 할 수는 없을까요?"


나의 말에 의사 선생님은 잠시 고민하시는 듯했지만, 이내 시험관 시술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을 알려 주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후에 진행된 첫 시험관 시술은 실패했다. (실패라는 단어를 써도 될지 모르겠다. 이 단어만큼 좌절감을 표현하는 단어도 없는 것 같아 쓰긴 썼지만, 그 어렵고도 고귀한 기다림의 시간에 이런 단어를 갖다 붙이는 것마저 마냥, 여전히 괴롭고 슬프다. )


모든 과정이 두렵고 아팠지만, 난자 채취 과정은 특히 힘이 들었다. 스스로 자기 배에 주사를 놔야 하는 '배 주사'도, 채취하려고 마취하고 누워있는 나 자신도 서글펐다. 마취가 풀리고 병실을 나섰지만 이내 다시 쓰러져 응급실 신세를 진 것도, 복수가 차올라 몸이 퉁퉁 붓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데 출근해서 평소처럼 일해야 하는 것도 버겁기만 했다. 그렇게 아프고 힘들게 한 시험관 시술이 한 번 실패하고 나니 두려웠다. 당시 나에게는 냉동된 수정란이 2개 남아 있었는데, 그 2개마저 착상에 실패하면 난자 채취 과정부터 다시 해야 했다. 예상되는 아픔과 고통에 생각만 해도 움츠러들었다.

시간도 계속 흐르고 있었다. 이번에 실패하면 남편이 복귀해야 해서 내가 아이 낳는 것도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마음을 편히 가져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이유들만 자꾸 늘어났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이번에 냉동된 수정란 시술이 실패하면 우리 시험관은 하지 말자. 힘들고 무서워. 아이 없어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잖아 우리."


시술 기간 동안의 나를 지켜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나보다 더 마음고생한 남편은 내 의견에 동의해주었고, 그렇게 마지막이 될 두 번째 시험관 시술 과정이 시작되었다. 숨 막히는 기다림의 시간이 흘렀고, 임신테스트기의 노예가 된 지 2주 만에 드디어 선명한 두 줄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엄마가 된 나는 행복했을까?

당연히!

아니, 어쩌면.

아니, 아마도?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우리 일상에 아이만 추가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꼬물거리는 아기와 그런 아기를 닮은 작고 귀여운 장난감과 물건들에 둘러싸인, 따스하고 평온한 일상 같은 하루를 상상했다. 마치 잡지 속 온화하고 행복한 가족사진처럼.

하지만 피부로 맞닥뜨린 육아는 전쟁이었다. 분명 복하긴 했다. 엄마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순도 200 퍼센트의 행복이었다. 그러나, 전쟁 중 병사의 존재 의미가 그렇듯, 엄마는 육아 중에 '나'라는 객체로 존재할 수 없었고, 그래서 슬펐다. 젖이 흘러서 축축해진 내 옷을 갈아입을 시간은 없어도, 젖을 게워 내느라 젖은 아이 옷은 갈아 입혀야 했다. 라면 한 그릇 후루룩 목구멍으로 넘길 시간은 없어도, 아이를 위한 수유시간은 수첩에 일지를 써가면서까지 지켰다. 아이가 깨어 있을 때는 아이와 눈 마주쳐주고 놀아주느라 바빴고, 아이가 잠이 들면 인터넷에 넘쳐 나는 육아 정보들을 검색하느라 바빴다.  

'조금 크면 낫겠지.' 했는데, 아이가 커 갈수록 엄마가 해야 하는 일들은 점점 늘어났다. 아이가 배밀이를 시작하니 아이가 만지기에 더럽거나 위험한 물건들을 닦고 치우는 일이 생겨났고, 이유식을 시작할 시기가 되니 식단을 짜고, 재료를 준비하고 요리를 하고 먹이고 씻기고 치우는 일이 딸려왔다. 아이가 선반 등을 잡고 일어서기 시작하니 행여나 넘어질까 싶어 두 팔로 아이를 보호하고 하염없이 아이의 걸음마를 지켜보는 일이 추가되었다. 아이의 능력치가 한 단계씩 레벨 업 될 때마다 엄마의 업무량은 두 배, 세 배씩 늘어났다. 행여나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모든 것이 내 탓인 마냥 자책하고 괴로워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아이를 보듬어야 했고, 하루라도 빨리 낫게 해 주려고 인터넷과 책을 뒤지느라 쉴 틈이 없었다. 아이를 낳았을 뿐인데, '나'는 사라지고 '엄마'만 남았다.


