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미작가 Oct 12. 2020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90년 시작된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2003년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인간 유전자의 염기서열의 99%가 밝혀졌다. 그리고 인간 유전자의 염기서열 중 8%가 바이러스의 유전자에서 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일본 오사카대학 게이조 도모나가 박사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바이러스가 인체에 들어온 뒤 오래 살면서 마치 유전자인 것처럼 행세하게 되었다고 한다. 피하고만 싶은 바이러스가 이미 오래전에 우리의 일부가 되었다니! 이왕 끼어든 거 좋은 역할을 해주면 좋으련만, 지금까지는 유전자 돌연변이나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모지리 같은 년!"

엄마가 눈을 흘기며 욕했다. 반장 선거에 나가지 않겠다는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초등학생 때에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했었다. 반장 선거에 나가라고 하면 나가고, 특별활동으로 영어 말하기 수업을 신청하라고 하면 하고, 졸업식 때 송사 발표를 하라고 하면 했었다. 딱히 하고 싶은 게 없기도 했고, 줏대가 없었던 것도 맞지만, 내가 하기 싫다고 말해도 결국 엄마의 등살에 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싫다고 하면 엄마는 늘 목소리를 높여 나를 혼냈다. 

"너 바보야? 또박또박 큰 소리로 발표도 잘하고, 무슨 일이든 내가 하겠다고 손 들고 나서야지! 하라도 등 떠밀어줘도 안 하는 모지리가 어디 있어? 꼭 한다고 해! 알았어?"

그나마 초등학교 때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편했고 결과적 -이를테면 교우관계나 선생님께 예쁨 받는 것 같은-으로도 좋았는데, 중학생이 된 후로 부쩍 낯을 가리게 된 나는 남들 앞에 서는 것 자체가 불편하고 어색해졌다. 아니 어쩌면,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했던 것일지도.

여하튼 나는 중학교 1학년 반장 선거에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다, 절충안으로 '서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엄마는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까지 줄곧 나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내고 귀에 딱지 앉을 만큼의 욕을 해댔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나의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동요 발표를 했다. 아이들의 첫 발표였지만 학부모가 참석하지 않는, 간단한 원내 발표여서 집에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집에서 가족들 다 같이 불러본 것이 전부였다. 크리스마스이브, 아이들은 발표를 잘할 수 있노라 다짐하며 씩씩하게 등원했다. 하원해서도 잘했다 하길래 엉덩이도 몇 번 두드리며 '아이고 내 새끼, 장하다 장해.'라고도 해주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 그 날의 영상이 메시지로 도착했다.

'어디, 얼마나 잘했는지 보자 내 이쁜이들!'

내 아이들이 남들 앞에서 어떤 모습인지 내심 궁금하고 기대도 되었기에 설레어하면서 영상을 틀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이들은 처음부터 개미가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더니 그나마 몇 소절 후에는 입을 다물고 얼음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야속하게도 동요는 2절 반주까지 흘러나왔고, 아이들은 입도, 율동도 그대로 멈춘 채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하고 서 있다가 선생님이 손짓해서야 무대 밖으로 나갔다. 

속이 상했다. '이렇게 숫기 없어서 앞으로 자기표현이나 잘하며 살겠어?' 하는 과장된 걱정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이렇게 해 놓고 잘하고 왔다고 한 거야?' 하는 괘씸한 마음도 들었다. 아이는 겨우 4살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사소한 일에도 부끄럽다 몸을 비트는 아이들의 행동이 소심해 보이고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목구멍에 곰질거렸다. '너 바보야?', '모지리 같기는!' 따위의 말들이 목구멍에 턱턱 걸렸다. 의식의 끈을 놓치면 언제든 화살같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얼마나 자주 들었는지, 얼마나 상처가 되었는지 뼛속까지 생생하게 기억된 엄마의 말들이 이제 내 입을 통해 나오려고 했다. 




내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니, 나의 부모가 이해되면서도 동시에 이해되지 않는다. 내 아이에게 절대로 하지 못할 말, 하지 않을 말들을 나의 부모는 어째서 그리 쉽게 쏟아냈을까. 낮에는 버럭 했지만 밤에는 반성하는 날들을 보내긴 했을까. 그저 그때의 그들이 미숙했다 치부하기에는 나의 상처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닮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받은 상처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닮았다. 입 밖으로는 내뱉지 않을지라도 이미 머릿속에서는 엄마가 나를 봤던 시선으로 아이를 본다. 미리 걱정하고 앞서서 비난한다. 아이는 옴작거리는 내 입술을 눈치 보고, 나는 그 눈빛을 눈치챘음에도 낮은 한숨을 감추기 어렵다. 지금의 나는 딱, 약간 진화된 버전의 엄마 그대로이다. 

뿐만 아니다. 앉았다 일어설 때면 허리가 아파 엉거주춤 어기적거리며 발걸음을 떼는 뒷모습도 닮았고, 하루 종일 한 손에 걸레를 쥐고 다니며 방바닥을 닦는 습관도 닮았다. 피곤할 때면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 섞인 잔소리를 퍼붓는 것도 점점 닮아가고, 말투와 목소리도 점점 비슷해져서 발신자가 뜨지 않으면 동생은 전화 건 사람이 엄마인지 나인지 구별해내지 못한다. 

딸이니까 엄마를 닮는 건 당연하다 싶다가도 내 딸이 나를 닮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섬뜩하다. 아직도 어릴 적 상처에서 허우적대는 부족하고 엉성한 나를, 상처 줬다며 원망하면서도 그대로 답습하고 마는 모자라고 못된 나를, 귀한 내 딸이 닮을까 봐 두렵다. 아주 오래전에 끼어든 것도 모라자 인간 유전자인 척하며 존재하는 바이러스 유전자처럼, 나의 부모에게서 비롯된 내 상처가 아이들에게 대물림될까 봐 무섭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변해야 했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는데, 좋은 것을 비추려면 애초에 내가 제대로 된 인간이야 했다. 아이를 낳고 나서 보게 된 나의 내면의 민낯과 더불어 내 상처를 돌아보기로 했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