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히루루크와 쵸파의 용기
난 절대로 널 쏘지 않아.
히루루크는 헐벗은 몸으로 외친다. 겉과 속 모두, 상처로 가득한 쵸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덜어낸 맨 몸으로, 눈보라가 휘날리는 숲 속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다. 쵸파의 웅크린 마음은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어쩌면 사람들에게 다가가고자 조심스레 용기를 내었던 예전의 자신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21. 3. xx.
겨우내 추위를 조금이라도 놓칠 새라 한껏 움켜쥔 그라운드에서 그는 이닝을 끝내지 못한 채,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
동료들로부터 수고와 위로의 몸짓을 받았으나, 그의 표정은 새싹이 돋기 전, 앙상하고 메마른 딱 지금의 나뭇가지 같았다.
부상에서 회복하고 새 시즌을 준비하는 출발선에서 자신의 노력 대비 너무도 초라한 결과를 건네받은 그는, 덕아웃도 불펜도 아닌, 경기장 밖, 보도블록 한 켠에 자리를 잡고 한참을 홀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의 힘겨운 사투를 보고 있자니, 나는 지금이야말로 멘탈코치가 ‘움직여야 할 순간’이라고 확신했다. 알량한 자신감과 뒤틀린 책임감은 나를 당당히 선수 옆에 앉혔고... 제대로 기억도 못 할, 목적조차 불분명한 질문 두어 개를 내던졌다.
어땠어? .... 괜찮아?
선수는 침묵만으로 답했다. 그럼에도 나는 한참을 그의 곁에서 삐댔다. 그는 온몸으로 날 좀 편히 놔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모두를 듣고 있었지만. 애써 모르는 척 어리숙한 오기를 부렸다. 아니야, 이럴 때일수록 곁에 있어줘야 해!
사실 알고는 있었다. 그는 '내'가 아닌 '혼자'가 필요했다. 그런데도 머리부터 발가락까지 움찔거리기만 할 뿐, 도통 엉덩이가 떨어지질 않았다. 일어나야 하는데, 이대로는 안될 것 같은.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전전긍긍 거리면서도 얼마를 더 흘려보낸 후에야, 간신히 자리를 물렀다. 미안함과 창피함이 뒤엉켜 뒤통수가 녹아내렸다. 무지의 대가로 다시는 경험하기 싫은 부끄러움이 또다시 내 몸에 덕지덕지 붙었다. 조만간 나는 실패와 부끄러움의 표본이 될 예정인가 한다... ...,
「21년 어느 봄에 적힌 일지 中 」
들어주겠다는 고약한 참견
나는 절대적으로 선수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우선한다. 별 다름은 없다. 코칭의 시작이 경청임을 차치하더라도 그저 선수라는 이름 아래 가장 흔히 따라붙는 고됨이,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꺼낼 수 있는 기회가 마땅치 않음에 있음을 무수히 경험했을 뿐이다. 고이고 고이면 곪는다. 가만 둘러보면, 비단 선수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쉬이 느낀다. 당장 나부터. 가족은 가족이라, 친구는 친구라, 동료는 동료라 고이고 고인다. 물론 그들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과 나눌 수 없는 이야기도 있다. 그나마 이건 양반이지. 이 바쁘고 제 잘난 세상에서, 장르를 떠나 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줄 '누군가'를 얻기란 훨씬 더 고달프다. 얼마 전, 친구 중 하나가 생을 달리했다. 가깝다 여겼건만 우리 중, 누구도 그의 진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것이 우리를 더욱 황망하게 했다. 손 쓸 수 없이 저며오는 후회는, ‘내가 아니 우리 누구라도 그의 진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면 어떠했을까’라는 무책임 뿐이다.
그런저런 모두가 뒤죽박죽 되어, 어쩌면 직업병, 아니면 직업강박. 코칭을 업으로 삼은 후부터 나에겐 이야기를 들어내야만 한다는 버거운 책무가 쌓였다. 비겁한 변명일지라도, 21년 이른 봄의 그 만행은 이것으로부터 태어났다. 그때의 나는 추호도 그럴 의도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그에게 횡포를 부린 셈이었다. 들어줄 테니 무엇이든 말해보라며 고약한 참견을 해댔다. 참견이 말로써만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때 나는 그에게 어떤 것을 들어야 했을까.
다시 한번 밝히건대. 선수의 진짜 이야기를 들었는가, 듣지 못했는가의 여부는 내 판단 하에서 가히 코칭 성과의 전부라 할 만하다.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코칭을 통해 선수가 얼마나 성장하고, 성과를 얼마나 내었는지는 냉정히 말해 내 몫이 아니다. 그건 오롯이 그의 몫이다. 나는 프로거나 아마추어, 성인이거나 학생, 나아가 그 흔해빠진 성향의 시작이 이(E)든, 저(I)든 상관없이 그가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방해 없이, 또 거침없이 쏟아내는 것에 가장 큰 가치를 둔다. 이야기가 얼마나 솔직하고, 가치롭고, 참되며, 의미 있고, 생산적인지 따위에는 관심 없다. 부풀리면 부풀린 대로, 숨기면 숨긴대로, 쓰잘데기 없으면 없는 대로. 우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때가 있으니. 조하리의 창을 들이밀어봐도, 어느 내가 진짜 나인지 분별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그저 좋다. 나를 내뱉는 것은 언제고 좋다. 쏟아지는 이야기가 막히지 않으면. 쏟아내는 자신이 평가받지 않으면. 되려 더 많은 이야기를 순수히 갈망받는다면. 끝내 진짜가 나옴을 나는 믿는다.
고로 내가 추구하는 멘탈코치의 최고이자, 기본의 임무는 선수들에게 그러할 수 있는 순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니 끝내 진짜 자신을 드러내며 우리를 환호하게 할, 너에 대한 우리의 영원한 자세는.
감히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지 않고, 같이 함께 헐벗어 있어주기.
나에게도 Dr. 히루루크와 쵸파의 용기를!
쵸파는 남들이 꺼려할 자신의 모습을 알면서도 자신과 나란히 서 줄 누군가를 찾기 위해 진짜 나를 있는 그대로 내보이며 다가가는 용기를 지녔다. 히루루크는 자신이 가진 해결책으로 우선하기보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역으로 자신이 인정하고 있음을 상대에게 도로 인정받기 위해 자신이 두른 모든 것조차 헐벗는 용기를 지녔다.
21년 이른 봄. 나는 그를 인정하기보다 그를 통해 내가 인정받고 싶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훌륭히 들어내었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또 그 외, 기억조차 못할만큼 하찮은 것들을 더럽게 많이도 바랐으리라.
하지만 정작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날의 '진짜 내'가 바랐던 것은 오로지 Dr. 히루루크와 쵸파의 용기를 그와 나누는 일이었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거리가 아닌 그가 원하는 거리에서 그저 내 모든 것을 덜어낸 헐벗은 존재로 있어주는 것이었다. 내가 그에게서 진정 들어야 했던 것은, 말이 아니라 존재였다. 소리가 아니라 이야기어라. 몸의 거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어라.
1년 후, 팀을 떠나는 나에게 그는 웃으며 이렇게 작별인사를 남겼다.
「 그때는 진짜 좀 그랬죠. 많이 불편했죠. 그래도 계시는 동안, 늘 제가 원할 때 제 이야기들을 할 수 있게 해주시고,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코치님. 」
나는 얼마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까.
나는 얼마나 나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을까.
우린 어떻게 서로의 이야기를 대하고 있을까.
우린 지금 어떤 모습으로 함께 하고 있을까.
가끔 생각나. 그러니 그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