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하고 자유로운
"Can I read one of your poems, then?"
"I'm sorry, you can't."
작년 여름 베를린의 미술전시 오프닝에서 한 시인을 만났다. 그는 터키에서 태어났고, 20년 가까이 독일 베를린 시민으로 살고 있었다. 출판을 해 본 경험이나 대중에게 본인의 글을 노출한 적은 아직 단 한 번도 없다는 그는 무려 20년 동안 시를 쓰고만 있다고 말했다. 20년 동안 매일 쓰기만 하는 시라니! 순간, 의아한 동시에 난 그의 시를 한 편이라도 꼭 읽어봤으면 하는 호기심에 당신의 시를 읽어볼 수 있겠냐고 물었다. 시인은 그럴 수 없어 유감이다라는 대답을 건넸다. 물론 시인에게 나는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외국인에 불과해서였을까? 그의 모바일 폰에 설치되어 있을 애플리케이션들 -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위키, 워드프레스 등 개인 블로그나 도메인 등의 플랫폼-에 가지런히 업로드되어 있을 그의 많은 시작들의 실시간 리딩이 가능하리라는 나의 염치없는 기대감이 근거 없는 일시적 바람일 뿐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대중에게 노출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시, 그는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며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했다. 이 시대에 먼 이국의 여행길에서 이런 시인을 만나 나누었던 짧은 이야기가 어쨌든 흥미로웠다.
20년 동안 '쓰고만' 있다는 그의 시는 어떤 내용일까? 어떻게 20년을 쓰고만 있단 말인가! 예술은 대체 무엇인가? 묘한 착잡함과 동시에 긍정적인 감수성이 나를 자극했다. 너무 무책임하게 보이기도 했으며, 진정으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예술가의 모습으로 비치기도 했다. 이야기하며 웃을 때마다 그의 툭 솟아오른 큼직한 오른쪽 송곳니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아무 근심과 걱정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은, 시인은 천진난만한 미소 그대로 내 앞에 실존하고 있었다.
전시 오프닝이 끝난 후, 자연스럽게 모인 저녁 식사 테이블에는 여섯 명의 아티스트와 한 명의 갤러리 오너가 있었다. 24시간 생생하게 돌아가는 베를린의 주말 저녁은 여기저기 시끌벅적했다. 한 달 동안 머물렀던 Fredrichshain, 고요하게 흐르던 Spree강, east side gallery의 베를린 장벽 등 예술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박물관, 갤러리, 마켓, 클럽 등의 힙한 장소들이 인상적이었다. 뉴욕의 다운타운에서 온 화가, 파리에서 태어난 퍼포먼스 작가, 베를린에서 작은 갤러리를 운영하는 중년의 다부진 이탤리언 비즈니스 맨, 헝가리에서 온 소설가, 뉴욕 브루클린에서 베를린으로 갓 이주한 스트릿 댄서와 터키 시인 등 예술로 교류하는 사람들과 우연히 만나 인사하고 이야기했던 여름밤의 순간들이 소중했다. 지금까지도 그날 저녁 모두가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의 단면을- 즐겨 먹는 조각 케이크를 먹듯- 가끔 꺼내 들으며 음미한다. (사실, 그 밤 분위기가 너무 좋아 아무도 모르게 난 음성 녹음을 하고 있었다. 물론 개인 소장용이다.)
헤어질 때, 가난하고 자유로운 시인은 19년 된 낡고 허름한 자전거에 올라타며 모두에게 굿 나잇 인사를 건넸다. 시인은 '한결같이 시를 쓰는 일'이 자신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시인은 밥벌이가 없이 떠도는 한량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눈동자가 맑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대도시에서 이방인으로, 외로운 작가로, 낯선 외국인으로, 수입이 전혀 없는 자신만의 글을 쓰는 시인으로, 예술하는 사람으로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아니 매일을 살아낸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예술을 사랑하고 일상의 예술하는 모든 사람들을 흠모한다. 나를 포함한 그들이 예술가로서의 반복되는 시간을 의연하게 꾸려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삶이 무모하고 처량 맞더라도 아랑곳 않고 그 리듬에 흔들려주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건은 계속되리라고. 서로 아무리 멀리 있는 곳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시인의 모습이 다름 아닌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이라 해도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20년을 한 가지 일에 순수하게 몰두하는 고독이야 말로 낯선 자아를 발견하는 여정에 있어 일상의 강력한 사건이 된다는 것을 믿는다. 무수한 타자들의 지속적인 노력과 꾸준함이 새로운 창작과 끊임없는 나날의 가치를 위해 아무튼 기도한다. 혹시 모르겠다. 이번 겨울 베를린에서 우연히 시인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또 묻게 될 것이다.
" Can you give me a chance to read one of your poems this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