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겨울_제발 그냥 좀 놔둬.

자꾸 건들면 흉 질지도 몰라.

by Juco


내가 아들보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그해. 나는 폐렴으로 사경을 헤맸고, 어미는 담당의로부터 마음의 준비를 권고받았다. 가엽고 불쌍한 여인의 애타는 기도를 주께서 받으셨고, 무자비한 권고는 권고에서 그쳤다. 이 또한 여인의 기도였을까? 잔인했던 그 날은 오롯이 그녀에게만 남았고, 나에겐 그저 왼쪽 뺨 작은 흉터 하나만이 남았다.



자꾸 만지지 마. 그러다 흉 져.



작았을 몸으로 죽지 않겠다고 낑낑 용을 쓰니 온몸 곳곳에 열꽃이 피었고, 머지않아 새 생명을 얻은 대가로 열꽃들은 딱지가 되었다. 어미는 절대 건들지 말라는 말을 앵무새마냥 반복했다. 간지럽기도 하거니와 피부에 딱딱한 뭔가가 붙어있으니 저도 모르게 자꾸 손이 간 모양이다. 그럼에도 어미는 물 샐 틈 없는 감시와 장갑, 마스크 등 아이템의 힘을 빌어 딱지들이 자연히 떨어질 때까지 잘 지켜냈다. 허나, 불효자 녀석은 기어이 철통 같은 보안을 뚫고 딱 하나 왼쪽 뺨의 가장 큰 딱지를 밤새 몰래 떼어버렸다. 날이 밝자 앵무새가 화났다. 자연히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면 알아서 아물 것을 자꾸 만지며 억지로 건드려 얼굴에 흉터를 냈다며 한참을 나무랐다. 그렇기로서니 몇 달을 입원해 있는 제자식을 이렇게 혼낼 수 있을까. 역시 주워 온 자식이 분명함을 확신하며 녀석은 등 돌려 서글픔을 삼켰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물지도 않고, 자식 뺨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시큰거릴 커다란 상처를 가슴에 품은 여인을 곁에 두고서.




무얼 믿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신앙생활이란 걸 장장 40년 가까이 해오면서도 진정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직 고민한다. 오히려 믿었다고 생각한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되려 믿음과는 더욱 멀어진 기분마저 드니. 믿음. 그것의 실재를 찾아 헤매는 요즘,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이 더욱 우습고 무섭다. 신앙생활의 기간은 마치 징역처럼 죄의 크기와 비례한다는 신앙인의 자조가 슬프다.


나는 적어도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스스로가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자녀를 믿는가? 당신은 스스로를 믿는가? 당신은 그것을 믿는가? 당신은 그를 믿는가? 믿지 않는 이와 당신에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믿음이 귀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 정작 우리는 믿음을 그저 입으로만 보내는 경향이 있다.




시즌이 끝났다. 잘했든, 못했든 시즌은 끝났다. 너는 보통, 아쉬움도 아쉬움이지만 대게는 끝났다는 홀가분함과 앞날에 대한 약간의 불안감, 그리고 내년 시즌에 대한 적당한 희망과 각오를 품는다. 어디 너뿐이랴. 나는 더 하다.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이곳이 아니면 차마 꺼내지 못할, 너(그리고 나)를 믿는다면서 정작 믿지 않은 치졸한 내 모습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진 말자.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를 가장 미치게 만드는 건, '내가 관여하면 할수록 네가 점점 더 안 풀리는 것 같다'는 자괴감과 '나는 정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서포트를 했는가'하는 자책감이었다. 거기에 이 둘은 1+1은 2가 아님을 증명하려는 듯 굉장한 하모니를 보였는데, 자책감은 여지없이 하찮은 내 능력을 향했고 자괴감은 내 존재 자체에 저주를 걸었다. 그렇게 한동안을 쇼츠에 빠진 아이마냥 허우적대다가, 그래도 멘탈코치랍시고 온 힘을 끌어모아 결론을 내렸다.


이번 비시즌엔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하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보자. 주먹과 어금니를 쥐어짜며 다짐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듯했다. 스스로 답을 찾고, 일어선 것 같았다. 진짜 멘탈코치 같았다. 나는 내 손에 쥔 것들과 주머니에 가진 모든 것을 탈탈 털어,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다시 목표를 잡고, 프로세스를 세웠다. 특히 실전에서의 집중력 유지에 포커스를 두고 맞춤 전략을 설계했다. 나는 한껏 고무되었다. 하루라도 빨리 너와의 작업을 시작하고 싶었다. 이번 비시즌을 통해 너와 내가 성공하길 꿈꿨다. 무엇보다 이것이 너를 믿고, 나를 믿는 믿음의 방식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내가 언제나 그래왔듯, 나는 곧 또 틀릴 참이었다.


