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렷한 겨울_한껏 취해보자, 우리가 어디까지 갈는지.

마무리 캠프를 훌륭히 마친 너에게.

by Juco


가을을 건너, 겨울을 향하는 길에 너를 본다.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사실 한 가지. '이제 시즌도 끝났으니~'를 힘입어 좀 쉬겠거니 하지만, '이제 시즌도 끝났으니!'를 덧입어 시즌보다 고된 스케줄이 열린다는 것. 시즌이 끝나고 주어지는 휴식과 회복의 달콤함은 일부에게만 주어지는 미각. 막말로 팀이 우승을 거둔다 하여도, 그건 그네들 잔치. 저만치 떨어진 외딴곳의 우리에게, 지금은 그저 또 한 번의 이별이 익숙한 계절일 뿐. 그러니 핸드폰 알림 속, 오늘을 가득 채운 빡빡한 훈련 스케줄은 도리어 이 계절의 멜랑꼴리함을 날려줄 유일한 모르핀.


혹시 모를 마음을 위하자면, 이것을 안타까이 바라볼 일은 아닌 것이. 정말로 우리는 이별에 꽤 익숙하야, 헤어짐을 더욱 희망찬 만남으로 기약할 줄 알고. 이토록 고된 이 계절은 내년을 위한 담금질이 되어 우리는 다시 꿈을 조각할 줄 알기에.


실로, 내가 만난 너는 일 년 중, 이맘때에 가장 저답게 평온하고 활활 타오르더이다.




다만, 이 계절이 주는 좋고도 아픈 것.


하나, 닿을 듯 닿지 못한 한 끗의 아쉬움. 하나, 결코 운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내라며 더욱 몰아치는 파도를 정면으로 맞서야하는 사투의 무게감. 하나,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을 라스트 댄스 속의 사자후. 하나, 간신히 찾아온 아주 얇은 기회를 온몸에 칭칭 감아두기 위한 애달픈 몸부림. 하나, 꿈꿔왔던 무대를 눈앞에 둔, 벅차오른 설레임과 위태로운 기대감의 양날. 둘, 지금의 너.


나에게서 오는 것이든, 남에게서 오는 것이든. 이 계절 우리에게 다가오는 너무도 강력한 수많은 것들의 거센 반작용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 자칫 모르핀에 과하게 취해, 더러 현실을 망각하고 목표와 몽상을 혼동하며, 흔들리는 시야에 앞날을 오해하여 난관과 낙관을 헷갈리기도 하니.


우리는 마냥 흐리멍텅하게 취(醉)하지 말고, 보다 철저히 제대로 취(取)해야 한다.



차오르던 안의 것들은 선명해진 후, 현실이 되었고 이제는 과거가 되었다.



내가 멘탈코치로서 일하게 된 것은, 솔직히 참으로 어리숙한 행보에 더해진 과분한 행운이었다. 나는 철부지 늦깎이였고, 제대로 된 계획이나 정보조차 없었으며, 다른 이들처럼 이 일에 대한 오랜 갈망이나 흔들리지 않을 소명, 나아가고자 하는 가치나 비전 따위도 없었다. 나에겐 그저, 어느 날 우연히 접한 '축구 국가대표팀, 멘탈코치 합류'라는 뉴스 속, 그들(멘탈코치와 선수)이 멋져 보인다는 마음과 어쩌면 나도 그들 곁에 설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함이 전부였다. 우여곡절 끝에 관련 공부를 해나가며 팀 멘탈코치를 꿈꾼다 말하면서도, 나는 그것을 여전히 희뿌연채로 내버려두고만 있었다. 당장 다음 발걸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도 모른 채 나아가는 꼴이, 딱 겨울 새벽 짙게 내려앉은 안갯속을 생각없이 쌩쌩 달리는 어리석음과 같았다.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겠다. 그것은 나에게 아직 먼 시점의 일 아니, 마치 남의 나라 이야기인 것처럼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 맞겠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받은 과분한 행운 중 하나인 일본인 코치로부터 짧게나마 코칭을 받았고, 그날 처음으로 나는 내 안에서 피어나던 흐릿멍텅한 것들을 선명하게 낱알 낱알 마주했다. 내 안의 것들은 또렷해졌고,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내가 해야 하는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가 하던 것들을 지속함에 있어 더욱 힘차짐을 느꼈다. 내가 꺼낸 낱알들은 현실이 되기 시작했고, 구불구불 안개 자욱했던 그 길은 경쾌한 고속도로가 되었다. 2년 후, 나는 팀 멘탈코치가 되었다.




저마다의 이야기로 눈송이보다 높이 높이 순수하게 쌓아갈 우리들의 계절. 이 계절의 너는 무엇보다 반짝인다. 그러니 지금 너에게서 차오른 그것을, 그냥 그대로 뿌옇게 내버려 두진 말자. 그러기엔 너무 빛나잖아.


지금 너는 정확히 무엇을 그리고, 어디를 바라며, 어떻게 향하고 있는가. 도저히 더 할 수 없을 만큼 세세히, 자신의 고개가 절로 끄덕이도록 합당하게, 활활 타오르는 지금의 몸과 마음을 모두 담아낼 수 있을 만큼 온전히. 지금 이 순간의 너를 확실히 취하자.


예전에는 같은 모자 아래로 모두를 주고받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럴 수 없기에. 이렇게나마.


이 가을을 건너, 저 겨울을 향해가는 외길목에 뚜벅뚜벅 떨어진 굵은 땀방울의 너를 하나, 둘 만나본다.







나의 공간(적어도 세 걸음 이상의 바닥, 혹은 최소 양팔 넓이 이상의 벽)을 찾아, 그곳에 가장 긴 직선을 그린다(가상의 선도 좋고, 종이테이프로 붙여도 좋고, 실선도 좋고).

직선의 한쪽 끝은 [오늘], 반대 끝은 [내년의 오늘]이 되니. [오늘]과 [내년의 오늘] 사이에 어떤 일들이 예정되어 있는가? 또, 어떤 일들로 채워지기를 원하는가. 각각의 일들은 서로가 잘 이어질 수 있는가? 더 부드럽게 이어지기 위해서는 추가로 어떤 일들을 필요로 하는가.

떠오른 일들을 그 일이 일어날 날짜와 함께 적어 선 위에 놓는다, 붙인다.

천천히 선을 따라 [오늘]부터 [내년의 오늘]까지를 생생하게 누벼본다.

그 선 어디쯤에서 우리가 또 한 번 기쁘게 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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