아이가 없었을 때에는 결혼을 하기 전에도, 후에도 나는 '나'로써 존재할 수 있었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내가 하기 싫으면 하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나에게 불필요한 것들은 버리고 필요한 것은 취했다. 나는 매일 성장했고, 나에게 충실한 하루를 살았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를 위한 하루도, 내가 계획한 일과도 없었다. 모든 것이 아이의 컨디션에 맞춰 흘러갔다. 외출을 결심했더라도 아이가 잠이 들면 포기했다. 아이가 낮잠을 자는 시간에 집에서 조용히 책이라도 읽어야겠다 생각했지만, 그날따라 아이가 잠투정을 하며 눕히면 깨고, 눕히면 깨고를 반복해서 책 읽기는커녕 밥 한 술 넘길 시간이 없었다. 당장 화장실에 가라고 배에서는 계속 신호를 보내는데, 울고 보채는 아이를 둘러업고 있느라 화장실에 갈 짬조차 나질 않았다. 세수와 하루 3번 양치질은 사치였고, 잠들기 전에 씻고 얼굴과 몸에 로션이라도 챙겨 바르는 일은 아주 희박한 가능성을 가진 희망사항이 되어야 했다. 그런 하루가 반복되다 보니, 어쩌다 아이가 수월하게 이유식을 받아먹고 똥도 잘 싸고 기분도 좋아서 낮잠까지 잘 자는 날이 생기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아이를 낳은 후로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그 여유시간에 육아상식을 검색하고, 국민 육아템을 쇼핑하고, 솜뭉치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켜 난장판이 된 집을 치우느라 마음은 1초도 쉴 새 없이 바쁘다. 그러고 나서 까지 아이가 낮잠을 자는 기적 같은 날이 가뭄에 콩 나듯 있더라도 그 시간을 나 자신을 위한 충전 하는데 써야겠다는 생각조차 해내지 못한 채, 그저 인터넷 서핑을 하며 시간을 죽이다가 그마저도 지쳐서 아이 옆에서 쓰러지듯 잠이 들곤 했다.


유난스럽게도 아이에 맞춰 살았는지, 어느 날 문득 흘러온 시간을 뒤돌아 보니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에 관한 것만 남아 있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느라 멈춰있는 나 자신은 보지 못했다. 아이의 사진은 수십 장 찍어도 나를 찍은 사진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뿐이고, 그마저도 눈뜨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있어서 남이 볼까 겁나는 그런 사진들 뿐이었다.


나의 지난 시간은 어디로 갔는가.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대로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나에게 충만한 행복을 주던 그 시절의 빛나는 나는 어디 가고, 나를 위한 커피 한 잔조차 사치스럽다고 느껴지는 지금의 나만 남았을까.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바이러스처럼 진화하려면, 그것이 퇴화든 탈출이든 독립이든 다른 무엇이든, 나의 생존과 발전에 필수적인 핵심만큼은 정확히 알고 남겨뒀야 하는데 그 걸 빼먹었다. 게다가 엄마가 되고 나서야 보이는 부모님과의 관계의 재발견, 아이를 돌보면서 마주하는 어린 나와의 재회는 나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뿌리부터 흔들리니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작은 바람에도 쉽게 스러졌고, 가벼운 발놀림에도 쉽게 뭉개졌다. 나조차도 몰랐던 내면의 민낯이 처절하게 드러났다. 괴로웠고, 아팠다.

하지만 아이들 때문이라도 언제까지 그늘져있을 순 없었다. 얼른 일어서고 싶어서 최대한 가까운 시점부터 다시 시작해보려 했지만, 어쩐지 방향이 보이질 않았다. 번번이 현실의 문턱에 걸렸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처음. 처음이어야 했다. 거기서부터 다시 차근차근 나를 찾아보기로 했다. 다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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