내 위대한 계획을 실행하기에 앞서, 나는 너에게 전화를 걸어 의사를 물었다. 사실 물어봤다기보다 그냥 말했다. 코칭 시작 전, 으레 거치는 절차일 뿐었다. 나에게 너의 ‘대답’은 YES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너는 내게 보란 듯 아주 차분하고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나중에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지금 너의 상황과 입장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이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서는, 너를 내버려 두는 것과 너를 붙잡는 것 사이에서 내가 해야 할 최선이 무엇인지를 계속 따져 묻는 내가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통화를 마치고도 한동안을 멍하니 천장만 바라는 나를 보며, 곁의 아내가 안타까움을 깊이 깊이 뱉었다.



그냥 쉬게 좀 놔둬. 괴롭히지 말고.



응?

응??




직무 과잉책임감 Over-responsibility.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내 위치에 더욱 걸맞는 사람이 되고자, 주변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자, 주어진 임무와 기대에 차고 넘치게 부응하고자 때때로 나와 너, 모두를 괴롭힌다. 이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범실은 내가 믿어왔던 것들에 대한 믿음을 스스로 저 멀리 꼭꼭 숨겨버린다는 점이다.


무엇을 믿으며 여기까지 왔는가.


나는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이끄심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이 이끄실 선수의 삶을 믿는다. 그리고 나의 믿음은 언제나 기다림에서 완성되었다.




우리는 '믿는' 것을 어떤 '모습'으로 드러내고 있을까. 믿음이 진정한 믿음으로서 나로부터 살아 숨 쉬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할까. 매번 다르게 요동치는 상황에서 나는 꽤 많은 경우에 기다릴 줄 알아야 했다.


딱지가 절로 떨어져야 흉터 없이 사라짐을 믿었던 어미와 다르게 어린 자식은 당장 그 걸리적대는 딱지를 없애고 싶었다. 선수와 선수의 삶 전체를 당신께서 돌보심을 당연하게 믿으면서도, 그렇기에 선수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믿는다면서도. 당장 내가 무언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필히 내가 무언갈 해줘야 한다는 이타심 뒤에 교묘히 숨은 나의 욕심에 나는 자꾸 떠밀렸었다.


하지만 가장 현명하게 딱지를 제거하는 방법은 참고 견디는 기다림이었으며, 선수를 위한 가장 합당한 서포트는 믿고 바라보는 기다림이었다. 내게서 이런 방식이 영 낯설지 않은 것은, 그리 멀지도 않은 지난 곁에 봄_감히 참견하지 않고, 같이 헐벗기.에서 이미 한 번 처절히 경험했기 때문이렷다.


우리는 종종 기다림을 방만함과 무기력함으로 오해하지만, 사실 기다림은 가장 역동적인 행위 중 하나다. 기다림에는 움직임 못지 않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또한, 기다림은 믿음이라는 거대하고 강력한 에너지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이 있다면, 기다림은 필연적이다.


그러니, 멈추고 기다리자.


섣부른 다가감은 그에게 흉터를 남길 수도 있으며, 나에게 그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르니. 다가가는 발걸음이 그를 위함일까, 나를 위함일까.


우리 잠깐만 멈춰서 기다려보자.


눈에 띄는 곳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우리의 믿음이 다할 때에. 그가 스스로 충분히 준비하여 우리를 이끌 때를 위하여.



먼저 시작할 때까지 조용히 곁에만 있어주기. 생각보다 어렵다는 거.







믿음으로의 기다림 예시.

기다리며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판단이 아닌 관찰 ;「나는 다정한 관찰자가 되기로 했다. 이은경 저.」

"Don’t meet them with too many questions, let them talk, and sit in the silence." ;「 https://www.hopkinsmedicine.org/health/conditions-and-diseases/anxiety-disorders/anxiety-and-stress-in-teens 」

손잡기, 손으로 어깨 감싸기, 열린 자세(호의적 자세), 일관된 호흡과 안정된 시선/눈빛, 이완된 부드러운 표정, 물리적 거리(1~2m) ;「Non-verbal Social Buffering, Coan, Schaefer & Davidson, 2006, Handholding study」

더하기, 우리가 함께 그러했던 순간들.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28화곁에 봄_감히 참견하지 않고, 같이 헐벗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