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미작가 Aug 24. 2020

내가 불안한 진짜 이유

세상에 존재하는 바이러스는 몇 개일까? 이에 관한 실험의 기록이 있다. 1989년에 노르웨이 베르겐 대학교 연구팀이 바닷물을 조금 떠서 전자 현미경으로 보았더니 1밀리리터의 물방울에 바이러스는 무려 2억 5천만 개가 있었다. 200ml 우유 한 팩이라 생각하면 500억 개의 바이러스가 있는 셈이다.

갯수는 이렇게나 많지만 구조는 지구 상에서 가장 단순하다. 유전 정보와 그 유전정보를 보호하는 단백질(캡시드)이 그것이다. 유전정보가 이중가닥 DNA, 한 가닥 DNA, RNA 등등으로 나뉜다거나 유전정보와 캡시드를 보호하는 외피가 있는지 없는지 등의 세부 내용은 차치하고 보면 핵심은 딱 이 두 개만 남는다.




"내 인생의 핵심은 무엇일까?"


나는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이다. 배움에 대한 욕심이 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시간을 아까워한다. 여러 가지를 시도해본 결과 나는 손재주나 운동 신경 따위는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차라리 공부가 인풋 대비 아웃풋이 가장 확실한 분야였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느낌이랄까. 잘하고 싶은 욕심도 커서 초등학교 때에도 시험 전이면 새벽까지 공부를 했고 아는 문제를 틀리면 억울해서 눈물이 나왔다.


문제는 육아휴직 중인 지금도 이런 상태이고, 아이를 보는 동안은 늘 시간에 쫓긴다는 사실이다. 진득하게 공부를 할 수도, 책을 볼 수도 없다. 당연히 눈에 보이는 아웃풋도 없다. 그나마 잘하는 것이라곤 공부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성과가 나지 않고 시간만 흘러가니 미칠 노릇이었다.


‘육아휴직 중에 하나라도 해내야 하는데..’

‘요즘은 N잡 시대라고 하고 내가 근무하는 부서도 없어진다고 하니 복직하기 전에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런 생각들 때문에 하루하루 초조했다. 매일 새벽 5시에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감사 일기를 쓰고 가계부를 쓰고 영어와 독일어 강의를 들었다. 새벽에 해야 하는 일이 많으니 그 시간에 일어나지 못하면 자책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아무도 너한테 그렇게 살라고 말하지 않는데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 그렇게 안 해도 육아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하고 힘들잖아.”


스트레스에 찌들어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이 위로했지만 귓등으로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불안했다. 육아든, 공부든, 자기 계발이든 무언가를 완벽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초조함, 사회에서 내 이름 석자가 지워지고 내 존재가 희미해질 것 같은 불안이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내 시간, 내 경력이 하루하루 옅어지다 못해 어느 날에는 먼지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퇴역을 하고 내 꿈 찾아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 것인데, 그마저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이대로 고꾸러질까 봐, ‘거봐 내가 뭐랬어. 얌전히 군대에나 있을 것이지’하는 비난을 받을까 봐 불안했다. 그리고 인정받고 싶었다. 남들이 뜯어말린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내고 싶었다.


그렇게 달려가다가 멈추었다. ‘엄마 공부 좀 하게 너희들끼리 놀아!’라고 아이들에게 짜증을 많이 낸 날이었고, 내 눈치를 보는 아이들의 눈을 마주한 날이었다. 말 그대로 ‘뭣이 중한디?’를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 나는 그 날 쉬이 잠들지 못했고, ‘무엇을 위해 공부하려 하는가?’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끝까지 답하지 못했다.

손에 꼽히게 잘하는 것은 없으면서 닥치는 대로 배우고 싶은 마음만 앞서는 내가 답답하고 이상했다. 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여러 가지 자기 분석 시스템의 검사도 받고 수십 개의 가치 중에서 내 인생의 핵심가치를 뽑아 보기도 했다.


가족, 책임감, 배움, 화합 등등….

시도해본 여러 가지 방법에서 나온, 나를 분석하는 단어들을 쭉 늘어놓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단어만 보면 평이한 조합이지만, 묘하게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했다. 이 안에 내가 있을까? 아니었다. 내 삶인데 내가 없었다. 생각할수록 확실해졌다. 내가 무언가를 계속하거나 어떠한 성과를 이뤄내지 않더라도 나의 존재만으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의 부재가.


나에게 있어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내기 위한 수단임을 깨달았다. ‘왜, 무엇을 위해서’ 이 분야를 배워야 하는지, 배우고 싶어 하는지 겹겹이 싸인 이유의 껍질을 벗겨내자 마침내 딱 한 가지가 남았다. ‘그냥 이렇게 불완전한 나라도 괜찮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줘.’라는, 조금은 서글픈 내 마음이.


미움받으며 자라지 않았고, 성적 때문에 과하게 스트레스받지도 않았다. 이제와 부모님을 원망할 거리도 생각나지 않았고, 마흔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 부모님에게 나 좀 사랑해달라고 응석을 부릴 용기도 없었다. 그럼에도 서글프고 외로운 마음을 채울 곳 없어 방황하던 나는 그냥 항복하기로 했다. 이제 나도 어른이니 다 괜찮다고, 괜찮아야 한다고 참고 버티는 대신 착실한 부모 밑에서도 답답하고 한스러워 울고 싶었던 적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내가 바랐던 사랑의 크기와 나의 부모가 주었던 사랑의 크기가 달랐을 뿐임을, 그것이 내 부모의 말처럼 나의 과한 욕심에서 비롯된 오차가 아니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이라는 것. 자기 사랑 이론의 기초이자, 실천의 최고 난이도를 자랑하는 그것. 그 사랑, 그 인정, 그 위로를 나에게 실컷 퍼부어본다.  실상의 내면은 부족하고 실망스럽다 못해  어쩌면 형편없을지라도, 그마저도 끌어안고 보듬어보련다. 자기 사랑마저 남에게 의존하지 않겠다. 세상 모두가 등 돌려도 내 자신만은 날 안아줄 수 있도록, 그거면 두 발 굳건히 버티어낼 수 있도록.

이전 01화 바이러스, 군대, 육아, 글쓰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