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과 종이는 최고의 작품.
늦잠 두어 번. 미뤄둔 식사 한 번. 본가에 들러 밀린 효도 한, 두 번. 이래저래 꼭 필요한 몇 곳만 들른 후, 숨 한 번 고르고 나니. 어느덧 해가 바뀌고 다시 출발선. 스프링캠프. 우리는 누구보다 빠르게 봄을 맞는다.
재밌는 것은, 작년 이맘때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중요한 순간이 되었다는 사실. 꿈은 하늘보다 높고, 욕심은 바다보다 깊으니. 우리가 바라는 곳은 저 높이인가. 저 깊이인가.
비시즌을 휴가쯤으로 여기는 '너'는 없다. 입금 내역 하나 없음에도 시즌과 맞먹는 비시즌을 보냈으니, 몸상태를 물어보는 질문에 가히 이렇게 답할만하다.
아주 좋습니다. 100%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보여줘야 하니까요.
결코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줄 리가 없는 네가 이만큼의 대답을 해냈다면, 그것은 필시 진실일 터. 그러니 네가 좋다면 나도 좋다.
오늘도 복수초처럼 차가운 눈 속에서 부던히 꽃을 피워내고 있을 너와 나누고픈 이번 이야기는.
네가 피워낸 오늘을 살펴보는 일. 오늘은 어떤 빛깔의, 어떤 소리와, 어떤 촉감이, 어떤 향기로, 어떤 의미가, 어떤 마음을 주었는지. 오늘 너의 복수초는 어떠했는지.
때로는 길게, 때로는 무자비하게 짧게. 또는 일목요연하게, 혹은 중구난방하게. 중요한 것은 오직 펜촉이 종이에 슥슥 긁히는 소리를 들으며, 너만의 고유한 필체로 네가 너를 눈으로 만나는 것. 그런 시간을 갖는 것.
비시즌을 통해 100%로 준비한 내 몸은 캠프의 첫 훈련에서 어떤 느낌을 주는지. 어떻게 자는지, 어떻게 먹는지, 어떻게 말하는지,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하여 비단 지금의 나를 정돈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 년 뒤 또 지금으로 찾아올 나를 위해 준비하는 것.
허리 디스크로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은 통증을 겪으면서 죽었다 깨어나도 못 잊을 고통이기에 이것이 사라지기만 하면 평생을 감사하며 살겠노라 맹세했건만, 당장 오늘에도 그만큼의 통증은 없으면서 일상에서 변변치 못함을 수천 번 비난하며 내 허리에 불평불만만 쏟아내는 나처럼. 네가 어리석진 않으리란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우리의 기억에는 감정이 정보인 양 둔갑하는 경우가 많기에.
이제 막 달아오를 올 시즌과 시즌이 끝난 후 찾아올 또 한 번의 비시즌을 위하여. 지금의 몸 상태와 그 몸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여, 그것으로 우리가 또 한 번 맛있는 대화를 마주할 수 있기를. 앞으로 네가 계속해서 피워나갈 수많은 꽃들을 위하여. 지금 그토록 고되게 피워내고 있는 꽃이 무슨 꽃이며, 어떤 향기를 품고 있는지 보고 또 보아주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을 장소와 시간을 골라, 가능하면 매일.
스케치하듯 오늘을 떠오르는 대로, 흘러나오는 대로 적기.
적은 내용 중, 가장 마음이 닿는 포인트에 표시(다른 색 펜으로. 밑줄, 동그라미 등).
잘했고, 못했음을 평가함이 아니라, 어떠했는지를 그저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
더 궁금한 것은 우리 연락하자.
# 다시 먼 길을 떠나는 너의 배낭에 마음 편한 노트, 색깔 다른 펜들, 그리고 소소히 읽을거리 몇 개가 담겨있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